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逆說에 기초한 지적 구조물 ‘거대 사회이론’의 비밀
逆說에 기초한 지적 구조물 ‘거대 사회이론’의 비밀
  • 교수신문
  • 승인 2012.12.24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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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읽기_ 니클라스 루만의 『사회의 사회』 장춘익 옮김 ┃ 새물결 ┃ 1,344쪽 ┃89,000원

 

2008년 초, 한 대학원신문에 루만(Niklas Luhmann, 1927~1998, 사진)의 1984년 저서 『사회적 체계들―일반 이론에 관한 개요(Soziale Systeme)』를 소개하는 글을 쓸 때, 필자는 다음과 같이 루만을 소개했다. “니클라스 루만이라는 학자를 간단히 소개하자면, 첫째 사회적인 것이 무엇인지 밝혀내었고, 둘째 사회적인 것 일반을 다룰 수 있는 기초이론을 마련했고, 셋째 이를 토대로 한 사회이론을 제시했으며, 넷째 여기에 더해 20세기 후반의 세계사회에 대한 몇 가지 시대 진단을 내린 거대 이론가다.” 그런데 『사회적 체계들』은 첫째의 작업, 즉 사회적 체계들의 요소가 커뮤니케이션이며 이 커뮤니케이션은 의식들 간의 상호주관성과는 무관한 자기생산 단위임을 밝히는 작업과 둘째의 작업, 즉 상호작용, 조직, 사회 등 모든 종류의 사회적 체계들을 다룰 수 있는 개념들을 마련하는 작업까지 수행한 저작이었다. 루만 자신은 훗날 이 저작을 ‘사회이론 시리즈 0’ 라고 말했다.

 

루만이 1969년 빌레펠트대에 제출한 ‘기간: 30년, 연구비: 0’의 연구 계획인 셋째, 즉 포괄적인 사회적 체계인 사회를 다룬 ‘사회이론’과 그 연구 과정에서 파생된 넷째의 시대 진단은 1988년 사회이론 시리즈 1인 『사회의 경제』를 시작으로 해 1997년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30년을 다 못 채운 채로 출간한 『사회의 사회(Die Gesellshaft der Gesellschaft)』에서 집대성됐다. 위에 인용한 몇 년 전의 소개는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루만 사회이론의 완결작인 『사회의 사회』의 한국어판 출간에 즈음해, 필자는 이런 소개를 덧붙이고자 한다. “루만은 역설을 다루는 대가이며, 역설에 기초한 거대 사회이론을 제시했다. 그는 사회를 체계분화이론, 커뮤니케이션과 그 매체이론, 진화이론의 세 차원으로 기술하고 현대 사회의 기능적 다맥락성을 밝힘으로써, 사회의 자기생산에 대한 다차원적, 다맥락적 자기기술을 누구보다 풍부하게 했다. 하지만 그것이 결국 ‘사회의 사회’라는 역설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루만의 역설 다루기와 ‘형식의 재진입’
루만의 역설 다루기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보겠다. 루만은 모든 관찰자는 맹점을 갖고 있으며, 특히 자기관찰을 하는 관찰자는 그 맹점으로 인해 결코 역설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보았다. 우리가 주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주체가 아닌 것(흔히 객체)과의 구별에 의해서만 가능하며, 정신을 말할 때 그것은 정신이 아닌 것(흔히 자연)과의 구별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체계이론이 그 대상인 체계를 표시할 때 그것은 체계가 아닌 것(즉 환경)과의 구별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하지만 일차 관찰자는 자신이 보는 것(주체, 정신, 체계 등)만 볼 수 있지, 보지 않는 것은 볼 수 없다. 모든 관찰자는 보지 못하는 것, 즉 맹점을 이용할 때만 무언가를 볼 수 있다. 철학적 전통, 특히 독일 관념론은 이러한 맹점을 극복하기 위해 이차 관찰을 시도했다. 자아와 비아의 구별은 절대적 자아 안에서의 구별(피히테)로 파악됐고, 정신과 자연의 구별도 정신의 ‘자기 안에서의 구별’(헤겔)로 파악됐다. 루만 역시 이차 관찰인 체계의 자기관찰은 ‘체계/환경 차이의 통일’이라는 ‘형식’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본다. 이를 루만은 형식의 재진입(re-entry)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 재진입을 이용한 이차 관찰 역시 그 관찰자의 맹점 덕택에 가능하다고 본다. 그래서 이 맹점은 이차 관찰자를 역설에 빠지게 만든다. 관찰된 자기는 자기가 아니라는 통찰, 관찰된 환경이 아닌 다른 환경이 있다는 통찰이 제기될 때, 체계는 자기가 체계인지 환경인지 확정할 수 없는 역설에 이르게 된다.

 

그렇게 되면 이차 관찰자는 삼차 관찰, 사차 관찰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것은 독일 관념론자들의 관념과 달리 더 높은 수준의 관찰이 아니며 결코 절대정신 같은 것에 이를 수 없다. 삼차, 사차 관찰 역시 그 고유한 맹점에 의지하는 또 다른 관찰들일 뿐이며, 역설은 이를 통해 전개 혹은 유예될 뿐이다. 루만은 현대 사회의 기능체계들의 예를 통해서도 이러한 역설 전개의 양상을 보여준다. 법체계의 경우, 그 환경에서 일어난 사건을 합법·불법의 코드를 이용해 체계 안에 재진입시킨다. 하지만 모든 사건이 법체계에서 다루어질 수 없을 뿐 아니라, 법은 법이 불법이라는 주장 앞에서 최종적인 정당화 근거를 결코 찾을 수 없다. 신성한 근거를 상실한 실정법 시대의 법은 자신을 합법으로도 불법으로도 귀속시킬 수 없고, 두 값 사이에서 진동할 수밖에 없다. 실정법의 근거가 되는 초실정적 실정법(헌법)의 제정, 1심, 2심, 3심과 같은 절차화를 통해 역설은 전개 혹은 유예될 수 있지만, 역설이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법이 불법의 혐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듯이, 모든 진리는 허위의 혐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이렇듯 기성의 모든 가치와 규범이 그 정당화 근거를 찾을 수 없고 역설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루만은 해체주의적이다. 하지만 루만은 현대 사회의 부분체계들이 어떻게 이 역설을 견뎌내어 왔는지 보여준다. 기능체계들이 어떻게 역설을 전개하고 유예하면서 지극히 비개연적인 정상성을 산출해왔는지 즉, 특화된 보편주의를 실현했는지 보여준다. 이 점에서 루만은 다맥락주의자이긴 하되 다원주의자가 아니며, 구성주의자이긴 하되 상대주의자가 아니다. 그래서 루만은 학문체계의 코드인 진리의 역설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을 갖고 있는 자신의 사회이론을 해체론적으로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정상적인 학적 진리로 보이는 거대한 구조물로 짜임새 있게 구성한다. 그리고 그의 언어는 복잡하긴 하지만 결코 모호하지 않다. 그래서 루만을 연구할 때 그의 개념이 문맥에 따라 어떻게 다른 의미를 갖는가에 관한 골치 아픈 문헌학적 논쟁은 별로 할 필요가 없다.

루만의 사회이론은 그가 의미라는 매체의 세 차원이라고 규정한 사태적 차원, 시간적 차원, 사회적 차원으로 구성된다. 내부와 외부의 차이(사태적 차원)에 따라 체계분화이론이, 과거와 미래의 차이(시간적 차원)에 따라 진화이론이, 자아와 타아의 차이(사회적 차원)에 따라 커뮤니케이션과 그 매체에 대한 이론이 펼쳐진다. 이 세 이론이 『사회의 사회』의 4장, 3장, 2장에 각각 해당된다. 그래서 ‘체계이론’이라는 명칭은 그의 사회이론을 표현하는 하나의 차원에 해당되는 것이다.

다시쓰기를 강요받는 사회학
그런데 서장이라 할 수 있는 1장은 ‘사회적 체계로서의 사회’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우리는 언어를 사용하는 한 그 대상을 우선 ‘무엇’이라 불리는 것으로, 즉 의미의 사태적 차원에서 지칭해야 한다. 언어는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사건들의 연쇄를 존재론화한다. 그래서 ‘사회’를 지칭하는 순간 그것은 우선 그 외부로부터 뚜렷이 구별되는 내부, 즉 체계로 불리어야 한다. 그리고 현대 사회에 관한 가장 명료한 자기기술은 체계분화이론에 따른 기술, 즉 기능적 분화 형식에 따른 다맥락적 기술이다. 『사회의 경제』, 『사회의 학문』, 『사회의 법』, 『사회의 예술』 등인 것이다. 『사회의 사회』의 마지막 장인 5장 ‘자기기술들’에는 현대 사회를 기술해온 수많은 의미론들, 예를 들어 계급사회, 정보사회, 위험사회, 탈근대사회 등의 담론들에 대한 비판적 평가들이 담겨 있다. 하지만 그러한 자기기술에는 현대 사회를 기능적으로 분화된 사회로 간주하는 루만 자신의 사회이론도 포함된다.

사회학은 사회 안에서 사회를 기술하는 자기기술의 역설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그것은 끊임없는 재기술, 즉 다시 쓰기를 강요받는다. 루만 자신이 이미 이 저작의 도처에서 기능적 분화의 결과로 인한 현대 사회의 한계에 대한 여러 가지 진단을 내리고 있다. 사회의 자기생산에 대한 사회의 자기기술은 그 자체로 자기생산의 일부가 되며, 기술된 사회를 벗어나는 사회가 떠오름으로써 처하게 되는 역설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이 책 제목 자체가 동어반복인 동시에 역설을 함축하는 ‘사회의 사회’이다(1300쪽에 나오는 표가 이 책 제목의 의미를 뚜렷이 보여준다). 또한 우리는 루만의 맹점을 간파하고 루만 이후에 사회이론을 다시 쓸 수 있다. 그런데 그는 그러한 다시 쓰기를 촉구하면서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부탁을 남겼다. “달리 해보시오. 하지만 최소한 마찬가지로 잘 해야 하오.”(1294쪽)

 


정성훈 서울시립대 HK연구교수·철학
서울대에서 박사를 했다. 「형이상학 이후의 인권이론―루만과 하버마스로부터」 등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으며, 옮긴 책에는 『니클라스 루만으로의 초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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