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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문화의 자긍심 모색한 시도 그럼에도 불편한 ‘교양의 역설’
과학문화의 자긍심 모색한 시도 그럼에도 불편한 ‘교양의 역설’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2.11.26 13: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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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읽기_ 『에포컬 모멘텀』 한동현·신동원 외 지음┃들녘┃256쪽┃13,000원

 

이 책의 제목대로 ‘에포컬’은 ‘획기적인, 신기원의, 전대미문의’의 뜻을 안고 있다. 그래서 책의 부제가 자연스럽게 ‘한국 과학사의 획기적인 순간들’로 명명돼 있다. 한국 과학사에 ‘획기적인 순간들’이라니! 이 제목은 두 가지를 전제한다. 하나는 한국 과학사의 자부심을 끌어올릴 수 있다는 인식의 전환. 다른 하나는 실제로 거기에 부합하는 ‘사실’로서의 과학적 사건과 각각의 내적 연관성이 존재한다는 시각의 정립. 두 가지가 지리멸렬하다면 이건 저자들이 모두 ‘바가지’를 써야 할 문제다. 이를 의식해서일까, 한국현대연구소 소장인 한도현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사회학)는 “이 책은 한국 과학사의 획기적 전환을 불러온 순간이나 인물들을 재조명해 우리 과학 발전의 동력을 찾아보고 그 정신을 되살려보기 위해 썼다”라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그의 말을 좀 더 들어보자. “일제강점기를 겪으며 우리가 ‘비과학적이고, 기술자를 천시했다’는 식민주의적 사고방식에 빠져 있었던 적이 있으며, 그 잔재는 아직도 남아 있다. 이 책은 우리 스스로의 역동적인 과학 발전의 양상을 역사 속에서 확인하며 그러한 사고방식이 얼마나 그릇된 것인가를 보여줄 것이다.”

“과학 발전의 동력을 찾아서…”
책의 냄새가 이렇게 나게 된 데는 사정이 있다. 이 책에 실린 개별 원고들의 태생적 성격 때문이다. 한국과학창의재단 지원 사업인 ‘2011년 에포컬 모멘텀(Epochal Moment): 한국과학발전사의 우수 사례를 통해 배우는 과학문화발전의 방향’에 발표된 글들이다. 사실 근래 한국 과학사 전반을 다루는 주목할 만한 작업들이 이어지고 있다. 이 책은 이들과 달리 ‘성취의 놀라운 시기나 인물, 분야에 집중’한다는 점에서, 나아가 그 순간을 재조명해 한국 과학 발전의 동력을 찾아보려고 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저자들 스스로가 표방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 책이 놀라운 시기나 인물, 분야에 집중하는 건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이들이 배태되는 맥락을 도외시하고 있는 건 아니다. “영감이 태동되고 현실화될 수 있는 사회문화적 여건과 제도적 장치가 복합적으로 뒷받침될 때” 과학기술의 발전이 이뤄진다고 저자들이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저자들은 책의 구성을 2부로 나눴다. 제1부에서는 전근대 한국 과학의 에포컬 모멘텀을 더듬고, 제2부에서는 현대 과학의 에포컬 모멘텀을 살폈다.


그렇다면 한국 과학사의 ‘에포컬 모멘텀’이라 부를 수 있는 장면은 과연 무엇일까. 10개에서 하나 빠지는 9가지 순간을 꼽았다. 「고구려 벽화 속의 과학기술문화 단상」(김일권), 「세종은 어떻게 최고의 과학기술 성과를 이뤘나?-위대한 과학 창조의 조건과 과제」(박현모), 「『동의보감』과 동아시아 의학의 에포컬 모멘텀」(신동원), 「氣의 과학: 동아시아적 패러다임의 세 전환」(한형조), 그리고 「국가를 위한 샘플 채취-한국의 기생충박멸운동 공중보건 네트워크의 형성, 1969~1995」(존 디모이아), 「과학문화 대중화의 국민운동으로서 농촌 새마을 운동」(한도현), 「한글, 컴퓨터에 깃들다」(김태호), 「한국적 연구시스템의 형성과 사회 발전」(문만용), 「소리 없이 세상을 움직인다-포스코의 성장과 기술 발전」(송성수) 등이다. 이를 간추려보면, 고구려 벽화, 세종 시대의 과학기술 성과, 氣의 과학, 동아시아적 패러다임 전환, 기생충박멸운동, 농촌 새마을 운동, 한글 타자기 자판 배열, 과학기술연구소, 포항제철 등이 전근대-현대 한국 과학의 에포컬 모멘텀이란 것을 알게 된다.

▲ 한국 전통 문화 속에 내재한 획기적인 과학적 사건으로 고구려 벽화에 나타난 천문학적 인식이 꼽혔다. 약수리 고구려 고분에는 북두삼성이 그려져 있다.(사진 왼쪽) 현대 한국의 기술 창출의 전진기지가 된 포스코의 한 광고문구.


예컨대, 고구려 벽화에서 다채로운 천문학 관련 사료를 읽어낸 김일권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민속학)는 “고구려의 기명 28수 그림은 동아시아 유물 천문학사에서 고구려 벽화가 가장 오래된 것임을 나타내는 등 고구려 자체의 천체관찰과 천문체계가 수립돼 있음을 여러 측면에서 읽을 수 있었다”고 말하면서 이를 한국 고대의 귀중한 과학문화사 흔적으로 자리매김했다. 『동의보감』을 한의학의 새 표준 확립으로 읽어낸 신동원 카이스트 교수(인문사회과학과)는 “『동의보감』의 출현은 동아시아 의학의 역사에서 ‘에포컬 모멘텀’, 즉 획기적인 전환의 순간이다. 또 이 책이 이후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의서로 읽히면서 한국의 의학을 혁신시켰고, 그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의 존재는 한국사에서도 빛나는 ‘에포컬 모멘텀’을 이뤘다고 하겠다”라고 평가했다. 아마도 이 책에서 가장 논쟁적인 부분은 새마을 운동을 ‘운명의 통제. 과학적 태도 확산’의 계기로 읽어낸 한도현 소장의 글일 것이다. 새마을 운동을 동원체제로 읽어내는 사회학계 작업이 진행됐던 것을 상기한다면, 새마을 운동이 농촌 사회의 과학 대중화 운동에 선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그의 주장이 성립하려면 좀 더 많은 논거들이 제시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과학적 순간들의 내적 연결성 아쉬워
한국 과학사의 획기적인 순간을 찾아 이를 과학 자긍심으로 인식 전환하고자 하는 이 책의 의도는 충분히 이해된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이들 9가지 ‘획기적인 순간들’이 어떤 논거에서, 어떤 과정을 통해 호명된 것이냐의 문제다. 개별 연구자들이 자신의 양식과 주관에 따라 단순하게 선정해 발표했다는 인상을 주는 것도 이 때문이다. 혹 저자들은 이 책이 ‘학술서’가 아니라, “일반 시민이나 대학생, 더 넓게는 중고생까지 널리 읽고” 뭔가 의식의 변화를 경험할 수 있기를 기대하는 ‘교양서’라는 사실을 강조한다고 해도 사정은 변하지 않을 것 같다.


이렇게 보면 이 책은 과학 교양서와 독자의 행복한 만남이 어떻게 이뤄지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좋은 기획일지라도 독자와 공감할 수 있는 영역이 합리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처럼 ‘이것이 9가지 에포컬 모멘텀이다’라고 ‘정답’을 찍어주는 것이 아니라 한국 과학사의 흐름 속에서 이들 에포컬 모멘텀을 만들어낸 동력에 대한 자유로운 생각의 얼개를 열어주는 연속된 계기를 찾아가는 고민을 보여주었더라면 어땠을까. 과학과 경계에 놓인 각 분야 전공 학자들이 쉬운 언어로 과학 대중화 작업에 뛰어든 것은 분명 의미 있는 진전이지만, 이 책과 같은 접근(학술심포지엄에서 발표-수정 보완-단행본 출간)은 고민의 흔적이 드러나지 않은 ‘지식의 퍼나르기’로만 보일 수 있다는 점에서 교양서 서술의 반면교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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