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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장의 여인’ 혹은 ‘百丈禪師의 淸規’ 생각
‘산장의 여인’ 혹은 ‘百丈禪師의 淸規’ 생각
  • 최재목 영남대ㆍ철학과
  • 승인 2012.10.29 13: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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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목의 유랑·상상·인문학(25) 브뤼헤 베긴회 수도원에서

 

꽃이 핀 고요한 베긴회 수도원 풍경. 사진=최재목
그은 줄처럼 비스듬하게 비껴 서 있는, 안 뜰의 나무들 때문일까. 베긴회 수도원에 발을 디디자, 잠시 영화「러브스토리」의 배경인 하버드대 교정이 눈앞을 스친다. 어딘가 닮은 듯, 좀 다르다. 나무 밑엔 순종하듯 낮게 핀 노란 꽃잎들. 수녀 같다. 나는 뜬금없이 스치는 100자 시 한수부터 메모해 둔다.

 

‘동영상으론 담을 수 없네/수줍은 햇빛과 어린 고요/저 꽃송이마저 없었다면/누가 안마당을 지키겠나/바닥의 돌들 스스로 닦아/모두 묵언의 수녀들이 된/몸이 없으면 없었을 지상/손 모으고 발 모으면 천국/누군가 가만히 말을 건다/넌 내 품에서 핀 한 송이 꽃’(최재목,「베긴회 수도원에서」)

베긴회 수도원은 1245년, 십자군 전쟁으로 남편을 잃은 미망인들이 서로 의지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플랑드르 백작 부인 마그리트 드 콘스탄티노플(Marguerite de Constantinople)이 설립한, 전통이 오랜 곳. 199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록됐다.

현재 베네딕트파 수녀들이 생활하고 있고, 플랑드르 지방 베긴회 수도원 가운데서도 가장 아름다운 곳이란다. 베네딕트파라? 이탈리아의 수도사 누루시아의 聖 베네딕트(480~543)가 창시자다. 그가 마련한 수도원의 계율은 ‘청빈, 정숙, 복종’. 금욕적이고, 엄격한 규칙적 공동생활이 특징이다. 매일의 일과는 노동과 기도다. 

우리 전통 사찰에서도, 敎學과 禪學을 兼修하도록 하고, 울력(運力, 雲力: 대중들이 함께 모여 하는 육체적 노동)을 통한 淸貧을 강조한다. 베네딕트파에서도 육체적 노동의 신성함을 강조한다. 이런 점은 중국 선종 百丈(懷海)禪師의 ‘一日不作, 一日不食’이란 淸規 정신에 비견된다. ‘청규’란 불교 선종에서 지켜야 할 수도 규칙. 선승들의 모임 즉 叢林(禪林 또는 禪苑. 나무가 우거져 숲을 이룬 것처럼 많은 수행승들이 한곳에 머무름을 비유)을 뜻하는 ‘淸淨大海衆(大海와 같이 청정한 무리=출가 수행 비구스님들)’의 ‘청’에다 수행자가 지켜야 할 규칙인 ‘規矩準繩(그림쇠·곡자·수준기·먹줄)’의 ‘규’를 합한 말. 향적스님의 가톨릭 수도원 체험기『프랑스 수도원의 고행』에선, 침묵 속에서 마음을 고요히 하는 베네딕트파의 묵상방법이 黙照禪과 유사하단다. 뿐만 아니라 가톨릭에서 명상을 할 때 성인의 가르침을 마음속에 되새기는 방법은 看話禪, 念佛禪과도 닮았단다.

아, 그런데, 나무 틈틈 서 있는 꽃들을 쳐다볼 때, 내겐 왜「산장의 여인」이란 노래가 생각날까. 가수 권혜경의 대표곡.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 단풍잎만 채곡채곡 떨어져 쌓여있네. 세상에 버림받고 사랑마저 물리친 몸 쓰라린 가슴을 부여안고 나 홀로 재생의 길 찾으며 외로이 살아가네’. 결핵에 걸려 외딴 곳 ‘마산결핵병원’(현 국립마산병원)에서 쓸쓸히 투병하는 여인의 아픈 마음을 담은 대중가요다. 작곡가 반야월이 6·25전쟁 직후 마산방송에서 문예부장으로 근무할 당시 그곳에 위문공연 차 들렀다가 요양 중인 한 여인의 슬픈 사연을 듣고 지은 곡이라는데. 왜 하필 멀고 먼 베긴회 수도원까지 와서 나는 ‘산장의 여인’을 회상하는 걸까. 가을도 아닌, 봄인데. 베긴회 수도원엔, 단풍잎 대신 만개한 꽃들 뒤꿈치를 들고, 묵묵히 내면을 비추고(黙照) 있는데.

 ‘修道院’하면, 가톨릭 교회의 수도사나 수녀들이 ‘청빈, 정숙, 복종’의 서원을 세우고 道를 닦는 거주지보다 심신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은둔한 요양원을 먼저 떠올린다. 유교·불교적 ‘修道’가 아니라, 심신의 병리를 치료하기 위해 사람들을 격리 수용한 시설 말이다. 마치 ‘가든(garden)’하면 ‘庭園’이 아니라 소갈비 음식점이 떠오르는 것처럼. 우리의 근대는 이렇듯 왜곡된 어법과 풍경을 만들어냈다. 그런 것들이 내 영혼 속에서 불편하게 삐걱댄다. ‘성벽은 말없이/차갑게 서 있고, 바람 곁에/풍향기는 덜걱거리네’라는 횔덜린의「반평생」한 구절처럼, 나는 그런 삐걱대는 풍경 속을 달려온 건가.

 

봄엔 흐드러지게 꽃 피고, 가을엔 눈 쏟아지듯 낙엽이 진들, 무엇이 변할까. 원효말대로 ‘立而無得, 破而無失」. 꽃이 핀다고 늘어난 게 없고, 낙엽이 진다고 줄어든 것도 없다.  관광객이 떠나자, 인기척이 없다. 아무도 없다. 그래서 아무 말이 없다. 슬픔도, 기쁨도 모두 물러나, 깔끔하다. 수도원을 돌아나가며, 나는 초콜릿 가게에 들린다. 당분 섭취로, 흐릿해진 마음의 심지에 불을 붙인다. 點心! 함께 한 딸아이는 마냥 즐겁다. 다시 100자, 시한 수.

‘딸아, 너도 사랑한 날을/가슴에 담아둘 수 없겠다/수도원 옆 초콜릿 가게에/서성이는 걸 보면 달콤한/시절은 맘에 담아도 넘쳐/눈부신 태양처럼 가득해/아픈 발 저리도 물에 적셔/몸 쌓아 올라 닿은 벽의 끝/검푸른 나무 그림자 둘 셋/아득히 흔들려 무너진다’(최재목,「초콜릿 가게에서」)

입에 초콜릿을 물고, 보트를 탄다. 운하를 따라 시내를 둘러볼 생각. 중세의 편린들이 좁은 물길에 스칠 때, 벽돌의 고요한 낡음, 창틀 틈으로 ‘중세’는 보일 듯 말 듯. ‘좀 더!’ 하고 필름을 돌리려 하나, 손잡이가 보이질 않는다. 아, ‘어이(어처구니)가 없다’.

최재목 영남대ㆍ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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