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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고요에 기댄 꽃들, 멈춘 시간의 부두를 찾아가다
중세의 고요에 기댄 꽃들, 멈춘 시간의 부두를 찾아가다
  • 최재목 영남대ㆍ철학과
  • 승인 2012.10.15 13: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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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목의 유랑·상상·인문학(24) 벨기에의 오스텐도에서 브뤼헤로 가는 길

 

벨기에 브뤼헤에 있는 사랑의 호수 풍경. 사진=최재목
‘여보소, 공중에/저 기러기/열십자(十字) 복판에 내가 섰소./갈래갈래 갈린 길’이라는 김소월의 시「길」이 자꾸 오브랩되는 벨기에. 베네룩스 3국의 하나. 네덜란드에 머물면서 나는, 간지러운 등을 긁듯 자꾸 벨기에 쪽에 눈길이 갔다. 정식 명칭은 벨기에왕국(Kingdom of Belgium), 영어로는 벨지움(Belgium). 네덜란드어로는 벨히어(Belgie). 일본에서는 베르기(ベルギー)라고 부른다.

우리나라와 처음 관계를 맺은 것이 대한제국 당시(1901년)니, 100년 이상이 지났지만 너무 먼 나라로만 느껴진 때문에서이다. 유럽에서 가장 작은 나라 중 하나인데,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르완다와 부룬디를 차지해 벨기에령 루안다-우룬디를 만들어냈고, 결국 그들의 식민통치가 르완다 학살의 뿌리가 됐다 한다. 

기차를 타고 프랑스, 룩셈부르크로 가려면 어쩔 수 없이 거쳐야 했던 곳, 브뤼셀. 그 밖의 오스텐도, 브뤼헤(브뤼주), 겐트(헨트), 안트베르펜(앤터워프), 루벵 등지도 모두 둘러보고 싶은데, 길눈이 어두운 나로서는 참 벅찬 여정이다. 딸과 아내를 길잡이 삼아, 몇 번이나 네덜란드 국경을 넘는다.

그런데, 참 신기하다. 풍경이 비슷해서 네덜란드인가 싶은데, 어느새 벨기에란다. 자동로밍된 휴대폰엔 통신회사 이름만 바뀔 뿐, 두 나라의 국경 부근은 겉보기에 별반 차이가 없다. 아시아에서 늘 느끼는 강열한 ‘국경’ 관념이 여기 오니 참 시시해진다.

북쪽은 네덜란드, 남쪽은 독일과 룩셈부르크, 서쪽은 北海를 사이에 끼고서 영국과 인접해있는 벨기에는, 이들 4개국 사이에 ‘네거리’로 불린다. ‘이리 갈까 저리 갈까 차라리 돌아갈까…’ 머리를 두리번대며(首), 열십자 네거리(彡=╬=行) 복판에서, 발(足)에 힘을 주며 쉬엄쉬엄 걸어가는 모습(辶=辵)을 떠올리면 좋겠다. 길 ‘道’ 자는 본래 이런 것이다. 하기야 벨기에를 통하면, 사방 이곳저곳을 다 갈 수 있으니, 우리나라 대전쯤으로 봐도 될까.

벨기에하면 맥주, 초콜릿, 와플만 떠오른 게 아니다. 워털루 전투가 있다. 1815년, 벨기에 남동부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과 웰링턴이 이끄는 영국·네덜란드·프로이센 연합군의 싸움. 여기서 프랑스 군대는 참패하고 나폴레옹은 세인트 헬레나섬에 유배돼 거기서 죽는다. 네거리 벨기에에서, 결국 피눈물의「갈래갈래 갈린 길」이 되었던 셈.

벨기에는 언어 경계선으로 남과 북이 갈린다. ‘네덜란드어’권의 북부 플랑드르 지방과 ‘프랑스어’권의 남부 왈롱 지방이 그것이다. 독일 국경 부근에서는 ‘독일어’가 사용되니, 기본 3개 국어가 쓰이는 나라다. 언어가 다르니, 지역 색도, 나름 복잡한 사정도 있겠다. 수도 브뤼셀에서는 프랑스어와 네덜란드어가 병용된다.

벨기에를 돌면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도시는 브뤼헤다. 13세기 중세 당시의 아기자기한 집과 교회, 고요 속으로 사뿐히 미끄러지듯 떠다니는 작은 보트를 품에 안은 도시. 중세의 숨결이 漂石처럼 남은 곳. 거기, 시간이 흘렀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입을 닫는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이미 말했지. ‘시간은 이 세상에 생겨난 모든 것이 모여 흐르는 거친 강물과 같은 것. 어떤 것이든 나타났다 하면 순식간에 흘러 가버리고, 다른 것이 나타나 그 자리를 채운다. 그리고 그것 역시 금방 사라져 버린다’고. 나는 브뤼헤가 좋아 봄, 여름 두 번이나 찾았다.

벨기에의 북쪽 지방을 말하는 플랑드르어로는 브뤼헤(Brugge), 프랑스어로는 브뤼주(Bruges). 운하로 둘러싸여 있어, 북쪽의 베니스라고도 불린다. 7세기 경 프랑드르인들이 세운 도시다. 13~14세기엔 무역의 중계지로서 남유럽의 베네치아(베니스)에 비길 만한 상업도시였다. 세계적인 무역항으로 명성을 떨쳤던 이 시기에는 많은 성당이 건립되는 등 잘 나가던 곳.

그런데 15세기말에 즈웨인灣의 토사 퇴적으로 항구의 기능이 쇠퇴하고, 상업 활동의 기반이었던 플랑드르 지방의 모직물 공업도 시들어, 결국 상업의 지배권도 안트베르펜에 넘겨줘야 했다. 이후 다행히 막힌 운하의 물길이 뚫렸고, 침체됐던 상공업이 다시 살아나, 도시는 새로 활력을 찾는다.

브뤼헤엔,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의 ‘황성옛터’처럼 과거의 ‘터’의 ‘무늬’(=터무니)만 남은 건 아니다. 발전이 멈춘 15세기말 중세, 그 잘나가던 시절의 맨얼굴을 그대로 지켜올 수 있었다. 그래서 천정 없는 박물관이란 소리도 듣는다. 

 

흐린날 오스텐도 부두 풍경. 도버해협에 접한 벨기에의 '바다 현관'으로 불리는 오스텐도. 선착장에 정박한 배들과 빽빽한 돛대들과 즐비한 카페. 이곳이 유럽 상류계층의 피서지였음을 말해준다. 사진=최재목

 나는 혹시 도버해협의 건너, 영국의 엉덩이 부근이 바라보일까 해서 호기심에 잠시 오스텐도에 잠시 들린다. 브뤼헤에서 기차로 15분 거리. 바다 건너 서쪽을 쳐다봐도 영국은 보이지 않는다. 벨기에의 바다 현관이라 불리는 곳. 선착장에 정박한 배들과 빽빽한 돛대들, 즐비한 카페가 한때 이곳이 유럽 상류계층들의 피서지였음을 말해준다. 

다시, 브뤼헤로 발길을 돌린다. 역에 내려, 타박타박 20분 정도를 걸어들면, 사랑의 호수 공원에 이르는데, 여긴 일찍이 브뤼헤와 겐트를 잇는 수상 운송의 부두였단다. 예쁜 다리를 건너자마자 호수를 끼고 왼쪽으로 살짝 빠져 내려가 걸어 들어가면, 베긴회 수도원에 닿을 수 있다. 거기, 고요가 가만히 눈을 감고 기다리는 곳.

 

튜울립 핀 베긴회 수도원. 사진=최재목

최재목 영남대ㆍ철학과

최재목 영남대ㆍ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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