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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그는 희생자인가, 가해자인가?
과연 그는 희생자인가, 가해자인가?
  • 교수신문
  • 승인 2012.10.04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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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프리드리히 대왕 탄생 300주년 논쟁을 보면서(下)

연구년(안식년)을 맞아 독일로 떠났던 최민숙 이화여대 교수(독문학)가 프리드리히 대왕 탄생 300주년을 놓고 독일 문화계가 보이는 상반된 태도를 보면서, 이 갑론을박의 문화적 풍경을 놓치지 않고 분석한 글을 보내왔다. 3회차인 이번 호에서는 마무리 부분을 게재한다.

프리드리히 대왕, 과연 그는 희생자인가 가해자인가? 토마스 만은 그를 ‘희생자’로 보고 있다. “그는 희생자였다. 그는 자기가 희생을 했다고 말했다. 그의 청년기는 그의 아버지를 위해, 그의 장년기는 국가를 위해. 그러나 그가 자신이 다르게 행동 할 자유가 있다고 믿었다면 그것은 잘못 생각한 것이다.

그는 희생자였다. 그는 부당한 일을 해야만 했고 생각에 반하는 인생을 살아야만 했다. 그는 철학자여서는 안 되고, 왕이어야만 했다.” 심지어 같은 영국에서도 프러시아 국가에 대한 평가는 다르다. 영국 역사학자 크르스토퍼 클라크에 의하면 좌파에게 프러시아적이라는 말은 ‘강압적인’이라는 말과 동의어로 쓰이는 반면, 토리당에게 프러시아는 자기들과 같이 연합해 나폴레옹에게 대항했던 국가로서 긍정적인 이미지로 각인돼 있다. 프리드리히의 전쟁으로 분할된 역사가 있는 폴란드의 시사평론가 아담 크르체민스키(Adam Krzem 、nski)는 이러한 클라크 교수의 의견에 즉시 항의를 한다. 당시 제국주의적 세력이던 영국이 또 하나의 다른 제국주의적 권력을 보는 시각이라는 것이다.

수용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프리드리히의 동상들로서, 이들도 주인공과 같은 운명을 겪어야 했다. 오늘날 베를린 운터 덴 린덴 거리에 세워져 있는 세모꼴 모자에 군복을 입고 말을 탄 프리드리히의 동상은 1851년 라우흐에 의해 제작되고 세워졌는데, 2차 대전이 끝날 때까지는 숭배의 대상이었다가, 전쟁이 끝나고는 히틀러와 동일시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구동독의 울브리히트는 이 동상을 조각내어 상수시 성으로 옮겼고, 당시 한 건설회사의 마이스터가 이 조각들을 창고에 숨겼다.

1961년 동독의 독일사회주의통일당 간부가 이 동상을 녹여 없애도록 지시했는데, 문화부장관 벤치엔이 속이고 동상을 새로운 장소에 숨겼다. 1963년 이 동상은 제 모습을 되찾아 상수시 공원에 세워졌다가 1980년 11월30일 원래대로 베를린 운터 덴 린덴 거리에서 위용을 갖추게 된다. 당시 분단 상태에서 동독은 서독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자신들이 독일 역사의 진정한 후손이라는 의식을 심어주기 위해 프리드리히 대왕을 이용했던 것이다. 즉 울브리히트 치하에서는 독일 제국주의의 원조로 폄하된 프리드리히가 호네커 서기장에 의해 관용의 정신을 갖춘 계몽주의적 군주로서의 긍정적인 면모를 인정받기에 이른 것이다. 구동독의 오더부르흐에서도 2차 대전후 프리드리히의 동상은 수난을 당했는데, 파괴가 확정된 동상을 주민들이 숨겨 구해 지금은 제 자리에 복원돼 있다.

원래 습지대였다가 18세기에 프리드리히에 의해 건조한 거주지로 구축된 오더부르흐 주민들은 1997년 대홍수를 무사히 넘기자 프리드리히가 동상을 구해준 것에 대한 감사로 자신들을 구해주었다고 믿는다고 한다. 프리드리히 대왕에 대한 관심은 기념품 숍에서도 확인된다. 상수시 성의 박물관 숍에서는 프리드리히의 권위를 상징하는 호엔졸러른 가의 왕관 복제품을 위시해, 그의 에세이집과 그가 작곡한 교향곡 음반, 고가의 초상화에 그의 지팡이 복제품까지 팔고 있다.

시내 기념품 숍에서는 몇 백 만 원짜리 실물 크기의 조각까지도 팔린다고 한다. 프리드리히 2세는 드라마와 영화의 주제로서도 수 없이 다뤄졌다. 나치 시대에는 찬양 일색이었다면, 그를 비판적 시각으로 다루는 시도도 끊이지 않았다. 20세기 독일 최고의 극작가로서 『군들링의 삶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레싱의 잠 꿈 비명』(1976) 등 프리드리히 대왕을 다루는 작품들을 무대에 올렸던 하이너 뮐러는 그의 매력을 바로 그의 모순에서 찾았다. “그는 희한하게도 드라마적으로 무언가를 줄 수 있는 유일한 독일 군주 혹은 유일한 지배자인물입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첨예한 괴리를 보이기 때문이지요.

우선 그는 독일 왕으로서 아마도 유일한 지식인일 겁니다. 그리고 물론 냉소주의자이지요. 자기의 백성을 경멸한 왕이지요, 언어와 문학에 이르기까지. 그는 독일어를 잘하지 못했고 원래 독일문학을 경멸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그가 우상, 프러시아 애국심의 상징물이 됐습니다. 그리고 이런 것이 너무나 많은 모순을 체화하고 있고, 그래서 그는 흥미롭습니다. 게다가 그는 살해당한 모차르트이기도 합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독일 내에서 프리드리히 2세가 점점 더 미화돼 가는 경향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물론 폴란드인들에게 그는 여전히 악몽으로 남아 있다. 크르체민스키는 오늘날의 유럽에 대해 프리드리히가 줄 교훈은 없으며, 있다면 소련의 푸틴에게나 있을 것이라고 조롱조로 말한다.

내게는 이에 대한 영국 크리스토프 클라크의 반응이 더 여운을 남긴다. 그는 프리드리히가 남긴 『내 시대의 역사』(1775)가 가장 멋진 프러시아의 역사서라고 감탄하는 사학자이기도 하다. “어떤 역사의 한 시기도 현재에 직접적인 사용가치는 없습니다. 프러시아 왕의 인기는 어차피 그의 정치나 정복에 있지 않고, 그의 인물의 영특함과 다재다능함, 그리고 그가 남긴 건축학적, 문학적 유산의 아름다움에 있으며, 그는 이러한 것을 통해서 유럽의 대부분의 지도자들과는 다르게 오늘날도 우리에게 말을 걸어옵니다.” 이번 300주년 기념을 둘러싸고 독일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토론을 보며 ‘기억문화’에 대해 좀 더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특정한 역사를 일방적으로 자기들의 정치적 적수들을 대신해 매를 맞을 속죄양으로 이용하는 대신, 역사를 문화적으로 기억하고, 현재와 미래에 유용한 교훈을 이끌어내는데 사용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성찰과 의식이 우리나라에야말로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며 전시장을 떠났다. 그 많은 역사적 기록물들을 보존한 독일의 ‘기록문화’를 부러워하면서……. 전시장 밖에는 얼굴만 동그랗게 잘라 뻥 뚫어놓은 실물크기 프리드리히 모습의 판넬이 세워져 있고 방문객들이 그 뒤로 가 얼굴을 내밀고 사진을 찍고 있었다. 누구나 프리드리히가 될 수 있다는 뜻일까. 아니면 자기만의 프리드리히를 발견하라는 뜻일까. <끝>

최민숙 이화여대·독문학
필자는 독일 파더보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괴테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세계독어독문학회 이사로 있다. 『괴테 자서전: 시와 진실』(역서), 「독일 낭만주의 시대의 문학살롱 연구」 등의 저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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