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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성 폭력이 지배하는 사회,‘자기계발’수준을 넘어서러면
신경성 폭력이 지배하는 사회,‘자기계발’수준을 넘어서러면
  • 교수신문
  • 승인 2012.10.04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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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담론의 빛과 그늘

치유담론이 유행하고 있다. 베스트셀러 자리도 ‘위로’ 권하는 책들이 점령했다. 방송도 앞다퉈 ‘힐링’을 주제로 한 프로그램들을 편성하고 있다. 오는 11월 부산에서 개최될 제2차 세계인문학포럼의 주제도 ‘치유의 인문학’이다. 인문학을 치유의 관점에서 소급해내는 것도 나름 의미는 있다. 그러나 전국이 ‘힐링’ 바람에 휩싸이는 건 적절치 않다. 부산에서 나오는 <오늘의문예비평> 86호가 이렇게 유행하고 있는 치유담론의 허와 실을 짚어낸 바 있다. 고통의 실체를 밝히는 작업에 무게를 실은 박시성 고신대 의대 교수와, 오길영 충남대 교수(영문학)가 곱씹어볼만한 문제의식을 던졌다.

1. 치유(healing)담론이 유행이다. 내면의 고통을 위로하기 위한 다양한 처방이 제시된다. 결론을 당겨 말하면 치유담론의 한계도 분명하다. 구체적 해결책이 없는 위로는 공허하다. 한국자본주의의 구체적 실상과 고통의 실체를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 유행 중인 치유담론이 놓치고 있는 지점이 여기이다. 라디오 방송에서 들었던 말. “저 같은 자영업자는 쉴 시간도 없어요.” 나는 이 발언을 치유담론의 한계를 지적하는 비판으로 읽는다. 그러니 이런 발언은 생뚱스럽다.

 “처음에는 초봉도 다소 낮고 안정성이 떨어질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 차이는 없어진다. 적성에 맞고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이 종국에는 오히려 고소득과 안정성을 더 확실하게 보장할 수 있다. 그러므로 결코 당장의 안정성이나 높은 초봉에 현혹되어 직업을 선택하지 말라.”(김난도, 『아프니까 청춘이다』, 59쪽) 모르고서 이런 말을 했다면 나이브하고, 알고서 했다면 무지한 발언이다. 저자의 주장이 타당하다면 소수 취업준비생들만이 들어가는 기업들에 목을 매는 청년들의 의식이 문제겠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사회구조적 문제를 도외시한 채 해결책을 마음가짐의 문제로 돌리는 것은 치유담론의 공통점이다. 학벌주의 등의 사회구조적 문제는 개인의 노력으로 해결될 개인사가 아니다.

직설적으로 말해, 지당하나 공허한 말씀으로 채워진 『아프니까 청춘이다』가 베스트셀러가 된 이유 중 하나가 저자가 ‘학벌대학’ 교수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있을까. 주체는 항상 특정한 사회구조적 맥락에 놓여 있다. 이런 상식을 치유담론이 망각할 때 자기수양론이 된다. 예컨대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경구는 돈이 전부인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사회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경쟁사회에서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려는 자기수양이 필요하다는 걸 부정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수양이 사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방도는 못된다. 2. 치유담론의 문제는 한국자본주의의 사회경제적 관계를 도외시한 채 사회를 개인들의 집합으로 바라본다는 것이다. 치유를 논하기 위해서는 왜 사람들이 고통 받는지를 개별 시민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그들이 맺고 있는 사회관계의 분석을 통해서 해명해야 한다.

베스트셀러 저자 혜민 스님은 트위터에 “맞벌이하는 경우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지 않아 미안할 때는 엄마가 새벽 6시부터 45분 정도 같이 놀아주라”는 글을 올렸다가 반발을 샀다고 한다. 이 에피소드는 사회·경제적 조건의 문제를 말랑말랑한 말씀만으로는 풀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엄마들이 그럴 마음이 없거나 게을러서 아이를 보살피지 못하는 게 아니다. 생활의 물적 조건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선진자본주의국가들이 보육과 교육에 막대한 예산을 지출하는 이유는 그들이 ‘착한 국가’라서가 아니다. 자본주의국가가 내리는 정책의 결정기준은 총자본의 이익에 유리한가 여부이다. 무상급식, 무상교육, 무상의료 등으로 다음 세대의 노동력을 건강하게 재생산하는 구조를 확보하는 것은 자본주의 국가의 존속에 사활적 요소이기에 이들 국가는 복지정책을 실시한다.

치유담론을 분석할 때 주의할 것은 개념의 함의를 정확히 가늠하는 것이다. 마음, 영혼, 자기성찰, 자유로움 등 개념이 그렇다. 이들 개념과 담론을 둘러싼 맥락을 이해하는 것이 관건이다. 그렇지 않을 때 맹목과 착시현상이 발생한다. 용산참사의 피해자들에게, 혹은 쌍용자동차나 한진중공업의 해직노동자들에게 말랑말랑한 위로의 말들은 어떤 효과를 지닐까. 과연 그들에게 부족한 것이 자기성찰과 마음의 수양일까. 3. 한국사회의 착잡한 현실을 타개하는 대안으로서 ‘피로사회론’을 제기한 한병철의 작업은 치유담론의 구조적 문제를 환기시킨다. 그가 보기에 현재의 자본주의 사회는 신경성 폭력이 지배한다. 후기근대의 현재는 내부와 외부의 분리가 힘든 사회, 부정성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긍정성이 압도한다. 『피로사회』가 주목을 끈 이유는 명백하다. 엠비정권 이후 전면화 된 시장주의, 경쟁주의로 시민들은 극심한 피로감을 느낀다. 요는 피로감의 정체가 『피로사회』에서 내리는 진단과 일치하는가 여부이다.

저자는 피로사회의 주체는 성과주체가 됐다고 판단한다. 후기근대 주체에게는 복종, 법 의무 이행이 아니라 자유, 쾌락, 선호가 원칙이다. 그렇다면 “저 같은 자영업자는 쉴 시간도 없어요”라는 발언은 성과주체의 발언일까. 한국 시민은 후기근대주체인가. 이 자영업자의 발언은 ‘자유로운 강제’가 아니라 신자유주의 시장주의의 외적 강제가 쥐어짠 발언이다. 사태의 진실에 가까운 것은 자아를 부정당할지언정 밥을 먹고살 수 있는 기회, 역설적으로 자본에게 착취당할 권리를 요구하는 상황이라는 진단이다. 한국은 아직 독일이, 유럽이 아니다. 4. 피곤한 한국사회에서 치유담론이 나름의 호소력을 지니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치유담론이 자기계발담론의 수준을 넘어서려면 ‘구체적 상황의 구체적 분석’으로 나아가야 한다. 종교인과 교수가 주로 치유담론을 설파하는 것은 사회문화적 징후이다. 이들의 상징권력 때문에 치유담론은 대중적 호소력을 얻었으나 그 한계에도 유념해야 한다. 한국사회도 생활의 논리에 더욱 가닿은, 업그레이드된 치유담론을 필요로 한다.


오길영 충남대·영어영문학과
필자는 뉴욕주립대에서 박사를 했다. 저서로는 『이론과 이론기계』, 논문으로는 「민족문학과 세계문학의 역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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