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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종위기의 행복
멸종위기의 행복
  • 이옥순 연세대 국학연구원 인도사
  • 승인 2012.06.26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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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우리 동네를 지나는 북한산 둘레길에는 “우측통행은 탐방객의 행복입니다”라는 입간판이 있습니다. 요즘 시내버스에는 다음과 같은 안내방송도 나옵니다. “3초의 여유는 행복입니다.” 이런 입간판과 안내방송을 보고들을 때마다 행복이란 단어가 남용되고 오용된다는 느낌을 받지만, 그만큼 행복이 가까이에 있다는 걸 실감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행복하지 않아 보입니다. 자살하는 사람도 많고 이혼 증가율도 높습니다. 행복하면 죽거나 헤어지지 않을 테니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많다는 뜻입니다.

삶의 만족도, 미래에 대한 기대, 실업률 등 인간의 행복을 포괄적으로 고려해 산출된 행복지수로 판단해도 우리나라는 국가의 경제규모만큼 국민이 행복하지 않습니다. 행복추구권은 우리의 헌법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행복이란 추구해서 달성할 수 있는 그 무엇입니다. 그러나 추구해서 그 무엇을 얻어도 또 다른 행복을 추구하기에 행복은 일시적입니다. 최신형 자동차나 아파트를 샀을 때 느끼는 행복은 다시 더 좋고 큰 것을 향한 목표와 함께 행복하지 않은 감정으로 바뀝니다. 소비가 경제성장의 잣대가 되면서 행복이 줄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돈이 조금 더 있으면, 집이 조금 더 크면 행복할 거라고 여기니까요. 예전엔 단칸방에서도 행복했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남들처럼 잘 살거나 많은 걸 갖지 못했다는 감정, 절대적 결핍이 아니라 상대적 결핍감이 불행하다는 생각을 잉태하지요.

이는 미국식의 행복추구와 관련됩니다. 각 문화권은 나름의 행복에 대한 기준이 있었습니다. 주어진 상황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나라도 있었고요. 오늘날은 전 세계가 같은 방식의 행복을 추구합니다. 미국의 독립선언서에 언급된 행복추구권의 영향이지요. 역설적이지만, 행복해야 한다는 강박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찾아 헤매면서 행복이 멸종위기에 처했습니다. 행복한 나라로 알려진 부탄의 경우를 볼까요. 1972년 당시 왕은 국민총생산(GDP)이 개인의 행복을 담보하지 않는다고 불교적 가치에 근거한 발전을 주장했습니다. 국민총행복(GHP)이라는 말을 내건 그는 경제기획원 대신에 행복기획원을 세웠지요. 그러나 은둔상태를 벗어나 바깥바람과 소비문화를 쐬기 시작한 부탄도 최근 행복감이 줄었습니다. 2010년의 한 조사에 따르면, 41%의 국민만 행복하다고 대답했답니다. 요즘 복지에 대한 말이 많습니다.

과연 보편적인 행복이 있는 걸까요? 정부가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요? 아마도 행복은 공통으로 소유할 수 없을 겁니다. 복지는 계량화할 수 있으나 행복은 그럴 수 없으니까요. 행복추구권은 행복권이 아닙니다. 행복을 추구해도 행복을 찾았느냐, 아니냐는 개인의 몫이거든요. 정부가 좋은 복지제도를 만들어도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행복감이 달라집니다.

모두 다 돈을 많이 벌고 모두 다 성공해도 모두 다 행복하진 않을 겁니다. 돈이 없으면 행복하지 않으나 많은 돈이 행복을 보장하지도 않지요. 오늘날 건강, 교육, 주택 등 모든 견지에서 우리는 100년 전의 그 누구도 가지지 못한 걸 누리고 살지만 그때보다 오늘날의 사람들이 더 행복해졌다고 말하긴 어렵습니다. 그래도 모두들 더 벌고 더 가지려고 기를 씁니다. 제가 20대일 때 록그룹 산울림의 공연을 보러갔다가 들은 말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사회자가 산울림형제들에게 언제 가장 행복하냐고 묻자 특유의 순진한 얼굴로 둘째가 대답했습니다. “배고파서 밥을 먹을 때”라고요. 청중들이 웃음을 터뜨렸지만, 저는 무심코 나왔을 대답에서 행복의 본질을 배웠습니다. 행복은 자기만족이라고요. 행복은 기쁨과 만족에서 나옵니다. 밖에서 얻는 것이 아니지요. 마음먹기에 달렸습니다. 근면을 강조한 역사가 디핑은 게으른 사람이 행복하지 않다고 말했으나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는 바쁜 사람이 행복할 수 없다고 여겼습니다.

 무엇을 하든 어디에 있든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은 자신에게 만족하는 것입니다. 인도의 한 요기는 인생의 목표가 “꽃의 향기가 퍼지듯 행복을 넓히는 것”이라고 설파했습니다. 허나 행복해야 한다는 압박 속에 살 이유는 없습니다. 영어단어 happiness는 일어나다는 뜻의 ‘happen’에서 나왔답니다. 행복이 늘 일어날 순 없지요. 행복하지 않은 상태가 동기를 부여하고 성취할 목표를 갖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문화는 행복의 기준에 영향을 줍니다. 물질적 욕망과 소비주의가 뒤얽힌 작금의 현실에서 행복해지긴 어렵습니다. 정부가 국민의 행복을 책임지길 기대할 수도 없고요. 그래도 개인의 행복을 늘릴 순 있습니다. 매달 한 번씩 뮤지컬을 관람하기, 매주 한 번 단짝친구와 등산하기 등 자기만의 행복지수를 만들어 실천하는 겁니다. 우측통행과 3초의 여유도 좋겠지요. 모리스 마테를링크의 ‘파랑새’가 알려준 것처럼, 행복은 사소한 일상 속에 있으니까요.

 

 

이옥순 연세대 국학연구원 인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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