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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어주는 남자
책 읽어주는 남자
  • 이창남 서평위원
  • 승인 2012.06.04 17: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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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대 전쟁시절 취학 연령이었던 세대에는 文盲이 많다. 막내아들의 권유로 학교에 다니는 한 70대 할머니는 텔레비전에서 문맹이야기를 보다가 하염없이 울었다고 한다. 어머니가 우는 이유를 계속 캐물은 막내아들은 어머니가 글을 배우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학교에 보내드린다. 자식들에게까지 알리지 않은 ‘문맹이라는 사실’은 우리 부모 세대들에게는 평생 감추고 싶은 부끄러움일지도 모른다.

이 할머니가 다니는 학교에는 비슷한 사정의 어르신들이 많이 나오신다고 한다. 사교육이 넘쳐나는 요즘, 문맹도 드물지만 글을 아는 것도 자랑이 아니다. 지금은 지식이 포화돼 심지어 아는 것이 너무 많아서 제대로 모르는 신종의 문맹이 등장하는 시대인 듯하다. 이러한 문맹의 문제는 지식을 실천적 행위와 연관시켜 생각하는 순간 단순한 문자해독의 문제를 넘어선다.

전통철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성적일수록 도덕적이라고 생각했다면, 칸트는 지성과 덕성을 분리해서 생각했다. 많이 안다고 도덕적인 것은 아니며, 도덕적이라고 해서 많이 아는 것도 아닌 것이다.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책 읽어주는 남자(Der Vorleser)』는 이러한 문맹과 윤리의 문제를 다시 한번 숙고하게 하는 책이다. 문맹인 연상의 여성 한나와 사랑에 빠진 청년 미카엘이 책을 읽어주는 장면이 이 책에서는 반복된다. 한나는 나치부역 혐의로 고소당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그녀는 유대인들을 호송하는 일을 맡고 있었는데, 그들을 감금했던 감옥에서 불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방치했다는 죄목으로 기소당하는 것이다. 한나의 ‘죄’와 그녀가 ‘문맹이라는 사실’ 사이에는 별로 뚜렷한 관계가 설정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미카엘은 그녀에게 독일 시민사회의 고전들을 늘 읽어주곤 한다. 한나의 운명에 공동책임을 느끼는 이 남자는 ‘문맹’과 ‘문명’의 매개자이다. 독서의 포인트는, 작가의 의도가 죄와 문맹을 연결시키고자 하는 것일까 아니면 반대로 그 양자를 매개 불가능한 것으로 남겨두려는 것일까 하는 것이다. 히틀러가 독서광이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무지가 죄를 짓게도 하지만, 잘못된 지식은 오히려 더 큰 범죄를 부르기도 한다.

아놀드 츠바이크는 1, 2차 세계대전 당시 ‘교양의 부엌에서 잘 익혀져서 전쟁터로 내보내진 수많은 독일 병사들’의 예를 통해서 교양의 무력함을 냉혹하게 직시하고 있다. 2차 대전의 책임문제를 대중서사의 틀 속에서 다루는 『책 읽어주는 남자』는 반대로 문맹의 여인을 통해서 역사적 책임의 문제를 거론하고 있다. 일반인들에게 이 책은 헐리우드 영화 「더 리더(The Reader)」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영화를 본 사람들은 그 배후에 깃든, 자못 심각한 문맹과 죄의 문제보다는 오히려 연상 여자와 연하 남자 사이의 로맨스 영화로 이 작품을 기억할 것이다. 현대판 문맹의 역설은 그러니까 바로 이 영화 자체의 수용 메커니즘 속에 내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보여지는 것을 통해서 생각하는 것은 삭제된다. 자극적인 화면 뒤로 원작의 지성적 숙고는 해체되는 것이다. 문맹과 죄라는 원작의 주제가 로맨스 영화로 리메이크된 헐리우드 영화의 수용메커니즘 속에서 반복돼, 관객들은 수많은 문맹의 한나가 되는 듯하다. 모든 재현적 영상매체들이 한결 같지는 않지만, 우리 생활환경의 표층을 이루고 있는 영상들은 어느 순간부터 현대판 문맹들을 양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지식을 매개하는 방식이 과거와는 다르다고 한 수 접고 들어간다고 할지라도, 영화 「더 리더」의 경우 이 영화에 동원된 지식의 매개방식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 이 영화의 화면에 그토록 선명하게 가득 그려진 것, 그것이 어째서 20세기의 역사적인 죄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여인의 하얀 등판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상이 갖는 상징성은 문자의 그것 이상의 폭발적 함의를 담기도 하는 듯하다.

영화 속의 한나는 책을 밟고 올라서서 자살한다. 그녀의 상처 입은 맨발은 단정한 책들과 대비되며 묘한 페이소스를 자아낸다. 책들은 그녀의 무죄를 증언해주지 못하고, 그녀도 책을 읽을 수 없다. 『책 읽어 주는 남자』는 그 ‘사이’를 매개하는 사람이지만 그녀의 운명을 그저 지켜보는 관찰자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 자신의 무죄에 공감할 감옥안의 죽은 자들을 향해 가기로 한 그녀의 비극적 결단은 소송 서류들 속에 빼곡한 현세적 지식에 대한 아이러니로 남는다. 이러한 아이러니는 미디어에 의해 편집되고 삭제된 지식 아닌 지식 속에 묻혀 사는 우리 현대판 문맹들에게는 일상인 듯하다. 비디오 세대들인 학생들에게 책을 읽어주며 우리들의 지식과 책임에 대해 생각하면, 칸트와 아리스토텔레스 사이 답 없이 고민만 깊어진다.


이창남 서평위원/ 한양대 HK교수·비교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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