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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들이 동쪽으로 간 까닭은?
책들이 동쪽으로 간 까닭은?
  • 안재원 서울대 HK연구교수
  • 승인 2012.06.04 13: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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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의 인문교육과 고전읽기 ⑥ 고전을 둘러싼 논쟁 ‘책의 운명’(서양편)

“책에도 운명이 있다.”

말의 주인은 로마의 문법학자 테렌티아누스(Maurus Terentianus 서기 2세기)다. 뭔가 있어 보인다. 그래서였을까. 말은 주인보다 더 유명세를 타게 된다. 하지만 입에서 입으로 회자되면서 말은 스스로 자기의 모습을 바꿔야 했다. 어쩌면 어쩔 수 없는 운명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말의 최초의 모습은 이랬다.

“독자의 이해 능력에 따라 책 자신의 운명도 결정된다.(Pro captu lectoris habent sua fata libelli)” 『철자 음절 운율에 대하여』 제1286행

하지만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은 머리에 해당하는 “독자의 이해 능력에 따라(pro captu lectoris)”가 떨어진 채 “책 자신의 운명이 결정된다(habent sua fata libelli)”는 몸만 데리고 돌아다니기 시작한다. 가벼워서였을까. 어쨌든 지금은 머리없는 몸만 있는 모습으로 말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고 있다. 말이 이렇게 유명해진 데에는 나름 자기 희생도 한 몫을 거들었으리라.

이런 희생을 통해서 말은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다. “책들도 자신만의 운명을 가지고 있다”의 의미로 말이다. 얼핏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큰 차이가 있다. “독자의 이해 능력에 따라 책 자신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책의 내용에 대한 독자의 이해와 사랑이 관건이지만 “책들도 자신만의 운명을 가지고 있다”는 책 자체의 생존이 즉 전승이 관건이기 때문이다.

사실 독자의 사랑도 책의 운명과 전승에 결정적이다. 이해하지도 못할 책을 사랑할 이도 없거니와 그런 책을 후세에 전하려는 이도 없을 것이기에. 이 글에서는 하지만 독자의 사랑보다는 책 자체의 운명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겠다. 일단 지면 문제가 제일 크다. 또한 독자의 사랑을 결정하는 내용 이해의 문제는 독자 자신의 문제이지 책 자체의 운명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기 때문이다.

시리아에서 목숨 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책들

어느 책이든 다 나름의 사연을 가지고 있겠지만 적어도 서양 역사에서 그 기구함으로 본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책만큼 파란만장한 운명을 겪은 것도 없을 것이다. 스트라보(Strabo 기원전 60-서기 24년)의 보고다.

“아탈루스 왕이 페르가몬에 도서관을 세우기 위해 책을 구하고 모은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그러자 그들은 땅을 파서 참호를 만들고 여기에 책들을 숨겼다. 한참 후 책들이 습기와 벌레들에 의해서 손상을 당하자 그 후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와 테오프라스투스의 책들을 테오스 출신 아펠리콘(Apellicon 기원전 100년)에게 큰 돈을 받고 팔았다. 아펠리콘은 철학자라기보다는 애서가였다. 그는 벌레가 먹은 부분들을 복구하는 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복사본을 만들었다. 그러나 정확하지 않게 보충된 것이 아니었다. 오류와 오식들로 가득 찬 것이었다. (…) 여기에는 로마도 한 몫 거들었다. 왜냐하면 당시 아테네를 장악하고 있었던 술라(Sulla 기원전 138~78년)는 아펠리콘이 죽자 곧바로 도서관을 전리품으로 가져왔고 이곳(아마도 로마)으로 옮겨진 도서관을 아리스토텔레스 추종자였던 튀라니온이 관리했기 때문이다. 이 도서관에서도 필사자들이 도서들을 교정하고 고쳤다. 몇몇 상인도 필경사를 고용했는데 그들은 수준이 낮은 이들이었다. 필사본들의 비교를 전혀 하지 않았다. 이는 책을 팔기 위해 문헌을 필사할 때 일어난다. 이곳뿐만이 아니라 알렉산드리아에서도 있는 일이다.” 『지리학서』 13권 1장 54절

아리스토텔레스의 책들이 겪은 운명에 대해 알려진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이후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없다. 일부 남은 책도 있었겠지만 대부분은 적어도 지중해 서쪽 유럽에서는 종적을 감추고 만다. 도대체 책들은 어디로 갔을까. 갑자기 아리스토텔레스의 책들이 서부 유럽에 모습을 다시 드러낸 것은 중세 시대부터다. 흥미롭게도 이것들은 그리스 원전이 아니고 아랍의 대학자였던 알 킨디(Al-Kindi, 801년~873년), 알 파라비(Al-Farabi, 872년~950년), 아비체나(Avicenna 980년~1037년)와 같은 학자들이 작업한 아랍어 번역들이었다. 철학사의 관점에서 보면 유럽의 중세는 ‘아리스토텔레스 전성시대’라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닌데 실은 이 번역 덕분이었다. 그리스 원전이 서부 유럽으로 들어온 시기는 15세기 초엽이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그리스 원전을 전승하고 있는 파리 사본 1741(cod. Paris. 1741)이 이탈리아로 건너온 해가 1427년이었다. 도대체 어찌된 일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책들은 동쪽으로 갔다. 무슨 사연이 있길래 그토록 재미없는 논리학 저술이 혹은 지금도 읽기 어려운, 예컨대 아리스토텔레스의 『분석론』이 동쪽으로 갔을까. 사연인 즉 이렇다. 지중해의 서쪽 지역인 유럽에 특히 로마에 중세의 어두움이 혹은 가톨릭 교회의 빛이 본격적으로 퍼지기 시작하는 시기에 지중해의 동쪽 지역에는 신앙과 이념의 전쟁이 치열했다. 예컨대 아리우스파를 이단을 몰았던 니케아 공의회가 전투가 벌어졌던 대표적인 자리였다. 그런데 이 전투의 주요 병장기는 칼이나 방패가 아닌 말이었다. 따라서 이 전투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과 변증술이 큰 사랑을 받고 대접을 받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논리가 곧 칼이고 방패였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종류의 말싸움에서 예나 지금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과 변증술 만큼 위력적이고 유용한 기술도 없다. 아마도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이 동쪽으로 가게 된 첫번째 이유였을 것이다.

한데 ‘兎死狗烹’이 여기에 해당될 지도 모르겠다. 소위 이단 전쟁이 대략 종료되자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저술들도 비슷한 운명을 맞게 됐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말의 전쟁터에 더 불려나갈 일이 줄었기에 말이다. 그런데 뜻밖에 반전이 일어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오르가논』의 용도가 전쟁의 무기에서 이제는 새로운 세계를 여는 도구로 활용됐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책들은 계속 사랑받는다. 물론 이 과정에서 중용된 책은 『분석론』이 아니라 『범주론』이었지만 말이다. 추상 세계를 실제 세계로 세우고 입증하는 작업도 결국은 말(logos)로 밖에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述語 이론이 중용될 수밖에 없고 이것이 『범주론』이 사랑받았던 이유였을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책들이 더 동쪽으로 가게 된 또 다른 이유였을 것이다.

그러면 이쯤에서 그 동쪽이 어디인지를 밝히겠다. 로마에서 그리 먼 곳은 아니었다. 시리아였다. 당시 시리아는 동로마제국에 속했다. 이 지역의 공용어는 코이네 그리스어였다.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책들이 살아남게 된 일차 이유였을 것이다. 또한 이단에 대한 전투가 가장 치열하게 벌어진 곳이 실은 시리아 지역이었다는 점도 중요하다. 이런 저런 이유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책들은 시리아의 수도원들에서 그리스 원전으로 읽혔고 또한 학생들의 교육을 위한 교재로도 사용됐다. 이는 서기 6세기까지는 지속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적어도 이 시기까지는 지중해 서부 유럽에서 사라진 아리스토텔레스의 책들이 지중해 동부 지역에서는 나름 융숭한 대접을 받았음이 분명하다. 이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는 바로 서기 6세기 이후부터에 쏟아져 나온 『오르가논』에 대한 시리아어 된 해설서와 번역서들이다.(참조 Daniel King(2010) The Earlist Syriac Translation of Aristotle’s Categories: Text Translation and Commentary Brill)

경교의 東進과 함께 흘러든 것들

안타깝지만 추적은 여기에서 멈춰야겠다. 일단 추적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시리아 번역 탓일지도 모르겠다. 번역 때문에 원전을 더 이상 볼 필요가 없는 상황이 됐다는 소리다. 허나 잠깐 또 다른 반전이 기다리고 있다. 이 시기부터 번역된 시리아어 번역들은 서기 9세기부터 아비체나와 같은 학자들에 의해 다시 아랍어로 번역됐고 이 번역들은 한편으로는 아랍의 철학과 종교 다른 한편으로는 중세 유럽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부활을 예비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아랍어 번역이 그리스 원전에서 직접 옮겨온 것이 아니고 시리아어 번역을 거쳤다는 사실에 눈길이 가지만 이에 대해서는 여기서 멈추자. 물론 연구가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됐기에 속단은 이르지만 그 결론이 어떻게 맺어질지 자못 궁금하다.

한데 여기까지도 다는 아니다. 진짜 마지막 반전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기에. 마찬가지로 본격적인 추적이 요청되지만 예컨대 景敎로 알려진 네스토리우스 종파도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애용했던 무리였고 번역 과정에서 시리아 번역어나 아랍어 번역어가 어떤 종류의 모습을 띠고 漢字로 변신했을지는 모르겠지만 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들이 경교의 東進과 함께 동양 세계에도 흘러들어왔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전거는 징기스칸이 유라시아를 제패한 이후의 시기에 활약했던 바르 헤브라이우스(Bar Hebraeus 1226년~1286년)의 사람이 시리아로 남긴 저술들(여기에는 『오르가논』, 『니코마코스 윤리학』, 『정치학』 등이  소개돼 있다)이다. 이것들은 또한 시리아 정교(Syrian Orthodox)는 물론 경교에도 매우 중요한 문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책들이 동쪽으로 간 까닭은 아직까지 그 전모가 밝혀진 것은 아닌 셈이다. 사실 아직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안재원 서울대 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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