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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성의 벽 넘지 못한 ‘住居의 역사’가 남긴 가능성
전문성의 벽 넘지 못한 ‘住居의 역사’가 남긴 가능성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2.05.21 15: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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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 편집자가 뽑은 문제작 ③ 돌베개 편

1979년 8월 설립된 돌베개가 첫 번째 책으로 마틴 제이의『변증법적 상상력: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역사와 이론』(황재우 외 옮김)을 낸 것은 한 달 뒤인 9월이었다. 이후 돌베개는 특히 인문, 예술 분야 학술서와 교양서 출간에 앞장서왔다. 관록의 돌베개가 기대 밖으로 苦戰했던 책은 무엇이었을까. 이들은 ‘한국 근현대 주거의 역사’를 가장 아쉬워한다. 『한국 주거의 사회사』(2008), 『한국 주거의 미시사』(2009), 『한국 주거의 공간사』(2010)로 구성된 ‘한국 근현대 주거의 역사’가 갖는 의미는 첫 권 서론에 잘 그려져 있다. 저자의 한 사람인 전남일 가톨릭대 교수(소비자주거학과)는 이렇게 썼다. “한국 주거의 역사에서 그동안 소홀하게 다루어졌던 부분인 개항 이후부터 오늘날까지의 주거사를 제대로 기술함과 동시에, 이를 토대로 한국 주거의 근대화에 대한 담론을 다각적인 측면에서 이끌어내고자 한다.” 이렇게 시도된 ‘한국 주거의 근대화’ 추적 작업은 저자들이 말한대로 “우리의 주거사에 존재하는 공백을 메운다는 측면에서 학술적으로도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연구가 왜곡된 우리 주거문화의 방향을 수정하고, 우리 주거문화의 건전한 발전을 위한 학술적 토대를 마련하는 데 있다”는 측면에서 값진 성과를 거뒀다. ‘한국의 住居’ 곧 우리가 어떻게 거주하고 살아왔는가 하는 사회사적, 미시사적, 공간사적 탐색의 학술적 의미는 관련 전공자들에게는 쉽게 어필할 수 있었지만 폭넓은 독자층으로 확대되기에는 한계가 있는 주제였다.
전공 분야라는 전문성의 벽을 넘어서지 못했던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성과는 의외의 곳에서 이어졌다. 이경아 인문고전팀장은 “이 시리즈의 출간 이후 공교롭게도 출판계에서는 새로운 주거형태에 대한 도시인들의 고민에 대안을 제시하는 책들이 출간돼 독자들에게 호응을 받았다”라고 말한다.

그는 이러한 현상을 가리켜 “획일적이고 보편적인 주거형태를 벗어나 새로운 형태의공간을 바라는 독자들의 고민이 그만큼 크다는 방증”이라고 지적한다. 실제로 요 몇 년 사이 주거와 건축을 키워드로 한 다양한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대부분이 ‘교양’의 눈높이에서 읽어낼 수 있는 책들이다. 그래서인지 이경아 팀장은 “이러한 사회적 관심과 고민은 현상적인 대안을 마련하는 데서 나아가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주거 공간 자체에 대한 진지한 모색으로 이어진다면, ‘한국 근현대 주거의 역사’ 세 권이 진지한 모색의 디딤돌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라고 기대를 걸고 있다.


출판 편집자들이 책의 운명을 알 수 있을까. 책이라는 물질과 정신은 저자, 출판사, 독자와 삼각관계를 이루기 때문에, 그리고 이들을 둘러싼 ‘환경’이란 변수가 작동하는 탓에 아무리 날고 기는 편집자라해도 ‘운명’을 예측할 수는 없다. 일본인 언어학자 노마 히데키가 지은 『한글의 탄생』 역시 그런 시계제로 상태에서 돌베개에 의외의 수확을 가져다 준 ‘잘 나간’ 책이 됐다. 환경도 한 몫 거든 사례다. 이 책은 단지 ‘한글’만이 아니라 한글 이전의 문자 생활, 한글의 창제 과정, 마침내 한글이 한반도에서 ‘知’의 판도를 뒤흔들어 놓은 과정, 나아가 그 미적 형태의 발전에 이르기까지 한글이라는 존재를 입체적으로 조망하며 문자와 언어라는 존재에 관해 근본적으로 생각해 보게 하는 독특한 책이다.

특히 한글 창제 이전부터 이어져 왔던 문자 생활을 꼼꼼히 짚으며, 조선의 임금 세종과 학자들이 ‘쓰기’와 ‘언어’에 대한 얼마나 무서울 만큼의 이해력과 분석력, 창조력을 통해 새로운 문자를 만들어 내고야 말았는지를 밝히는 부분이 백미이다. 돌베개 측은 “한글 탄생 과정이나 한국어라는 언어와 의 관계에 대해 깊이 따져볼 일이 없었을 한글·한국어 사용자들이 한 번쯤 꼭 알고 넘어가야 할 부분들을 짚고 있었고, 또한 매력 있는 문체로 이뤄진 저작이었기에 번역 출판하기로 결정했던 책이다”라고 번역 배경을 말한다. 사실 일본 독서시장에서 어느 정도 읽힌 책이어서 ‘전혀 예상 밖 호응’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일본인 저자의 책이 단시간에 눈길을 끌었다는 게 ‘기대 밖’일 수 있을 것이다. 이경아 팀장이 “그러나 한편으로는 얼마나 많은 독자들에게 읽힐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도 솔직히 있었다”라고 털어놓는 것도 이런 맥락일 것이다. 쉬운 문체로 풀었다고는 하지만 상당히 전문적인 언어학 지식까지도 다루고 있는 책이 었고, 여기에 관심을 가진 독자층도 두텁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는데, 독자들의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이경아 팀장은 이렇게 분석한다. “일본인 저자가 쓴 한글에 관한 책이라는 점이 흥미롭게 여겨진 면도 있을 것이고, 직접적인 관계는 없었지만 책이 출간되던 즈음 한글의 탄생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을 다룬 사극이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었던 것도 이 책에 대한 관심에 영향을 끼쳤던 것 같다.” 이경아 팀장은 이런 환경적 요인에 ‘독자들의 의식’과 잘 맞아떨어진 부분을 보탰다. “독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무엇보다도 한글이라는 존재를 둘러싼 역사적 맥락과 사유에 대해 깊이 생각할 수 있게 만들고, 또 전문서의 딱딱한 학술용어나 문체를 탈피해 흥미롭게 읽히는 교양서로 다가온 부분이 공감을 이끌어냈다는 의견이 많았다.” 『한글의 탄생』은 독자들과 교감한 책의 ‘탄생’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로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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