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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 학자 49명이 참여한 『학문의 길』 주춤 … ‘악명 높은’ 칸트 철학서는 예상 밖 질주
스타 학자 49명이 참여한 『학문의 길』 주춤 … ‘악명 높은’ 칸트 철학서는 예상 밖 질주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2.05.15 18:1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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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 편집자가 뽑은 문제작 ② 아카넷 편

책의 탄생 과정은 엄숙하면서도 희극적이다. 엄숙하다는 것은 거기에 쏟는 저자나 번역자, 그리고 출판 편집자의 열정과 노고가 대단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하얗게 새운 밤의 날들을 합치면 그게 바로 책의 질량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 광경은 또한 희극적이기도 하다. 이렇게 공들여 만들었지만, 저자나 출판사쪽의 예상과 달리 世人의 관심권에서 멀어지다 어느덧 재고창고에 쌓여 있다가 쓸쓸하게 퇴장당하는 운명을 마주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주요 학술출판사 편집자들에게 물었다. 1990년대 이후 ‘가장 공들여 만들었지만 저평가 된 책은 무엇인가’라고. 그리고 ‘기대와 달리 가장 호응이 좋았던 책’이 있다면 무엇이냐고. 그 두 번째로 아카넷(대표 김정호)의 대답을 들어본다.

 

‘대우학술총서’로 유명한 학술전문 출판사 아카넷은 출판 규모는 작지만 내공이 깊은 곳이다. 아카넷이 꼽은 ‘저평가 된 책’은 다소 의외다. 김용준, 정운찬 등 이름만으로 ‘스타’ 반열에 포진한 필자들이 저자로 참여해 내놓은 『스무 살에 선택하는 학문의 길-대학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들』(2005, 이하 『학문의 길』)이다. 출판시장에 어느 정도 ‘약발’이 통할 수 있었을텐데 왜 기대와 달리 ‘저평가 된 책’이 됐을까. 『학문의 길』은 대학 입학을 앞둔 청소년과 대학생들을 겨냥한 기획물이다. ‘학문의 가치’와 ‘미래의 비전’을 새롭게 일깨우고자 기획된 이 책은, 49명의 필자가 참여해 7개의 주제-학문이란 무엇인가,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공학, 의학, 생활과학, 예술, 학문과 사회 ― 아래 기초학문에서 첨단 응용학문까지 다양한 학문 분야를 소개하고 이에 대한 전망을 보여주고 있다.

 

아카넷 김일수 팀장은 “이 책은 아카넷의 편집자들이 가장 많은 노력과 시간을 담아냈던 책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학술전문 출판사로서 공적 책임의식을 가지고 우리 사회의 학문 미래 세대에게 학문의 가치와 비전을 일깨우고자 의욕적으로 만든 책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자부심과 책무성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아카넷은 2004년 말에서 2005년 말까지 1년간 준비 과정을 통해 약 100여 명의 학자들과 접촉해, 최종적으로 49명의 필진을 선정해 책을 내놓았다. 각 분야의 ‘잘 나가는’ 필자들을 동원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스타 필자들의 총합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善戰하지 못했다. 김일수 팀장은 “왜 대학을 가는가, 왜 공부를 하는가에 대한 기본적인 문제의식과 성찰 없이 오로지 대학 진학에만 관심이 있는 현실에서 이 책의 가치와 영향력은 크게 작용하지 못했던 듯하다”라고 요인을 설명했다. 그렇지만 『학문의 길』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출간된지 6년이 훨씬 지난 지금, 대학의 기본적인 성격과 사유의 경건함, 학문의 예비세대들이 가져야 할 앎의 자세들을 아주 쉽게 안내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학과 학문의 세계로 들어가는 첫 길목이라 할 수 있는 『학문의 길』이 대중적인 성격인데도 고배를 마신 반면, 어렵기로 소문난 칸트의 철학서가 전문가들과 일반 독자들에게 기대와 달리 ‘잘’ 읽히고 있다면, 이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아카넷이 뽑은 ‘예상밖으로 가장 호응이 좋았던 책’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2006) 등으로, 2002년부터 10년 넘게 칸트 원전 연구 번역에 매달려온 백종현 서울대 교수(철학과)의 공이 결정적이다. 『실천이성비판』(2002, 개정판2009), 『윤리형이상학 정초』(2005), 『순수이성비판』 (2006), 『판단력비판』(2009),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2011), 『윤리형이상학』(2012)은 ‘학술전문’ 출판사 아카넷에서 펴낸 학술서 가운데 독자들의 호응이 가장 좋은 책들이다.

 

문화관광부나 학술원의 우수학술도서에 선정된 것도 의미 있지만, 사실 전문적인 철학 번역서가 학계와 대중들에게 어필한 사실 자체가 중요한 사례다. 김일수 팀장은 “칸트 철학의 난해함을 고려할 때, 특히 『순수이성비판 』의 판매는 매우 이례적인 일에 속한다”라며 예상 밖 善戰에 놀랐다고 말한다. 『순수이성비판』은 칸트 저작 중 가장 방대한 것으로서 칸트철학의 전모를 가늠할 수 있게 해주는 대신에, 난해하기로 ‘악명높은’ 책이다. 그런데 이렇게 ‘악명높은’ 책임에도 불구하고 아카넷 책 가운데 독자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고 있는 책으로 올라선 데는 번역자인 백종현 교수의 치밀하고 꼼꼼한 번역 및 주해 작업이 주효했다고 볼 수 있다. 국내 철학 용어 상당수가 일본어를 단순히 한자어의 한국식 발음으로 표기한 용어들과 뒤섞여 사용된 탓에 한국어의 어법이나 어의에 맞지 않을뿐더러, 이런 번역 표기 자체가 가독성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백 교수는 이 점을 고려해 과감하게 용어 선택을 달리 했다

 

. 예컨대 기존에 많이 사용했던 ‘오성’ 대신에 ‘지성’(Verstand), ‘구상력’ 대신에 ‘상상력’(Einbildungskraft), ‘선천적’ 대신에 ‘선험적’(a priori), ‘각지’ 대신에 ‘포착’(Apprehension) 등을 새롭게 사용함으로써 독자들의 공감을 얻어낼 수 있었다. 김일수 팀장은 “지금은 익숙해졌지만 백종현 교수의 원고는 어떤 학술서보다 편집 요소가 많아 조판자나 편집자도 처음 원고를 받는 순간 기가 질린다. 편집 작업에 들어가는 시간과 집중력 역시 만만치 않고, 책이 나온 뒤에도 혹시나 실수가 발견되지 않을까” 늘 가슴 조아렸다고 말한다. 아카넷 측은 올 여름 칸트의 『형이상학 서설(프롤레고메나)』 출간을 앞두고 있다. 이 책은 일찍이 백종현 교수가 “칸트의 저술 가운데 문장이 가장 생생하고 아름다운 책이다”라고 평가했던 책이다. 지난 달 출간한 『윤리형이상학』과 더불어 이들이 어떻게 독자들을 사로잡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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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귀 2012-09-25 20:28:16
역시 사람들 허세부리기 좋아하네 이해를 못해도 다른 학문에 비해 상대적으로 뽀록도 안나고 집에 한권 꽂아놓으면 폼나니까 일석이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