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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철 총장 중간평가하라” 메시지 … 불씨 꺼지지 않았다
“김병철 총장 중간평가하라” 메시지 … 불씨 꺼지지 않았다
  • 최성욱 기자
  • 승인 2012.05.07 10: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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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법인 이사장 사퇴, 논란 끝났나

집무실은 텅 비어 있었다. 어차피 서류며 사무실 집기들은 이미 다 빼놓은 상태였다. 지난달 30일, 집무실을 찾은 김정배 이사장(72세, 학교법인 고려중앙학원)은 자신이 쓰던 컵을 챙겨들고는 조용히 이사장실 문을 닫고 나왔다. 2009년 7월, 이사장에 취임했으니 딱 2년 10개월 만이다.

욕심이 지나쳤을까. 김 이사장은 취임과 동시에 주가연계증권(ELS) 등 파생상품 투자 비율을 유동성 현금자산의 8할까지 끌어 올렸다. 수백억원대 파생상품의 만기일을 자신의 임기가 끝나는 2014년에 맞춰놨다. 포석이 읽힌다. 지난해 10월, 파생상품은 취임 2년 만에 정확히 ‘반토막’ 났다. 결국 이사장직도 만기를 채우지 못하고 ‘반토막’ 났다.

김정배 이사장(왼쪽)이 금융상품 투자손실 책임을 지고 중도사퇴했지만 불씨는 여전히 살아있다. 김병철 총장(오른쪽)의 행보에도 관심이 쏠린다.

수백억원대 금융상품 투자, 입장차 ‘평행선’

김정배 고려대 이사장이 200억원대 투자손실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김 이사장은 지난달 24일, 법인 사무국에 사퇴 의사를 전달했다. 학교법인 고려중앙학원은 이사회 소집을 위한 일정조율에 들어갔다. 법인 측은 “이달 안에 이사회를 열고 ‘사표를 수리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사장이 사퇴했지만 금융상품 투자와 손실에 대한 책임공방은 가라앉지 않고 있다. 문제가 불거진 지난해 10월 이사회는 △유동성 현금자산의 81.7%를 원금 손실 위험이 큰 고위험자산(ELS, ELT)에 투자해 손실이 50.64%에 이르고, 만기에도 비슷한 實害의 가능성이 높다는 점 △이사회의 심의·의결이 없었던 점 △투자 위험성 왜곡 보고 등을 문제 삼으며 ‘법인 재산운용 대책 특별위원회’를 구성해 조사하기로 결정했다.

김 이사장은 그러나 “예·결산에 투자관련 내역을 모두 공개해왔다. 그간 이사회에서 보고하고 승인 받은 것으로 봐야 한다. 게다가 만기가 1~3년 남았다. 감사가 제기한 투자손실은 확정된 게 아니라 평가손실일 뿐”이라는 입장이다.

고려대에서 만난 한 교수는 “수백억원대의 투자를 전혀 몰랐다는 듯한 이사회의 태도가 아리송하고, 대규모 투자손실의 책임을 이사장 사퇴로만 매듭지으려는 것 또한 석연찮다”고 지적했다. 법인 관계자는 “김 이사장이 부임하기 이전부터 파생상품에 투자한 것은 맞다”면서도 “이전에는 투자규모가 적었다. 총투자금액이 수십억원에 불과했고, 손실액수도 지금만큼 크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ELS 등 파생상품은 증권거래법 시행령이 개정된 2003년부터 발행됐고, 고려대 법인은 2005년에 뛰어들었다. 금융상품투자 여부에 초점을 두기엔 김 이사장이 취임한 2009년과는 시간적 거리가 있다. 이번 파생상품 손실 공방을 두고, 김 이사장과 김병철 고려대 총장(63세)의 ‘갈등’이 핵심쟁점으로 다뤄지는 이유다. 고려대 교수의회의 한 교수는 “지난해 8월부터 주식시장이 급락하기 시작했다. 10월은 주가가 최악으로 떨어진 시기라서 투자손실액이 가장 컸을 것”이라는 분석을 내놨다.

사퇴한 이사장 반격 예고

지난해 10월은 이들에게 조금 더 특별했다. 고려대는 의무부총장 인선을 놓고 진통을 겪었다. 9월과 10월 두 차례나 의무부총장 인준이 부결됐다. 의무부총장은 총장이 선임하고 의과대학 교수들의 과반수 찬성투표로 인준절차를 거치게 돼 있는데 김 이사장이 인선에 관여하면서 갈등의 불씨가 점화됐다는 관측이다. 김 이사장이 추천한 후보가 과반수 지지를 얻지 못해 연이어 탈락하면서 의무부총장직에 3~4개월 공백이 생겼다. 한 의과대학 교수의 말을 빌리면 “고려대 역사상 초유의 일”이다.

지난해 8월 결성한 고려대 의과대학 교수조직체 ‘의대개혁포럼’의 공동대표 김영훈 교수는 “의무부총장에 지명(이사장 추천)된 사람조차 이사장과 자신의 관계를 공공연히 말하고 다닐 정도였다. 의과대학 교수들은 이사장이 지명한 후보를 부결시켜서 항의의 뜻을 전했다. 엄밀히 따지면 부총장 임명권자인 총장도 책임을 졌어야 할 문제”라고 비판했다.

‘이사장과 총장’의 대결구도는 김 이사장이 의무부총장 인선에 개입하는 과정에서 교수들의 신망을 잃은 데다, 법인의 재정운영에서도 중대한 과실이 드러난 시점이 맞아떨어졌다는 점에서 가능한 풀이다. 이럴 경우 차기 이사장과 이사회 구성이 김 총장을 위시한 ‘김씨 일가’(설립자 후손)의 세력 확대로 이어질까 교수들은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있다.

어떤 경우도 속단하기엔 이르다. 서둘러 책임사퇴론을 펼친 김 이사장이 교수 대표자들에게 건넨 문건이 ‘2라운드’를 예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부 교수들과 언론은 이 문건에 김 총장이 관리처장을 지내던 때부터의 납품, 입찰 등 비리 내용을 담고 있다고 추측하고 있지만 정작 교수의회 측은 “아무 것도 공개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들과 만난 자리에서 김 이사장은 “차기 이사장은 전입금을 확충하는 데 온 힘을 쏟아야 할 것”이라며 “총장 중간평가를 통해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으라”고 당부했다.

고려대에서 만난 교수들은 하나같이 법인의 폐쇄성을 첫 손에 꼽았다. 이사진에도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한 교수는 “수백억원 규모의 투자를 이사회에서 전혀 몰랐다는 게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이 자체로 이사회의 폐쇄성과 책임회피가 어디까지 왔는지 보여준다. 이번 기회에 전폭적인 개방이사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수선한 한 주를 보내는 가운데 고려대는 지난 주말(5일), ‘개교 107주년’을 맞았다.

최성욱 기자 cheetah@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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