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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인문학 위치 새롭게 구축 할 때 … 대학, 더 이상 ‘전문가 바보’ 만들어내지 말아야”
“지금은 인문학 위치 새롭게 구축 할 때 … 대학, 더 이상 ‘전문가 바보’ 만들어내지 말아야”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2.04.17 15: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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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20주년 기념 특별대담_ 이태수 한국학술협의회 이사장

그 스스로 연구와 강의보다 대학이라는 제도를 만드는 데 학자로서의 시간을 다 써버렸다고 말하는 이태수 한국학술협의회 이사장(67세·서양고대철학). 서울 중구 남대문로 5가 대우재단 빌딩 18층, 볕이 잘 드는 남향의 한국학술협의회(이하 학술협) 사무실 한쪽에 그의 집무실이 마련돼 있다. 창밖으로 완연한 봄기운을 되찾은 남산이 우람하게 바라보인다. 그가 내민 명함에는 ‘인간환경미래연구원 원장, 교수’라는 직함이 써 있다.

이태수 한국학술협의회 이사장은 1944년 생으로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괴팅겐대에서 박사를 했다. 서울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교육부 대학정책실장, 서양고전학회 회장, 서울대 대학원장, 한국철학회 회장, 조선왕조실록 환수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이후 인제대 교수로 자리를 옮겨 인간환경미래연구원 원장을 맡고 있다. 지난해 1월부터 경제사상연구회·과학사상연구회·한국서양고전학회 등 순수 학술단체들이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한국학술협의회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세이렌과 무사」,「알렉산드로스의 영혼 이론-형상들의 형상」,「인간: 미완의 기획」,「인문학의 두 계기: 설득과 진리탐구」등의 논문이 있다.

그가 전임 김용준 이사장의 뒤를 이어 학술협 수장에 취임한 것은 지난해 1월이다. 정년을 마친 뒤로는 주로 전공 분야와 관련해 읽고 싶었던 고전을 읽는 데 시간을 쏟고 있기 때문일까. ‘깡술’을 자주 마셨지만 요즘은 조금 부드럽게 마신다고 말하는 이태수 이사장은 인제대에서 ‘풀타임’ 교수로 있다는 사실을 거듭 강조했다. 그는 연구를 하고 싶어도 ‘박사 연구자’들이 지방을 찾지 않아서 어렵다고 말했다. 가까운 인근 부산이나 조금 먼 대구·경북의 연구자들조차 한적한 ‘김해’의 인제대를 좀처럼 찾지 않는데, 수도권 대학의 연구자들은 말 할 나위가 있겠냐고 안타까워했다. 지역 소재 중소 규모 대학의 연구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인터뷰는 그의 집무실에서 2시간 30분 동안 진행됐다. 이 이사장은 전임 김용준 이사장과 공통점이 있다. 두 사람 모두 ‘소년의 웃음’을 여태 잃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웃을 때는 어김없는 소년의 모습이었다. 덧니를 내보인 소탈한 웃음 속에 대학과 인연을 맺었지만, 대학이란 제도 만들기에 어쩔 수 없이 참여해야 했던 한 세대의 뒷모습이 함께 엿보였다. 그 때문인지 그는 요즘 대학의 젊은 교수들을 부러워한다. 거침이 없어서다. 자기 세대가 일반적으로 갖고 있었던 ‘주눅’이 이들에겐 없다는 것이다. 비행기 타고 프랑스나 독일, 미국으로 나가 새로운 세계를 만났을 때, 그들의 위세에 눌려 숨조차 쉴 수 없었던 자기 세대와 비교할 수 없는 자신감이 젊은 세대에게 있다는 지적이다. 그렇지만 그는 학계의 후배 교수들 특히 인문학자들이 ‘인문학’의 성격과 방향을 우리 사회의 문화적 정체성과 관련해 더 격렬하게 논쟁해줬으면 하고 내심 바라고 있었다.

인문학은 19세기, 20세기를 거치면서 계속 위축되고 있었기 때문에, 요 몇 년 계속 ‘인문학 위기’라는 항간의 떠도는 말에 별로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었다. 한국 대학이 모델로 삼은 서구 대학들 역시 그런 ‘위기’를 계속 앓아 왔다는 것이다. ‘위기’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 그는, 지금이야말로 어쩌면 인문학이 스스로의 갱신, 자기 모색을 어느 정도 힘 있게 밀어 부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본다.

삶의 현장, 학문이 현실과 직접 만나는 그 지평에서 인문학적 사유와 실험, 작업이 뿌리 내릴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는 교수들이 ‘전문가적 소양’만 강화하지 말고, 전체를 보는 폭넓은 교양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대학을 졸업하는 순간, 자기 분야에 갇혀 평생을 살아가는 ‘전문가 바보’를 더 이상 양산하지 말라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그는 그런 전문가로 가득한 사회를 ‘안전하지 않은 사회’라고 말했다.

△ 1994년 교육부 대학정책실장을 역임하셨고, 서울대 대학원장도 지내셨습니다. 대학과 교수사회,  변화가 많았지요?

“(웃음) 그게 자랑이 될지. 대한민국에서 우리 세대 사람들이 교수생활을 하면서 겪게 될 전형적인 일들을 겪은 것이겠죠. 우리가 학문적 경쟁력이 국제사회에서 아직 허약하죠. 한국 교수들이 학문연구에투입하는 시간은 OECD 나라 중에 제일 적을 거라 생각해요. 공식통계는 없지만 거의 확신해요. 지금까지는 그래요. 그 이유는 대학 역사가 일천한 거 하고 제일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의 경우 본격적인 한국대학의 역사는 해방 후에 시작됐죠. 그 후에 곧 6·25가 일어났고, 부산 가서 천막에서 강의하고 공부했잖아요. 그래서 대학이 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간판 열고 시작한 거 아닙니까. 경제가 성장하고, 1980년대를 거치면서 또 순식간에 많은 대학이 만들어졌습니다. 이른바 인스티튜션(institution) 즉, 제도로서 대학을 꾸며나가는 일, 건설해 나가는 일에 누군가가 동원된다면, 그건 교수밖에 없지요. 그러니 두 가지 일을 안 할 수 없죠. 저의 교수 경력을 살펴보면 반쯤은 이렇게 ‘제도’만드는 일 하면서 살았던 것 같아요. 학생들한테 참 미안한 게 연구자로서, 교육자로서 얼마나 교육에 성실하게 임했는지…….

우리는 걸리는 게 참 많은 세대였어요. 뭐라고 할까, 젊은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우리들 세대란, 이도 저도 아니고 좀 답답한 사람들이 많았지 않았겠나 생각해요. 자신감도 부족했고, 특히 서양에 대한, 선진문명에 대한 열등감 같은 게 많이 있었죠. 당시만 해도 유학을 가지 않고서 고급학문 연구 인력이 된다? 어렵다는 게 상식이었죠. 지금은 심리적인 여유가 있는 거 같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우리의 아카데믹한 수준이 과연 OECD 국가들 가운데 어느 정도 될까요. 그렇지만 젊은 사람 중에 원칙적으로 백기 들고 들어가자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거에요. 이건 엄청난 차이라고 봐요. 짧은 기간 동안에 일어난 변화죠.”

△ 제도로서의 대학 만들기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면, 교육·입시문제에도 고민을 많이 하셨을텐데요.

“입시정책을 이렇게 저렇게 고치면 우리들이 앓고 있는 문제가 없어지리라 보는데, 그건 정말 아니에요. 한국의 교육문제를 해결해 가면서 입시문제를 해결해야지, 교육문제는 내버려두고 입시 묘수를 찾아 입시정책을 하면 다 해결될 것 같은데 이건 아니라고 봐요. 입시제도만 잘 고치면 사람들은 대개 ‘내 아들도 지금은 공부 못하지만 제도만 잘 고치면 서울대 갈 수 있을 것’으로 착각을 하게 됩니다. 문제는 대학입시나 고등교육에서 강남구가 가지는 여론형성 파워가 너무 커졌다는 사실입니다. 시골에서도 다 교육받고 있지만 그쪽 목소리는 교육제도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고 있거든요. 입시문제는 좀 덮어놓고 입시제도가 이렇기 때문에 내 아들이 서울대 갔다 이런 소리 내는 사람들 목소리에 더 이상 귀 기울이지 말고 서울 외 지역의 목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학력격차 문제가 통계상 가장 심각한 교육 문제입니다. 시골에서 본 수학시험 평균성적과 서울 평균성적을 OECD 국가들의 성적과 비교해보면 우리교육의 심각한 문제가 드러나요. 겉포장은 평준화로 똑같이 해놨지만 실제 해결을 해 주는 게 교육정책의 중요한 과제가 돼야 잖아요. 서울대 입학을 희망하는 사람, 그래서 입시제도가 바뀌었기 때문에 붙을 사람이 떨어지고 떨어질 사람이 붙는, 그런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 사람들에게는 정말 억울한 일이겠는데 세상에 불공정한 일은 그것만 있을까요. 교육에서 더 본원적인 것들이 깨지고 있잖아요. 한국 대학의 97%가 넘는 학위취득률의 실정을 직시해야 합니다. 서울대와 같은 국립대는 특히 국민 세금이 투입되잖아요.” 

△ 올해는 총선과 대선이 함께 있는, 굉장한 변화의 시기입니다. 정치적 변화를 바라는 젊은 세대들이 취업 등 많은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與나 野나 지금 국민들이 특히 젊은 사람들이 이런 게 이슈화가 됐으면 좋겠다는 걸 내놓지 못하고 있어요. 與野할 것 없이요. 국가적 이슈가 무엇이고, 논의할 만한 시대적 과제를 던져놓고 그걸 끌고 갈 수 있어야 생명력 있는 정치가 될 수 있는데, 그런 게 없어서 아쉬워요. 젊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 생각들을 잘 형상화하지는 못해도, 누군가 그걸 제대로 공식화 해주길 국민은 바라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우리 마음에 닿는 정치적 이슈로 만들어서 화두를 던질 수 있는 역량이 정치인에게 필요한데, 그걸 못하고 있는 게 안타깝습니다.안철수·박원순 같은 사람들한테 기대한 건 그거였거든요. 국민들이 답답해하는 것을 명확하게 이슈화해줄 수 있는 정치 말입니다. 대학 졸업생들이 너무 많아서 고급직업에 대한 충족이 불가능한 사회가 됐으면, 이것을 풀 수 있는 방향을 모색하는 게 정치죠. 답답해하는 젊은이들이 많습니다. 지방대학은 더 심하고요.

그리고 또 ‘원하는 일자리’ 확보가 젊은이들에겐 더 큰 문제입니다.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 원하는 일자리와 현실의 괴리는 크고, 그것이 젊은이들이 기성세대 특히 정치인들에게 갖는 불만일 것입니다. 어떻게 나라를 꾸며서 나와 내 후배들에게 미래를 보여 줄 것인가. 어떻게 모자란 일자리를 만들 것인가. 이런 딜레마를 정치적으로 모든 사람이 논의할 수 있도록 크게 이슈화해서 내놓고 풀어가야 하는데, 지금 역량이 없어 보입니다. 이게 큰 문제라고 생각해요.”

△ 오래도록 인문학을 설득과 진리탐구 차원에서 깊게 고민하셨더군요.

“인문학 위기가 갑자기 닥친 것처럼 다들 얘기하는데, 과거에 인문학이 흥성했던 때가 있다가 시들은 것처럼 말하는 것은 誤讀입니다. 인문학은 별로 흥한 적이 없었어요. 인문학 위기라는 말을 할 수 있게된 상황이 뭐냐면 우리나라뿐 아닌 세계적인 건데, 한국의 대학 제도가 서양대학을 모델로 했으니 서양대학을 봐야겠죠. 거기서도 인문학 위기란 말은 사용하지 않았지만, 규모가 작아지는 것에 대해서 섭섭한 감정은 20세기 초부터 계속해서 표현해 왔더군요. 과학과 기술이 발전하면서, 새로운 분야가 막생겨나면서 왕년의 인문학이 가졌던 위치가 똑같을 순 없잖아요. 사실은 자연과학쪽이 더 심각합니다. 주변에 보면 미국에서 이론 물리학 박사를 하고 와서도 10년째 ‘포스트닥’을 하는 이가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고급인력 과잉 현상이 진행되고 있어요. <네이처>에서도 지적했지만, 모든 나라가 과학쪽 브레인을 앞다퉈 양산한 결과입니다. 대학을 ‘Ph.D’양산 공장으로 만든 거죠.

지금은 인문학의 위치를 새롭게 구축할 때입니다. 인문학 교수들이 해야 할 일이죠. 인문학이 대학과 한국사회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 문화정체성을 꾸미는 일에 인문학자들이 직결돼 있다는 뜻이죠. 인문학자들이 우리말로 뭘 가르치겠다고 생각하는 것부터 의식해야 합니다. 국어 교과서에 어떤 글을 실을지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공교육 기관에서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를 정하는 것이 우리의 문화 정체성을 정하는 일이죠. 그걸 가지고 싸움을 하고 토론을 하는 게 인문학자들이 할 일 아닐까요. 다음 세대들에게 우리가 문화적 정체성으로 전해줄 것이 이것이다 하고 싸우는 게 할 일인데 지금 안하고 있어요.

물론 매우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문화적인 주소 자체가 굉장히 불투명하기 때문이죠. 세계화다 뭐다 해서 모든 것이 뒤섞여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기회가 뭐냐하면 세계에 없는 정체성을 만들 수도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셰익스피어도, 호머도, 춘향전도 고전이에요. 미국대학은 셰익스피어만 고전이지만, 우리는 춘향전도, 공자도 다 고전이거든요. 그러니까 인류문명이 성취한 엄청나게 많은 부분이 우리에게 숙제로 주어짐 셈입니다. 제가 기회라고 말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죠.”

△ 근래들어 대학 구조조정이 진행되면서, 먼저 손보는 분야가 사실 인문학쪽이다보니 ‘위기감’이 더 팽배해진 것 같습니다. 인문학의 위기라기보다는 인문학과의 위기라고 할까요.

“사회라는 게 유동적이기 때문에 인력시장 변화가 있는 경우, 대학에서 계속 박사학위, 고급인력을 만들어내는 것은 부담일 수 있어요. 우리가 지금 딱 그 시점에 와 있습니다. 참 어려운 문제죠. 문제를 직시하고 대비하기보다 그냥 가만히 있다가 교수들을 거칠게 퇴출시키고 지금 뭐 그런 분위기 같습니다. 대학 교수는 그냥 내버려 달라고 하는데 그것도 사실은 무책임한 거죠. 사회적인 책무나 이런 것이 전공과목은 아니어도 진즉에 그런 것들을 예측하고 정책제안을 했어야지요. 지금은 좀 더 섬세한 정책을 고민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냥 내버려두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죠.

저는 최근 대학생들의 등록금 반값 투쟁의 의미를 곰곰 생각해봤습니다. 대학교 4년 동안 돈을 내고 배운 것과 그 뒤에 투자대비 효과에 괴리가 엄청 크다는 것을 학생들이 깨닫기 시작한 거죠. 반값이면 충분하겠다는 거지. 그렇지만 이건 현실적이지 않아요. 지금 등록금을 반값으로 해서는 대학을 못 꾸려나가거든요. 그런데 등록금 내는 학생 입장에서는 딱 그 정도라는 거죠. 혹자는 유럽식으로 대학을 통제를 하고 국가가 자격 있는 대학만 열어주라는데, 우리는 대학이 신분상승 통로가 돼 있기 때문에 그걸 통제한다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요.

반값 등록금이 실현되지는 않겠지만, 아마 미국 대학처럼 되지 않을까요. 마을회관 같은 값싼 커뮤니티 컬리지 형태의 대학으로 가거나, 아니면 비싼 돈 내고 다니는 하버드대 같은 대학으로 가거나 말입니다. 아마 그 방향으로 가는 기로에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것 같아요. 사실은 우리가 이미 그 쪽으로 방향을 틀었어요. 대학에서 뭘 배웠는지 사회에서 평가하는 각종 인증 제도가 생겨나겠죠. 미국처럼 말입니다. 그 방향으로 갈 거 같아요. 저는 반값 등록금이 그 1탄이라고 봅니다.”

△ 대학이 기로에 서 있다는 지적에 동의합니다. 그래서인가요, 마침 많은 대학들이 교양과정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고전문헌학을 전공하신 선생님께서는 최근 대학들의 교양 강화 움직임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사실은요, 나는 인문학이 그냥 교양이 핵심이라고 봐요. 이제 한국 인문학이 자기 길을 찾아간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인문학의 목표가 사실 사람 만나서 얘기하고 인생을 논하는 것이라고 봐요. 사실 그렇지 않아요? 연구계획서에 기대되는 효과 쓰라고 하면 인문학자들이 가장 괴로워하잖아요. 기대되는 효과가 뭐냐면 그 인문학적 주제를 놓고 사람들과 심도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그렇게 인생을 채워가는 거잖아요.

전공자들이 깊이 있는 것을 공부해서 대중들에게 쉽게 얘기하는 것을 교양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인문학적 문제가 제기되는 현장이 여기다’라고 생각하고 인문학-교양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 교양과목을 제대로 하기 위한 심화과정이 전문 과정인 것이지요. 그렇게만 생각을 바꾸면 유치원에서 배우는 동화에서부터 고교 국어 교과서에 들어갈 내용까지 다 같이 논의하는 게 인문학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한국의 인문학은 자생적인 패러다임이 없어서 외국에서 논의한 걸 빌려다가 논의하다가 외국에서 유행 지나면 여기서도 왜 그만둬야 되는지 모르고 다시 저기 한다고 하는데 안타까운 일이죠. 우리 인문학 문제는 어디서 나와야 하냐면, 인문학적인 테마를 놓고 인문학적 소양을 아직 못 가진 사람과 이야기하면서 테마를 만들어가는 데서 나와야 합니다. 조금 인문학을 아는 사람이 뭐부터 이야기해야 하는지, 무엇을 주제로 제공하고 이야기해야 하는지 등을 따져나가는 일, 이게 한국 인문학의 적절한 테마라고 생각해요.

거듭 말하지만, 대학 교수로 인문학을 하는 사람이 전공을 가르치면 A급, 교양을 가르치면 B급 인력이라는 생각이 들지는 몰라도 인문학의 찬스는 교양과정에 있다고 봐요. 저는 학부제 찬성자였습니다. 대학교 1학년 때부터 고시 공부하는 사람과 문학공부만 한 전문가가 있는 사회는 참 살만하지 않은 사회라고 생각해요. 唐詩를 읽을 수 있고 國樂을 감상할 수 있는 의사와 변호사가 있고, 법률문제에 대해서도 인문학적인 깊은 비평을 할 수 있는 소설가가 있는 사회가 고급사회 아닐까요. 그런데 우리 제도는 명백히 18세부터 전문가가 되는 길을 轉科도 안 시키면서 틀어막고 있죠. 이점에서 저는 대학이 부도덕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고등학교까지 소프트웨어 전문화를 해버렸더군요. 몇 명의 천재에 적용할 모델을 교육 일반에까지 확대한 거죠. 그걸 누가 제일 먼저 나서서 반대를 해야 하냐면 인문학자들이 나서서 반대를 해야 하는 겁니다.”

△ 화제를 조금 바꿔 보겠습니다. 학술협의회는 어떻게 꾸려나가고 계십니까.

“아, 그거요.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예전에 대우재단이 학술지원사업을 시작했을 때 그 규모에 있어서도 과거 학진과 같은 규모를 능가해서 파워가 있었죠. 지금은 연구재단이 워낙 크니까 비교가 안 되지만 그래도 역할이 있다고 봐요. 연구재단의 규모가 커지는 건 좋은데 국민 돈을 쓰다보니까 옆에서 보면 쓸데없는, 불필요한 부분들을 안 할 수가 없죠. 나랏돈 쓰면 어쩔 수 없어요. 연구재단은 형식적인 요건을 지켜야하니까 내용은 형편없는 게 나오는 경우도 꽤 있거든요.

하지만 우리는 규모가 작은 대신 공적인 부담이 적은 게 장점입니다. 공모 위주로 학자를 찾아가는 게 아니라, 직접 찾아가서 퀄리티 위주의 결과물을 낼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도 성과를 내야하니 재촉은 하겠지만, 연구재단처럼 못 내면 몇 년간 징벌 뭐 이런 것은 생각할 필요도 없죠. 제 욕심은 질 좋은 지원을 꾸준히 해가자는 것이죠. 분야도 골고루 하는 게 아니라 학술협 이사진이 볼 때, 양의 논리에 밀려서 지원 못 받는 곳, 귀하지만 마이너리티인 곳을 찾아서 지원해주면 좋은 결과를 거둘 수 있지 않나, 그렇게 되면 바람직한 일을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 올 4월로 교수신문이 창간 20주년을 맞았습니다. 교수신문의 애독자이신데, 교수신문에 당부하고픈 말씀 있으시다면.

“사실 교수신문은 지금까지는 교수신문으로의 역할을 잘한 것 같아요. 제도적으로 대학이라는 것이 한국에 자리 잡는 과정이 쉽지 않았는데 이 일을 싫든 좋든 교수들이 할 수밖에 없었지요. 특히 한국 대학은 사학이 70%를 넘기 때문에, 교수들이 약자인 측면도 있습니다. 사학 부분에서 대학을 구축하는 일이 교수 맘대로 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교수 권익도 대변해줘야 하는 일을 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봅니다.

그런데 교수는 여전히 한국 사회의 고급 직업군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급 직업에 대해서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은 자기비판과 자성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교수신문도 다른 접근을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요? 철밥통 모임이 아니라 다른 데보다 높은 수준의 자기 징계, 피어 그룹들 간의 압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집단이 교수사회입니다. 교수신문도 ‘교수’라고 감싸 안는 게 아니라 교수들의 잘못들을 더 아프게 잡아내고 비판해야 하지 않을까요? 교수신문은 엘리트 집단이 부당한 피해를 보는 것을 대변해 주는 것이 아니라 자정기구로서의 역할을 주문하고, 이를 강조하는 데 더 눈을 돌려야한다고 조심스레 생각해봅니다."

△ 끝으로 후배 교수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저는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지식 산업사회의 여러 가지 병폐가 있을 수 있는데, 지식생산을 하는 사람들이 사회 주역이 된다는 의미에서 기대들을 크게 하겠지만 사실은 전문가 집단들이 지나치게 분화돼서 사회 전체에 대한 문제에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사회 곳곳에서 ‘전문가 집단’이 만들어지고, 벽을 쌓고, 또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곳에서는 전문가 집단들끼리 싸우고 있습니다. 이러한 전문가들의 싸움, 갈등을 누군가가 막아줘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대학교육을 받을수록 ‘전문가 바보’에서 벗어날 수 있는 역량을 같이 키워주는 게 중요합니다. 제가 학부제를 기본적으로 찬성했던 이유는 사람이 全人으로 사는 거지 절대 직업인으로 사는 게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죠. ‘나는 다시 태어나도 이 길로 가겠습니다’라는 말이 있어요. 참 좋은 말이지만 사람은 그렇게 사는 게 아니죠. 인간으로서 죽음의 문제나 사랑하는 사람과의 문제 이런 것이 우리 인생을 더욱 스토리에 스토리를 만들어줍니다. 20세기의 한계는 직업윤리가 인간윤리를 대체하려 들었다는 데 있습니다.

직업과 인간을 동일시해서 직업윤리가 정해주는 것을 좇아가면 다 된다, 즉 인간윤리를 조금 버려도 법관윤리만 충실하면 그게 인간윤리를 대체할 수 있다고 착각했던 게 20세기 패러다임입니다. 21세기로 가면서 사실은 직업군이 있는 구성력도 조금은 약화되리라고 봐요. 자기 시간을 가지려는 사람이 늘 겁니다. 인간의 다른 가능성을 보고 그래서 문화적으로 더 다양한 일을 욕망하겠지요.

그래서 대학의 젊은 교수들이 전문가적 역량을 늘이는 것은 좋지만 전문가적인 시야만 가지고 살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니까 교양과목에도 이런 차이가 있어야 됩니다. 중요한 이야긴데, 공대에서 영어 교양과목으로 공업영어를 가르쳐달라 요청을 많이 합니다. 공학공부 하는 데 도움이 되니까요. 정말 영어공부는 어떻게 해야 하냐면 셰익스피어를 읽게 하는 것입니다. 학생들이 두 개의 인생을 고민할 수 있도록 말이죠. 다른 걸 볼 수 있는기회를 만들어줘야죠. 공대에 들어왔는데 영어까지 공학영어하면 인생이 온통 공학인 셈이지요. 그렇게 대학이 바뀌어야 되고 가르치는 사람들도 그런 생각을 가져야 한다고 봐요.”

일시·장소: 2012년 4월 5일, 한국학술협의회 이사장실
대담: 최익현 편집국장 bukhak64@kyosu.net
사진: 최성욱 기자 cheetah@kyosu.net
녹취: 윤상민 기자 cinemonde@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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