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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익은 주제 그러나 독특한 접근 … '빔의 문명 전환' 제안
낯익은 주제 그러나 독특한 접근 … '빔의 문명 전환' 제안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2.01.02 13: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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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책_ 김용호 지음, 『제3의 눈-시선의 변화와 문명의 대전환』(돌베개, 2011.11)

 

김용호의 영상화두』, 『몸으로 생각하다 』에서 확실히 그는 너 나아간 사유를 보여준다.
"'모든 것이 연결돼 있다'는 것을 투명하게 알고, 그 앎에 기초해 지구적 책임을 자각하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책이라면, 이 책은 매우 낯익은 책일 것이다. 낯익은 이유는 여러 저자들이 이미 이러한 주장을 펼쳐왔기 때문이다. '낯익은' 주제, '비슷한' 메시지는 긴장이 이완되는, 요즘말로 '심장이 쫄깃쫄깃해지는' 독법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아 이런 주장은 잘 알지. 결국 이런 메시지잖아!' 하는 우쭐거리는 책읽기를 만든다. 그 순간 저자는 얼마나 하염없이 작아지는가.
그러나 시선을 바꿔서, 생각의 궤도를 조금만 옮겨버리면 다른 지평을 만날 수 있다. 왜 또 비슷한 메시지를 꺼낸 것일까. 이 메시지에 도달하기 위한 저자의 지적 고투는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그런 저자의 상처투성이 지적 고투는 또 얼마나 투명한 것일까. 그의 의도와 자기증명 과정은 충분히 공감될 수 있는가. 생각의 궤도가 달라지면, 독서의 黃道는 돌변한다. 김용호 성공회대 교수(신문방송학과)가 지난해 11월에 내놓은 『제3의 눈-시선의 변화와 문명의 대전환』은 책의 제목과 부제가 환기하는 '낯익음' 때문에 책읽기가 왜곡될 수도 있지만, 분명 녹록치 않은 문제작이다(그가 이 책을 상재한 것은 2011년 11월. 이보다 한 달 앞서 김유동 경상대 교수가 『충적세 문명-1만 년 인간문화의 비교문화구조학적 성찰』을 선보였다. 단일한 문제의식과 주제로 전작 단행본을 출간하는 일이 어려워진 한국 학계의 사정을 감안할 때, 이 두 권의 책은 비록 입론 과정이 거칠긴 하지만 학술 단행본의 모델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김 교수의 책은 인류 문명의 전환이라는 거대 담론을 '시선의 변화'라는 키워드로 고찰한다. 저자는 1만여 년 전 농경과 목축이 시작되면서 지구상에 최초로 등장한 인간의 문명을 '두 눈 문명'으로, 20세기 초부터 등장한 '있음' 너머의 세계를 보는 눈을 '제3의 눈'으로 명명하면서 현재 지구와 인류가 거대한 문명 전환기에 놓여 있다고 진단한다. 그는 흥미롭게도 인문과학보다 물리학, 생물학 등에서 '의미'를 퍼온다. 그가 착안한 '제3의 눈'은 무엇인가.

인문과학밖에서 모색한 사유의 가능성

'내면의 눈'으로 간주된 제3의 눈(third eye)은 물리적 시각체계를 넘어선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는 눈을 가리킨다. 이 눈은 과학혁명을 일으킨 시선이면서 동시에 인류 문명의 대전환을 일으키고 있다. 사람의 마음도 보고, 먼 데서 일어나는 사건이나 과거와 미래의 사건들까지 보는 눈. 이 신기한 눈을 가진 사람들이 목격하고 주장하는 바의 공통점은 두 눈에 보이는 '있음'들과 그 질서는 사물의 실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있음의 세계 배후에는 뭔가가 있고, 그것이 두 눈에 보이는 세계의 감춰진 연원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없음'을 보면서, 없음이 있음의 뿌리라고 생각한다. 바로 이것이 '제3의 눈'이다. "제3의 눈은 새로운 의미를 보고 아는 지각체계이자 '온전'을 지향하는 앎의 체계면서, 이를 통해 새로운 질서를 창조해가는 운동이기도 하다."

저자는 어디서 '제3의 눈'의 영감을 받은 걸까. 인류 진화의 과정에서다. 진화의 역사상 영장류의 시선은 세 번의 큰 도약을 통해 완성됐다. 5만5천년 전 원숭이 조상 카르폴레스테스의 눈은 얼굴 옆면에 위치해 있었다. 이 눈은 몸의 뒤쪽까지 볼 정도로 넓은 지역을 감시해 포식자들을 피하는 데는 유리했지만 거리 감각이 없는 2차원적 '平面視 '였다. 이후 500만 년이 흐르자 원숭이 조상의 눈 위치에 변화가 생겼다. 두 눈이 앞면으로 모아진 이 원숭이 조상의 이름은 쇼쇼니우스로, 눈이 감지하는 전체 視界는 좁아졌지만 거리와 입체 감각이 두드러지게 진화한 '立體視'를 갖게 됐다. 이로부터 세상은 존재감을 갖는 '있음'들로 이뤄지게 됐다.

3천300만 년 전 지구에 한랭화가 불어닥쳤을 때 카토피테쿠스라는 원숭이는 줄어든 먹이를 더 잘 찾기 위해 빛을 느끼는 시세포 수를 늘린다. 이에 따라 '中心窩'와 안구 방이 만들어지면서 영장류의 시선은 비로소 안정된 영상을 얻게 됐다. 이제 두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이러한 시선을 물려받은 인간은 세상을 있음과 없음, 확실성과 불확실성, 나와 너(주체와 객체), 물체와 정신 등 모든 것을 이분법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제3의 눈은 있음이라는 의미의 폐기와 재편,

빔(空)으로부터 나오는 의미들의 발견과 창조에 직접 관여한다.

따라서 제3의 눈은 舊문명의 중층구조 전체의 혁신을 지향한다.”

 

"두 눈 문명은 '내가 대상을 바라본다'는 가정에 기초해 지식을 발전시켰다. 이 가정은 나와 대상을 구분하고, 대상과 자신의 관계에 따라 조증과 울증에 오염된 시선을 형성한다. 이는 입체시의 착각에서 비롯돼 주객이원론의 대립적 세계관을 낳았다. 이것이 있음의 문명을 낳은 시선이다." 이렇게 확립된 '두 눈 문명'을 저자는 '舊 문명'이라 명명한다. 이 두 눈 문명이 거대한 지식을 축적하면서 인류 스스로를 위기에 직면하게 만들었다는 게 그의 지적이다. 우리시대가 '문명의 전환기'라는 진단이야 학자들마다 하는 이야기니 새삼스러울 것은 없다. '새로움'은 다른 곳에 있다. 문명의 전환은 이 문명의 주체가 겪게 될 '운명'과도 연관돼 있다. 바로 여기에 저자의 남다른 혜안이 있다. '문명의 전환기'를 말하는 저자의 知의 지평은 '여섯 번째 대멸종'을 이해하는 데서 엿볼 수 있다.

잘 알려진 대로, 인류 대멸종의 시나리오는 세 가지다. 첫째, 큰 파국 없이 현 문명이 지구 생태계와 조화를 이루는 방향으로 서서히 전환된다. 둘째, 인간을 포함한 지구 생명체들의 대멸종이다. 여기서 인간 종이 살아남을 가능성은 배제된다. 셋째, 파국을 겪으면서 인류의 일부가 살아남아 새 문명을 일군다. 저자는 이 세 가지 시나리오가 '사느냐 죽느냐'에 초점을 둔 것으로 이해한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사느냐 죽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배웠느냐'다.

제6의 대멸종 앞둔 인류, 무엇을 배울 것인가

저자는 "다차원적인 제3의 눈은 생존 자체보다는 무엇을 배웠고 어느 수준의 진리에 도달했느냐에 더 큰 가치를 둔다"라고 거듭 말한다. 불교철학적 아우라가 스며들어 있는 이 진술 속에 그의 독특한 시각이 놓여 있다. "제3의 눈은 있음이라는 의미의 폐기와 재편, 빔(空, emptiness)으로부터 나오는 의미들의 발견과 창조에 직접 관여한다. 따라서 제3의 눈은 구문명의 중층구조 전체의 혁신을 지향한다."

저자가 '있음의 문명을 빔의 문명으로 전환하는 것'을 강조한 대목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있음과 없음, 창조와 진화, 과학과 종교 등 우리가 대립적으로 보는 사물은 나눌 수 없는 온전히 쪼갬의 시선을 통해 차별화돼 펼쳐진 양상이다. 그 차별과 대립의 허상을 실상으로 착각할수록 지식은 편견이 되고 무지스러워진다. 이를 넘는 창조적 상상력은 양극의 뿌리가 같다는 각성, 그리고 양극을 품어 넘는 중도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그의 시선이 가 닿는 곳 '중도'는 '온전'으로 가는 교두보이자, 온전을 지향하는 운동이다. 사물의 양 극단을 응시하는 구문명, 두 눈의 문명이 놓친 것은 바로 이러한 사물의 '온전한' 전체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사물을 바라보는 '온전한 시선'의 결핍이다.

아마도 어떤 독자들은 저자가 결론의 자리에 내놓은 입론이 '불교'와 가까운 것이어서 고개를 돌릴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저자가 생물학, 물리학, 철학, 언어학 등 다양한 통섭적 지식의 그물로부터 뭔가를 끊임없이 길어내기 위해 손을 내밀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챈다면, 그리고 그 대상이 '지혜'라고 한다면 숨을 고르고 함께 그가 제안한 사유의 방식을 추슬러 볼 필요가 있다. 지식과 지혜의 조화는 온전한 시선→온전한 앎→온전한 삶→온전한 문명의 주춧돌이다. "고삐 풀린 지식을 지혜의 고삐로 다시 움켜쥐는 일은 문명의 흐름을 바른 방향으로 돌리기 위한 가장 근본적인 실천이 된다."

과연 저자가 독자들을 얼마나 명쾌하게 설득할 수 있을까. 설득의 논리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던진 '화두' 아닐까. 지식에서 지혜로가 아니라, 지식과 지혜의 조화. 온전을 향하는 삶이라는 화두.

 

 

최익현 기자 bukjak64@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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