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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길의 생물읽기 세상읽기54 미기후(microclimate)
권오길의 생물읽기 세상읽기54 미기후(microclimate)
  • 권오길 강원대 명예교수·생물학
  • 승인 2011.12.19 17: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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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내 김칫독 속이 영하 1도를 유지하는 비결

 

권오길 강원대 명예교수·생물학
우리나라의 겨울 풍광을 靑松白雪이라 했지. 북풍한설에 짙푸르렀던 풀대는 그지없이 쪼글쪼글 바짝 말라비틀어져 버렸고 松柏을 빼고는 죄다 앙상하게 발가벗은 알몸(裸木)이 돼 본모습을 드러내고 황량하게도 쓸쓸히 서 있다. 어쩐지 사방 득실거리던 벌레들은 얼씬도 않으니 그만 텅 빈 세상이 되고 말았고, 생물이란 생물은 온통 혹독한 겨울 추위 앞에 몸을 가누지 못하고 사시나무 떨듯 벌벌거리고 있다. 허나, ‘겨울은 휴식의 계절’이요 ‘휴식은 노동의 연속’이니, 저기 저 논밭뙈기들도 여름 내내 잔뜩 진을 빼앗겼던 터라, 이른바 땅심(地力)을 올리느라 쉬고 있다. 자연도 저렇게 푸욱 노는 한가한 철이 있었구나!

그런가 하면 정적이 감도는 처절한 歲寒에도 내색 않고 보란 듯이 기세등등 생동하는 생명들이 있다. 흰 바탕에 검은 옷을 입은 박새, 노상 떼 지어 짹짹거리며 노니는 붉은머리오목눈이(뱁새), 까막까치들에다 고목에는 딱따구리 놈이 딱! 딱! 딱! 나무를 쪼아대고, 잣나무에는 청설모가 그네를 타며, 아까부터 지질한 들고양이놈이 텃밭에 내다버린 음식쓰레기를 찾아 헤매고…. 여기 휘젓고 다니는 동물들이 우연찮게도 새와 길짐승들이 아닌가. 여타 변온동물(냉혈동물)은 칼 추위에 꼼짝달싹 못하고 죽거나 숨어 버렸지만 유독 정온동물(온혈동물)인 조류와 포유류만이 아랑곳 않고 저렇게 설친다.

그건 그렇다 치고, 대낮 따스한 양달에선 노인들은 해바라기를 하고, 젖먹이 아이들에게는 일광욕을 시킨다. 그리하여 비타민 제조공장인 살갗은 햇살(자외선)을 받아 에 르고스테롤(ergosterol)을 비타민D로 바꾼다. 때문에 비타민D를 ‘태양비타민(sunshine vitamin)’이라 부르는 것이며, 이것은 나같이 설익은 노인의 뼈를 튼튼케 하고 전립선암을 예방한다. 여성들은 하루에 15분 넘게 직사광선을 받아야 자궁암에 안 걸린다고 한다. 더군다나 태양광선은 수면(잠)에 필요한 멜라토닌(melatonin) 합성을 하므로 낮이 짧은 겨울철에는 태양 부족으로 우울증이 생기기 쉽다 한다. 누가 뭐래도 겨울 햇볕은 약방의 감초다.

북반부는 남향집ㆍ남반구는 북향집, 왜?

이제 양지바른 텃밭으로 발길을 돌려본다. 밭두렁과 두렁 사이가 밭고랑이고, 한 두둑과 한 고랑을 아울러 이랑이라 한다. 두렁은 우뚝 솟아 볕이 잘 들지만 고랑은 하루 종일 응달이다. 하여 두렁의 눈(雪)은 태양을 받아 곧바로 녹아버리지만 고랑의 것은 여간해서 녹지 않는다. 밭이랑 하나를 두고도 두렁과 고랑 사이에 이렇게 온도차가 난다. 볕 쬠(日照)이나 바람받이 등에 따른 이런 기후의 차를 微氣候(microclimate)라 한다.

북반부에서는 남향집을 짓고 남반부에는 북향집을 지어 겨울을 따스하게 지내는 것, 한여름 오후 1~2시의 맨땅 운동장과 건물 뒤편의 정원의 온도, 바닷가와 도시의 기온, 숲속과 길가의 온도가 각각 다 천양지차이니 이 또한 미기후 탓이다. 뿐만 아니라 눈을 벽돌처럼 꽉꽉 다져 지은 돔(dome)꼴의 에스키모들의 이글루(igloo)만 해도 바깥기온이 자그마치 영하 45°C가 되는데도 굴 안은 사람 몸에서 나는 열만으로도 16°C가 된다고 하지 않는가(사람의 체온이나 램프 열로 안은 녹았다 얼었다 하면서 집이 더 야물어진다 함). 이는 눈의 斷熱효과를 증명하는 것으로 겨울눈이 많으면 이듬해 보리농사가 풍년이다. 그리고 뱀과 참개구리 따위는 과연 어디에서 사력을 다해 피 터지는 겨울나기를 하고 있는가.

요즘 와서는 한국 사람들의 반, 아니 그 이상이 아파트에 살아서 겨울에 김칫독을 묻지 않는다. 온도를 낮고 일정하게 유지해 김치 유산균이 죽지 않고 오래 가는 것을 개발했으니 세상에 둘도 없는 한국 고유종 ‘김치냉장고’다. 김칫독을 응달에 묻었을 때 겨우내 독 속의 온도가 영하 1℃ 근방을 유지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흉내 낸 것이 김치냉장고라는 발명품 아닌가! 기온은 영하 20℃나 되지만 김칫독 속은 내내 영하 1℃로 유지한다는 것도 미기후를 응용한 현명한 삶의 지혜렷다. 조상들의 슬기로움에 두 손 바짝 들었다! 세상에!?

삶이 버거울 땐 겨울밭가에 나가 보라

양지바른 밭두렁에 자못 찬 기운에 시푸르죽죽 검붉은 색을 한 핼쑥한 냉이, 민들레, 고들빼기들이 이 미기후를 용케, 애써 이용하느라 하나같이 땅바닥에 바싹 웅크렸다. 납작한 이파리를 땅바닥에 바짝 달라 붙여, 아래 큰 잎과 위의 작은 것이 엇갈리게 켜켜이 포개 장미꽃송이처럼 둥글게 同心圓으로 싸고도니 이런 모양새를 로제트(rosette)형이라 하며, 태양열과 지열을 한껏 얻어 쓰겠다는 심사다. 그 오묘함에 마냥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덴마크의 식물생태학자 라운키에르는 식물의 월동생활형을 크게 지상식물, 지표식물, 半지중 식물, 지중식물, 1년생 식물(씨앗을 남김)로 나눴으니 이를 라운키에르 생활형(Raunkier’s life form)이라 하고, 앞의 식물들은 반지중식물들이다. 벗님네들이여, 정녕 삶이 버겁고 팍팍해 힘겹고 지겹다 싶으면 지금 당장 겨울밭가에 나가 보라. 끈질기고 웅숭깊은 생명들이 당신을 살갑게 맞을 터이니…. 겨울 푸나무들이여, 힘내라! 따스하고 포근한 봄은 어김없이 오고야 말것이다.

권오길 강원대 명예교수·생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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