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7 05:55 (토)
[깊이읽기]『한국문학사의 논리와 체계』(임형택 지음, 창작과비평사 刊)
[깊이읽기]『한국문학사의 논리와 체계』(임형택 지음, 창작과비평사 刊)
  • 손종업 / 선문대·국문학
  • 승인 2002.06.27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02-06-27 10:42:29

이 책에서 한 권의 저서가 지닐 법한 총체감을 기대하는 사람은 조금 실망할 수도 있겠다. 저자가 표나게 내세우고 있는 논리와 체계란 것조차가 이미 적지 않은 세월을 학계에서 곰삭은 것인 만큼 조금쯤은 첨예함을 잃어버린 것이기도 하다. 저자 스스로도 ‘너무 당연한 말이어서 오히려 새삼스럽다’고 술회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첫 저서인 ‘한국문학사의 시각’으로부터의 ‘進境’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것은 식민주의로 오염된 ‘신문학’의 근대성을 뛰어넘어서 새로운 하나의 문학사적 의미망을 구축하려는 노력이라 할 수 있다.

이를 향한 저자 임형택 성균관대 교수(한문학)의 끊임없는 관심과 열정이 국학연구의 새로운 연원이 됐음은 물론이다. 이 묵직한 저서를 통해서 그는 극단이 아니라 바로 그 중심을 보여준다. 학술행위에 있어서 그는 실사구시의 위대한 전통을 되살리고자 애쓴다. 공허한 수사와 관념이 떠도는 세상에서 그의 언어는 투박하면서도 견고하게 세상을 향한다. 일찍이 그가 또 다른 저서에서 연암에게서 읽어낸 독서하는 자, 士의 모습은 그대로 그에게로 옮겨진다. “한 士가 독서를 하면 혜택이 세계에 미치고 功業이 영구히 드리워진다”는 것. 이 같은 읽기 행위야말로 그의 학문적인 출발점이자 목적지가 되는 듯하다.

여러 논저에서 발견되는, 그의 글들이 지닌 표면적인 특징은 텍스트들에 대한 끊임없는 詛嚼에 있다. 그의 학문적 읽기 행위는 반복되고 또 중첩된다. 일련의 실사구시 속에서 민족문학으로서의 텍스트들은 곱씹어지며 세월이 흐르면서 거기에 ‘멋’과 ‘趣’가 깃들여 한결 맛깔스러워진다. 그러나 그의 읽기는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 개별적인 텍스트들은 새로운 의미체계 속에서 재해석된다. 이러한 귀납적인 행위 속에는 해체와 재구성의 운동이 있다. 이는 근대에 대한 재래의 관점에 대한 반성과 이에 따른 새로운 의미망의 탐색과 관련된다. ‘하나의 한국문학’에 이르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라고 그는 의문을 던진다. 설화들은 소설양식들과 뒤얽히고 서사한시들은 근대적 서사의 또 다른 징후로 읽히며 ‘奏議’라든가 소위 잡문에 속하는 단편서사들에도 눈길을 던지게 된다. 이렇듯이 그의 학문적 실천은 새로운 ‘시각’을 통한 주체에 대한 성찰에서 시작되어 마침내 논리와 체계를 지향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임형택 교수가 한국문학사에서 발견하는 논리와 체계란 무엇인가. 그 핵심은 국문문학과 한문문학의 이원구도는 한국 중세문학사의 특수성이라는 말로 요약된다. 그에 따르자면 우리의 중세문학사는 이원적 모순구조의 발전이었던바, 근대문학의 길은 이 모순구조의 극복을 통해서만 명확하게 찾아질 수 있었다. 18,19세기에 근대문학으로 지향하는 움직임이 일어났으나 결국 근대문학의 과제는 완수되지 못하고 다음 단계로 이월됐다. 신문학은 문학사적으로 보면 이원성의 지양인 동시에 근대문학의 새로운 출범이라는 의미를 띠고 있다. 이러한 주장을 통해 그는 전통단절론을 극복하려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순진하게 혹은 무리하게 내재적 발전론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근대란 보편성과 특수성이 만들어내는 차이에 대한 더 깊은 성찰에서 찾아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리라.

이러한 인식은 민족문학이라는 사유체계 속에 한문학적 전통을 수용하려는 노력으로 구체화한다. 보편적 형식의 틀 속에 민족적 내용이 구현되어 있기에 한문학은 값진 우리 문학이라고 보는 것이다. 결국 이 저서에는 한학 자체에 매혹된 정신이 빛나고 있다. 일찍이 저자가 논문의 저편에 놓여진 책읽기에 대한 끊임없는 매혹을 통해서 ‘하나된 문학사’에 대한 꿈을 조탁해왔음은 주지하는 바이다. 그에게서 우리는 잊혀진 세계의 흔적을 찾아 나선 탐험가의 체취를 느낄 수 있을 정도다. ‘매월당시사유록’에 관하여’라는 논문 등에서 엿볼 수 있는 한 권의 책에 대한 그의 탐색은 가히 움베르토 에코를 연상시킨다.

어쩌면 그가 이 책을 통해서 발견하는 논리와 체계란 지나치게 소략한 것이라고 비판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결국은 그 논리와 체계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얼마나 풍요롭게 미세한 영역에서 증거들을 발견하고 의미들을 생산해낼 수 있는가가 문제가 되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이러한 논리체계 속에서 무작정 18세기 영·정조 시대를 신화적으로 미화하거나 19세기에 대한 폄하를 통해서 이식문학론을 그대로 반복하려는 태도를 동시에 뛰어넘는다. 국왕 정조의 죽음과 함께 신유옥사로 시작돼 근대계몽기로 이어지는 19세기의 재발견은 그의 또 다른 화두이다. 그에 의하면 이 시기야말로 식민지적 왜곡과 서구적 변신을 당하기 이전의 민족전통과 창조의 역량을 평가하는 終審의 자리가 된다.

비록 이 시대를 지배하는 이미지가 부재와 결핍이긴 하지만 완당이라든가 혜강을 거쳐서 근대계몽기로 이어지는 정신적 맥락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이 어두운 시대에서 우리가 읽어내야 하는 것은 고정된 텍스트가 아니라 현상이나 징후라 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구적인 문학장르 의식을 뛰어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문학’에 대한 보다 본질적인 성찰만이 17세기에서 19세기 한문학적 성과들을 더욱 풍요롭게 조감할 수 있게 해줄 수 있지 않을까.

이를테면 그는 19세기 문학의 통속화를 지나치게 폄하해버리는 감이 없지 않다. 이 시기 문학의 통속화 경향이 부분적으로는 17세기 이후 지속적으로 확장해 온 독자층의 존재에 의해 이룩된 것이라면, 이러한 통속성 자체가 민중성과 명확히 분리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19세기가 신유옥사로 시작된 것인 만큼, 종교적인 사유체계 속에서 근대성의 ‘더 많은’ 징후를 찾아내는 일도 절실하다. 이 같은 의문들이 하나둘 실마리를 찾아갈 때, ‘민족이 다함께 읽을 문학사’에 대한 그의 오랜 염원이 실현될 수 있을 터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