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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미그란스’ 역사학계 화두로 떠오르다
‘호모 미그란스’ 역사학계 화두로 떠오르다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1.11.08 10: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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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대회_ 제54회 전국역사학대회 '국경을 넘어서-이주와 이산의 역사'

'호모 미그란스(Homo Migrans)'가 드디어 역사학계의 화두로 떠올랐다. 지난 4일부터 이틀간 고려대에서 개최된 제 54회 전국역사학대회 '국경을 넘어서-이주와 이산의 역사'가 신호탄이다. 공동주제서 자유패널까지 온통 연관된 내용으로 발표가 이어졌다.

김경현 제54회 전국역사학대회장(고려대·서양사)는 이번 학술대회가 그간 좀처럼 역사학이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주제에 무게를 실은 것은 "세계와 한국의 최근 현실을 진지하게 성찰해 착상한 것이다. 역사학도 정착 대신 이주에 집중하는 역발상을 통해 역사인식의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제54회 전국역사학대회의 문제의식이 고스란히 드러난 곳은 공동주제 발표회였다. 특히 기조강연을 한 정재정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의「근대 동북아시아에서의 이주와 이산」, 그리고 황혜성(한성대)의 기조발표 「왜 호모 미그란스인가?: 이주사의 최근 연구동향과 그 의미」가 눈길을 끌었다.

이주와 이산은 문명전환의 추동 인자

정재정 이사장은 "이주와 이산은 개인의 사정이나 국가의 처지에 따라 천차만별의 의미를 지니고 있겠지만, 총체적으로 보아 각각의 차원에서 역사 전환의 요인이 됐을 것"이라고 전제하면서 논의를 풀어나갔다. 정 이사장은, 이주와 이산 문제가 아직도 한국학의 주된 관심 분야로 자리잡지 못했음을 지적하면서, 분석 시각의 협소성을 극복하는 한편, 좀 더 열린 시각에서 접근하길 기대했다. 그는 "한국에서 격렬하게 전개된 민족의 이주와 이산은 문화접변 내지 문명전환을 추동한 주요 인자였다"라고 확신했다.

정 이사장이 '기조강연'답게 문제의식의 향방을 지정했다면, 이를 최근 국내외 연구 동향과 연결하는 일은 황혜성의 몫이었다. 그는 기조발표문을 통해 이주사 연구를 '융합학문'의 관점에서 파악했다. 물론 그 핵심에는 '공생하는 인간'이 놓여 있었다. 그는 "'이주'라는 렌즈를 통해 역사를 바라보았을 때 계몽사상 이후 형성된 단선적인 '진보의 역사'에서 간과돼왔던 역사의 다양한 면모들이 드러난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새로운 사유의 가능성'을 이주사 연구가 제시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근대의 시간대를 통과하면서 한국인들이 격심하게 마주쳐야 했던 이주, 이산은 만주, 일본, 미국 등지로 진행됐다. 홍선표(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는 「근대 조선의 미주 이민과 민족운동」을 통해 이주의 현실적 모습을 확인하고자 했다. 그는 미주 한인의 생활과 한인사회의 형성, 미주한인의 민족운동과 특성을 짚었다. 그에 의하면, 1941년 12월 미일전쟁 발발은 미주한인들에게 식민지 한국의 해방이라는 자신들의 열망을 현실화할 수 있었던 역사적 사건이었다. 즉, 미주한인들은 국방공채 매입과 국방경위대의 결성, 미군 자원입대와 납코작전 참가 등 다양한 형태로 미국정부를 도우며 한국의 독립에 기여했다. 홍선표는 이를 두고 "이것은 위기에 처한 미국정부를 도움으로써 미국사회 내 미주한인들의 입지와 위상을 제고하기 위한 방편"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사실 이주와 이산이 식민지시기 대거 발생했다는 측면에서 논의는 한국사학회가 주관한 '한국사회 식민주의의 내면화와 이산' 부분에서 활발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이 세션에서는 일본 학자들까지 참여해 논의를 확장한 점이 돋보였다. 조경희(성공회대)는 「재일조선인의 국적과 지연된 '탈식민'」을, 池田貴夫(홋카이도 개척기념과)은 「사할린 잔류 한인의 생활사」를, 영도광기(사가대)는 「중일전쟁기 북경의 조선인 커뮤니티 통제와 '화북반도인협회'」를, 이령경(리츠메칸대)는 「이산과 분단의 굴레」를 각각 조명했다. 한편 김득중(국사편찬위원회)은 「국가형성기 한반도에서의 디아스포라-월남, 월북과 피난의 정치적 영향」이라는 흥미로운 논문을 발표했다.

조경희의 문제의식은 재일조선인의 국적, 특히 '조선적'을 둘러싼 해석과 처우과정을 통해 한일 간에 형성된 식민주의적 구도를 확인, 검토하는 데 맞춰졌다. 특히 '위험한 국민'으로 분류했던 한국 정부의 재일조선인 처리 방식이 "재일조선인 국적 문제의 타율적 성격을 강화시켰다"라고 지적한 부분은 음미할 만하다. "지역적 기호를 나타내던 '조선적'은 어느새 냉전논리의 역학관계 속에서 정치와 해석으로 장으로 변형됐다"라는 분석이다. 이들 '입국 거부를 당하고 있는' 재일조선인의 존재야말로 오늘날 대한민국의 역사적 정체성을 거꾸로 조명하는 것이라는 그의 결론은 숙연한 일침이기도 하다.

상층·중간층은 정치적 이유, 하층은 두려움 때문에 월남

한국 보수집단의 기저 가운데 한 층은 분명 '월북' 피난민들일 것이다. 김득중의 논의가 이 문제를 깊게 파고들었다. 해방 직후 남한은 단기간 내에 엄청난 인구 유입을 경험한다. 해방후부터 한국전쟁이 끝나는 시기까지 약 101만~139만 명 정도의 인구가 북한에서 남하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김득중에 의하면, 이들의 남하는 계급적 차이를 보인다. 북한의 상층·중간층은 주로 해방 이전이나 전쟁 이전에 월남했으며, 하층은 주로 전쟁 중에 남하했다. 상층·중간층은 주로 정치적·사상적 이유나 농지개혁 등의 재산몰수 때문에 남하했지만, 하층의 경우에는 구직이나 국군의 피난 권유, 전쟁 시기 공중 폭격과 원자폭탄 투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남하한 경우가 많았다. 분단이 형성된 1945년 하반기부터 일찍 남하하기 시작한 고학력 인텔리들-정치인, 종교인, 군인들은 미군정과 대한민국 정부의 요직에 진출했다. 월남 동기, 교육 수준이나 경제적 수준에서 월남인 내부의 계급차가 있었음을 확인한 것은 작지만 의미있는 수확이다.

이번 논의들은 지리적으로는 유럽, 서아시아와 동남·동북아시아, 그리고 미주대륙을 아우르는 한편, 특히 한국사는 신라의 이주 고구려인 문제에서 오늘날의 탈북자 문제에까지 걸쳐 있다. 세부 발표 주제들의 키워드는 이주와 이산, 이로 인해 발생하는 정체성, 다문화주의 문제 등이다. 문학 연구 등에서 이미 활발하게 논의가 진행된 디아스포라 연구가 역사학계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구체화될지 주목된다.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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