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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년 연행기록 외부지원 없이 3년간 디지털화 한 이유
700년 연행기록 외부지원 없이 3년간 디지털화 한 이유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1.10.17 14: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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燕行錄 55GB 대용량 USB 내놓은 임기중 동국대 명예교수
 자신이 고안한 대용량 USB 연행록총간을 들고 있는 임기중 교수.

박지원의『열하일기』와 같은 '연행록'은 모두 얼마나 될까. 그리고 그 모든 연행록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게 만든다면? 정보화 시대를 십분 활용, 컴퓨터를 활용해 연구자들이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게 한다면?

임기중 동국대 명예교수(73세·고전시가)는 2003년 동국대에서 정년퇴임하면서 이런 구상을 본격적으로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2001년『연행록 전집』100권을 발간한 데 이어, 2004년에 『연행록해제』1~2집을 펴냈고 2008년에 속집 50권을 펴내는 영인본 작업에 주력해왔던 터라, '언제 어디서나' 연구자들이 손쉽게 자료에 접근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일은 그리 낯선 작업이 아니었다. 그는 이것을 "평화와 공영을 지향하는 동아시인들의 소통과 교류라는 화두를 가지고 연행록의 발굴작업에 착수했다"라고 『燕行錄叢刊』 서문에서 밝혔다.

연행록은 고려부터 조선까지 사신이나 수행원이 중국 연경을 방문하고 남긴 공식·비공식적 외교 기록이다. 실무를 담당한 書狀官이 조정에 제출한 공식 기록을 포함, 연행에 참가한 지식인들이 사적으로 기록한 것까지를 모두 '연행록'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임 교수는 고려 이승휴의『賓王錄』(1273)에서부터 구한말 김동호의『갑오연행록』(1894)까지, 시간적으로는 600여 년의 연행기록 455종을 'USB'(임 교수는 이를 USB라고 말하지만, 검색 프로그래밍된 데이터베이스 외장하드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하다)안에 모두 집어넣어 최근 학계에 공개했다. 영인본 페이지를 스캔한 이미지만 6만6천여 장, 수록 정보량은 55GB 분량이다. 그는 "1960년대부터 연행록 관련 자료를 수입, 편찬해왔다. 50년의 공력을 여기에 쏟아부었다. 특히 정부 지원 없이 개인이 수행한 헌신적 작업이다"라고 말한다.

연행록 영인본 작업이 뒷받침 됐기 때문에 실제 임 교수가 연행록 디지털화에 쏟은 시간은 3년으로 단축될 수 있었다. (주)누리미디어와 함께 진행한 이번 디지털화 작업으로 중국학, 중문학, 한문학, 역사학, 국제관계학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가 손쉽게 원문 검색을 할 수 있게 됐다. 세기별, 왕대별, 저자별로 찾아볼 수 있게끔 구성했고, 작품, 작자별로 使行 연도를 색인화했다. 기사와 목차별 검색도 가능하다. 특징적인 것은 조선 사신 중국 왕래표를 만들어 덧붙였다는 것. 1천800여 차례 5천500여명의 명단을 찾아볼 수 있게 했다. 이해를 돕기 위해 『通文館誌』,『同文彙考』를 검색할 수 있게 했다.

1천800여 차례 연행 정보 무료 공개

임 교수의 이번 『연행록총간』데이터베이스는 기존 간행책자의 문제점을 해소했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 우선 기존 책자에서 중복되고, 연행록으로서의 가치가 떨어지는 등 문제가 있는 내용을 골라내고, 여러 판본 가운데 원본이라고 생각되는 판본을 선정하는 정본화 작업을 진행해 최종 455종의 연행록을 결정했다. 기존 책자에서 연대순으로 배열되지 못한 내용들을 연행 연대순 등 다양한 방법으로 배열해 이용자들이 찾아보기 쉽도록 했다. 또한 새로 발굴한 연행록 10여 종을 추가한 것도 놓칠 수 없는 부분이다.

임 교수는 종이책이 아니라 디지털 방식으로 정보를 제공한 이유를 크게 세 가지로 압축한다. 첫째, 국내외 모든 수요자들의 다양한 욕구를 온라인상에서 일시에 충족할 수 있는 손쉬운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서다. 둘째, 개인 수요자 누구나 공공도서관에서 경제적 부담 없이 쉽고 자유롭게 열람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그는 USB(외장하드 형태), 10장으로 구성된 DVD 형태, 그리고 인터넷 검색(www.krpia.co.kr) 형태라는 세 가지 접근 루트를 제시했다. 셋째, 7백년에 이어지는 연행록의 역사적 가치를 제고하는 동시에 이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할 필요가 있어서다.

사실 이 세 번째 이유는 좀 더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임 교수는 "700여 년간 계속된 국제관계 기록물은 세계 그 어느 나라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연행록이 유일하다. 연행록은 단순한 개인 기록이 아니라, 그 시대 최고 지식인이 자신을 둘러싼 외부 세계를 만나 타자를 바라보고, 이해하려고 한 치열한 노력의 기록"이라고 평가한다. 타자를 기록하는 방식, 타자의 세계를 문자의 세계로 축조해내는 지혜의 기록이라는 설명이다.

세계문화유산은 영향력, 시간, 장소, 인물, 주제, 형태, 사회적 가치, 보존 상태, 희귀성 등을 기준으로 선정하고 있다. 연행록은 13세기에서 19세기까지 700년에 이르는 동북아시아의 시간적 기록이며, 등장 인물은 가히 셀 수 없을 정도다. 이 기록물의 가치는 '현재진행형'이다. 동북아시아의 정치적 역학관계에서 다양한 문명의 수용과 이동 과정, 문물의 수용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임 교수는 이 연행록이 당대 조선사회에 가져다 준 가장 큰 변화는 '사물을 인식하는 방법'에 있다고 지적한다. 18세기가 가장 격변의 시기였다면, 사물을 철저하게 파악하는 중국의 인식태도가 이 시기 크게 확산된 것도 특징이다. '物名攷'와 같은 책들이 등장한 데서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누락 가능성이 있지만 임 교수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조선 사신들이 중국에 다녀온 횟수는 13~14세기에 119회, 15세기에 698회, 16세기에 362회, 17세기에 278회, 18세기에 172회, 19세기에 168회, 모두 1천797회에 이른다. 한 번 갈 때마다 正官이 보통 30여 명이고 일행이 300명 이상 되는 때가 많았다. 3회 왕복에 무리 중의 한 사람이 1종씩만 연행록을 남겼어도 5백여 종이 전해져야 한다.

그렇다면 현재 전해지고 있는 연행록의 시대별 분포는 어떻게 될까. 13세기가 1종, 14세기가 2종, 15세기가 14종, 16세기가 49종, 17세기가 169여 종, 18세기가 102여 종, 19세기가 124여 종으로 나타난다. '기록'만으로 따진다면 17세기 이후 연행록이 주를 이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그대로 조선사회에 문화적, 문명적 자극을 미쳤으리라는 것은 연암의 경우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세계기록유산 등재와 한글 번역 과제

연행록은 최근 들어 중국학자들 사이에서 폭넓게 주목받고 있다. 상해 푸단대 문사연구원은 38종의 연행록을 '외부의 시선으로 본 중국'이라는 기획의도로 중국에서 출판하기도 했다. 일본 교코대 역시 연구자 30여 명이 꾸려져 본격적인 연구 작업에 들어갔다. 미국의 UC버클리, 하버드대 등에서도 연행록 속집을 구하고 있다. 북한 학자들도 연행록의 주체사상에 관심을 보이고 있지만 자료를 구할 수 없어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후문이다. 그가 애써 모은 연행록은 이제 한글 번역 작업을 통해 더 많은 연구자들에 의해 조명될 차례다. 그런 노력이 이어지지 않는다면, 연행록 연구는 중국학자들의 공이 될 수도 있다. 학계가 긴장해야할 이유다.

"연구자를 비롯해 관심 있는 모든 독자들이 연행록을 무료로 볼 수 있게 3년간 노력했다. 700년에 이르는 연행록 기록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라고 말하는 임기중 교수. 국어국문학회장을 역임했으며, 동국대 기획처장 시절 학내 행정 전산화를 이끌기도 했다. 지은 책에는 『연행록 연구』,『한국가사문학 원전 연구』,『광개토왕비 원석초기탁본집성』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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