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9 09:25 (월)
탈시간적 장소성과 새로운 역사성을 찾아서
탈시간적 장소성과 새로운 역사성을 찾아서
  • 이창남 한양대 HK교수
  • 승인 2011.09.19 13:3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포르투갈 포르투 국제여름학교ㆍ국제학술회의 참관기

이창남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HK교수
지난 여름의 끝자락에 포르투갈 포르투에서 '경계, 전치 그리고 창조 - 현재성을 질문함'이라는 주제로 8월 29일부터 9월 4일까지 국제여름학교ㆍ학술대회가 열렸다. 석박사과정 학생들의 여름학교와 학자들의 학술대회가 병행되는 자리였다. 대회에는 파리 8대학, 대만 교통대학, 포르투갈 포르투 대학 그리고 미국, 브라질 등의 대학에서 주로 참석했다. 이 대회는 2년에 한 번씩 몇 개 주요 거점 대학의 연구그룹들이 순차적으로 개최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대회 준비위원의 한 사람인 알랭 브로사 파리 8대학 교수는 대만에서 실내에서 신발을 신는 것이 나은지 벗는 것이 나은지 토론하는 데서부터 이 대회가 시작됐고, 이후 15년 간 계속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고 했다. 동서양의 문화적 차이에 대한 토론에서 비롯된 이 대회의 성격상 국가간, 문화간, 인종간 경계의 문제는 지속적인 토론과 교류의 주요 이슈가 되고 있다.

포르투갈의 제 2도시인 포르투에서 열린 이번 국제여름학교ㆍ학술회의는 특히 포르투갈이 IMF 관리에 들어가는 시기와 우연히 겹쳤다. 당연히 외부지원이 극히 미미한 가운데 대회를 취소할 위기까지 갔지만, 대회장인 으제니아 빌레라 포르투대 교수와 준비위원들은 예정대로 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주최 대학인 포르토대에서 제공할 수 있었던 것은 학생용 기숙사, 점심 샌드위치, 강의실과 강연장 등 극히 제한된 것에 불과했다. 파리 8대학, 대만 교통대학 등과 오랜 기간의 교류를 통한 학문 그룹의 공동체 의식이 없었다면, 사실상 이 정도 규모의 국제여름학교?학술회의를 개최하는 일은 꿈꿀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1백여 명이 넘는 내외학자들과 학생들이 파리, 대만, 오스트리아, 브라질, 미국 등에서 속속 모여들었고, 포르투갈의 경제위기는 오히려 대회를 더욱 열띠게 했다.

중점적인 이슈는 무엇보다도 지리정치적, 정신적, 젠더적 차원의 ‘경계’의 문제였다. 현존하는 경계들을 너머 탈시간적인 헤테로토피아의 장소성과 이를 통해서 가능해지는 새롭고 창조적인 역사 혹은 역사상에 대한 모색이 관건이었다. '현재시간 옆에 창조를 위한 다른 시간이 있는가? 문제적 경계들을 넘어서는 다른 공간이 있는가?' 대회주제문에서 제기된 이러한 질문을 중심으로 학자들과 학생들은 4개 패널을 중심으로 열띤 발표와 토론을 벌였다. 몇 가지 주목할 만한 발표들은 이렇다.

사카이 나오키 코넬대 교수는「번역과 경계짓기」라는 주제로 내셔널과 트랜스내셔널의 쟁점을 검토했다. 복수적 언어들 속에 민족언어의 단일성에 대한 전제를 칸트적 문맥에서 일종의 ‘규제적 이념’으로 규정하고, 그 사실을 알 수 없는 것으로 설정함으로써 경계구획짓기의 틀이 되는 언어의 단일성과 민족국가의 정체성을 재고하는 글이었다. 그에 따르면 번역은 바로 이러한 언어의 단일성과 복수성의 전제 위에서 작동하고 있는데, 그 작업은 경계를 넘는 작업이면서 동시에 경계를 긋는 작업이다. 바로 이러한 번역의 역학 속에 작동하는 경계논리를 성찰함으로써 그는 민족언어와 연동된 내셔널리티를 트랜스내셔널리티에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라는 점을 논증했다.

알랭 브로사 파리 8대학 교수는 「누가 벤야민을 죽였는가?」라는 흥미로운 글을 발표했다. 특히 망명중인 벤야민을 둘러싸고 그를 죽음으로 몰고간 경계의 문제를 천착했다. 말하자면 벤야민을 1940년 프랑스 국경 지대의 난민의 한사람으로 고찰하면서 당시 경계정치를 반성적으로 고찰한 셈이다. 브로사에 따르면 벤야민의 죽음은 단순히 나치의 문제만은 아니다. 오히려 비시정부하의 파리 국경 정치의 문제였던 것이다. 이러한 논지로 전개된 그의 발표는 경계의 문제를 일국의 파쇼 정부에만 소급시키는 태도를 경계하면서 오늘날 상존하는 지리정치적 경계들(geo-political border)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고, 그에 대해 깊이 숙고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미국 드렉셀 대학의 줄리 모스토프 교수는 부드러운 경계와 견고한 경계에 대한 토론을 시도했다. ‘안전’이라는 논리하에 이루어지는 경계긋기가 유발하는 국제정치적인 차원의 부정성을 비판하면서 ‘부드러운’ 경계를 일종의 대안으로 제시하고, 트랜스내셔널 시민권과 글로벌 도시를 제안하고 있다. 국민국가의 주권과 시민권과 관련된 이러한 주제는 현실정치와 관련해서 앞으로도 계속적인 토론이 이루어질 주요한 이슈가 됐다. 이어서 대만 교통대학의 류안 홍추 교수는 시사적인 차원에서 경계의 문제에 접근했다. 그는 인터넷이 가져온 경계의 해체와 그에 대한 중국 당국의 통제시도와 관련한 발제를 했다. 특히 그는 경계를 넘는 소셜 네트워크의 민주화 기능을 강조하면서 근래 아랍권에서 이루어지는 민주화의 예를 강조했다. 지면 관계상 극히 일부만 소개할 수 밖에 없어 아쉽지만, 힉생들의 발표 가운데에 후기 마르크시즘과 데리다를 비롯한 해체론의 정치적 관점 등에 대한 관심을 확인할 수 있었고, 유럽, 대만, 브라질의 현실과 연관된 현재적 이슈들이 많이 거론됐다.

로만어 계열의 학자 그룹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학술대회여서 포르투갈어, 프랑스어, 영어가 공용어로 사용됐다. 언어의 경계로 인해 필자가 들을 수 없는 발표들도 있었지만, 영어 일변도의 최근 국면에서 그런 경계의 체험은 오히려 유쾌했다. 프랑스어로 발표한 한 학자는 발표 전에 간단한 영어로 이렇게 말했다. “여기 계신 분들 가운데 프랑스어를 모르시는 분들께 미안합니다. 저는 영어를 못합니다. 제 발표는 짧습니다. 다소 지루하시겠지만 조금만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참가자들은 유쾌한 웃음으로 그를 지지했고, 이어진 그의 발표에서 ‘의미’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말의 톤과 제스처가 전하는 ‘경계를 넘는’ 열정과 힘은 무엇보다 강렬하게 다가왔다. 그것은 ‘영어’라는 언어의 힘에 기대서 편의적으로 ‘경계넘기’와 ‘세계화’를 주장하는 속류 세계시민주의자들과는 완전히 궤를 달리하는 것이었다.

대회를 통해 학문후속세대들의 폭넓고 진지한 관심을 확인할 수 있었고, 현재 국제적 연구의 동향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경제적 보조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국제적 현안과 관련된 인문학적 성찰을 수행하는 대규모의 여름학교와 학술대회를 유치할 수 있는 학문공동체의 보이지 않는 힘을 확인한 것은 가장 큰 수확인 듯하다. 참가자 모두가 십시일반하는 이런 경우가 늘 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불가능한 일이 가능해지게 한 이번 포르투갈 학술대회의 특수한 정황은 무엇보다도 오랜 여운을 남기는 듯하다.  

 이창남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HK교수
 필자는 베를린자유대에서 박사를 했다. 저서로는 『아테네움 시대의 문학』, 『예술의 시대』(공저) 등이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