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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동시대의 사상가'로 부를 수 있는 이유
그를 '동시대의 사상가'로 부를 수 있는 이유
  • 심세광 철학아카데미
  • 승인 2011.09.19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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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_ 미셸 푸코 지음|오르트망 옮김, 『안전, 영토, 인구-콜레주드프랑스 강의 1977~78년』(심세광 외 옮김, 도서출판 난장, 2011.8)

푸코의 저작은 한국어로도 이미 거의 다 번역되어 있지만 그가 1971년부터 작고하는 해까지 콜레주드프랑스에서 강의했던 내용들은 프랑스에서도 아직 13개의 강의 중 9개만이 강의록의 형태로 출간돼 있는 상태다. 푸코에 대한 논의는 새로운 강의록이 현재진행형으로 출간될 때마다 재점화되는 양상을 보인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그를 '동시대의 사상가'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주된 이유는 그의 강의에 등장하는 다양한 개념들 중 '통치성' 개념과 '호모 에코노미쿠스' 개념이 미국발 금융위기로 인해 촉발된 신자유주의 비판이라는 맥락에서 주목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오늘날 우리가 실제로 발을 담그고 있는 신자유주의 사회를 극복해 어떻게 예속된 주체로서가 아니라 해방된 주체로서 살 수 있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푸코는 인구에 대해 논의하면서 '통치/통치성' 개념을 환기시킨다. 서구의 전통에서 애초에 통치(gouvernement)라는 말은 비정치적인 차원에서, 즉 개인이나 가족의 차원, 일상생활의 차원에서 방대한 외연을 가지고 논의되고 실천됐던 것이었다. 예컨대 스스로를 잘 건사하고 가족 등 주변 사람들을 잘 건사하는 것 등의 차원에서 통치성의 문제가 제기된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통치가 인구의 차원으로 확대되고 공적인 것과 국가의 차원으로 바뀌게 되면서 오늘날의 '근대국가', 즉 '공화국'을 지탱하는 핵심적인 테크놀로지로 출현하게 됐다. 푸코는 이러한 통치를 근대 자유주의와 동일시하고 이러한 자유주의 통치성과 생명관리정치는 한 몸이라고 주장한다.

 생명관리권력, 생명관리정치

잘 알려진 것처럼 푸코는 『감시와 처벌』과 『앎의 의지』에서 생살여탈권으로 대표되는 주권권력으로는 더 이상 설명이 불가능한 17-18세기의 권력 현상들을 분석하며, 개인의 신체를 생산성이라는 목적에 맞게 분해해 훈련시키는 규율권력을 논한다. 이때 그는 각각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권력관계를 연구하는데 이는 미시권력의 장에 관한 분석이었다. 반면 『안전, 영토, 인구』에서는 개인의 신체에 대해 행사되는 권력뿐만 아니라 종으로서의 인간, 즉 인구라는 집단적 신체에 대해 행사되는 권력을 논하게 되는데, 인구 전체를 국가가 조절·관리·통제하는 이러한 권력을 푸코는 생명관리권력이라 부른다. 이를테면 국력의 한 요소라 간주되는 인구수의 증가, 혹은 유지를 위해 산아정책이 시행되기도 하며, 출산을 할 것이냐 말 것이냐의 문제가 국가적 차원에서 개인의 실천에 개입하는 것이다.

푸코는 생명관리권력의 기원을 유대문화와 그리스-로마 문화가 뒤섞여 만들어 낸 그리스도교의 사목제도에서 찾고 있다. 양떼를 관리하는 기술, 즉 각각의 양을 돌봄과 동시에 양떼 전체를 돌보는 기술, 그리고 자기 자신을 제어하고 조절하는 기술이 교묘하게 결합돼 결국에는 순수한 복종상태를 전제로 그들의 생물학적인 측면에까지 세밀하고 정밀하게 개입해 관리하는 생명관리권력이 됐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거시권력의 장으로 눈길을 돌리며, 근대국가의 생명관리정치를 논하게 된다. 생명관리정치는 주권권력과 규율권력 그리고 생명관리권력을 행사함으로써 이루어지는데, 세 가지 형태의 권력행사방식은 상호작용하기도 하고 때에 따라서는 병행되기도 하며 대립되기도 한다. 새로운 권력행사방식이 발명됐다고 해서 옛 방식이 완전히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니며, 다만 그때그때 상황과 공간에 맞춰 더 효과적인 권력행사방식이 선택되거나 혹은 동시에 행사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 그리고 호모 에코노미쿠스

신자유주의는 고전파 자유주의와 매우 다르며 신고전파 자유주의와도 다르다. 고전파 자유주의는 시장을 교역[교환]의 장소로 여겼으며, 이 과정에서 소위 '적정가격'이 '자연스럽게' 형성된다고 믿었기 때문에 '자유방임', 즉 시장에 대한 국가의 개입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주장한다. 반면 신고전파 자유주의는 시장을 경쟁의 장소로 여겼고 이러한 생각은 신자유주의, 즉 독일의 질서자유주의와 시카고 학파에게 전승된다.

독일의 질서자유주의자들은 경쟁을 시장의 '본질'로서 파악했지만 '자연스러운 것'이라 여기지는 않았기 때문에 경쟁이 인위적으로 생산돼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러기 위해 '자유방임'이 아닌 국가의 개입을 주장했다. 여기서 말하는 국가의 개입은 인위적으로 경쟁을 생산하기 위한 개입이므로, 케인즈주의적 개입, 즉 '사회보장의 실시' 등 복지국가 완성을 위한 개입이 아니라 자유로운 경쟁이 일어날 수 있는 제도적 틀을 마련하는 것, 예컨대 정년의 폐지와 성과급의 도입, 그리고 독과점의 규제 등을 말한다. 또 사회의 모든 곳에 시장원리와 경쟁원리를 침투시켜, 사회구조의 기초단위를 '기업'으로서 파악하고자 했다.

미국에서는 유럽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자유주의를 받아들이게 되는데, 여기서 탄생한 시카고 학파가 오늘날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신자유주의에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시카고학파는 질서자유주의자들보다 한 발짝 더 나아가서 '개인'까지를 '기업'으로 파악하고자 했으며 '노동력'을 '능력자본'으로 대체시킨다. 이것이 바로 인적자본론이다. 이에 따라 교육이나 양육은 투자로 간주되며 심지어 부모가 자식과 함께 보내는 시간까지도 경제적으로 환산할 수 있는 투자로 여겨지게 된다. 결국 노동자들은 자기 자신에 투자하고 자기의 비용을 관리하는, 요컨대 시장원리를 내면화해 자기를 통제하고 이에 따라 합리적으로 행동하며 최대의 이익을 추구하는 '자기 자신의 기업가', '경제적 주체', 다시 말해 '호모 에코노미쿠스'가 된다. 신자유주의 통치는 이러한 '호모 에코노미쿠스'만을 사회 속에서 인정하며, 시장원리와 경쟁원리를 제대로 내면화하지 못한 개인들을 사회 밖으로 내던진다.

호모 에코노미쿠스와 주체화의 가능성

푸코는 『쾌락의 활용』과 『자기배려』에서 '예속화(assujetissement)'와 '주체화(subjectivation)'를 구별해 성찰하면서 '예속화'로부터 '주체화'로 나아가도록 우리를 종용한 바 있다. 밖으로부터 주어지는 통치원리를 내면화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구축하는 것이 '예속화'라면 '주체화'는 바깥으로부터의 통치원리에 의하지 않고 그것에 비판적인 자세를 취하며 스스로가 스스로를 구축하는 것을 일컫는다. 이러한 '주체화' 과정은 내가 누구인지를 묻는 방식이 아니라 내가 누구일 수 있는지를 상상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푸코는 대항품행(contre-conduite)이라는 방식을 제안하고 있는데, 이는 바깥으로부터 강요되는 기존의 룰, 즉 호모 에코노미쿠스에 요구되는 특정한 품행으로 개인을 인도하고자 하는 호명을 단순히 거부하고, 요구되는 품행을 하지 않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조금 비틀어 보든, 아니면 완전히 뒤집어 보든지 간에 그것과는 다른 어떤 품행을 대항적으로 실천하는 것, 즉 호모에코노미쿠스와 다른 자기 자신을 상상하고 창조하며 구축하는 적극적인 작업이다. 신자유주의가 개인의 아주 사소한 부분에까지, 비경제적인 부분에까지 침투해 인간의 삶 전체를 맹목적 경쟁이 지배하는 경제적 삶으로 환원시켜버리는 절망적 상황이기 때문에, 푸코는 일상의 세세한 부분에서부터 이와 같이 신자유주의가 요구하는 예속적 품행을 거부하고 다른 방식으로 행동함으로써 '예속화'가 아닌 해방적 '주체화'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하려 한 것이다.

심세광 (사)철학아카데미 연구원
필자는 성균관대를 졸업하고 파리10대학교에서 미셸 푸코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공저로 『들뢰즈 사상의 분화』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미셸 푸코의 휴머니즘』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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