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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탄과 구원의 이중적 책략을 위한 辨解
파탄과 구원의 이중적 책략을 위한 辨解
  • 최현식 인하대·국어교육과
  • 승인 2011.09.06 09: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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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_ 『아첨의 영웅주의–최남선과 이광수』(서영채, 소명출판, 2011.6)

“글을 쓰는 이유는 죽음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지키기 위해서다”라는 A. 지드의 말은 최남선과 이광수의 삶과 글쓰기에 겹쳐질 때 그 울림이 더욱 각별해진다. 육당과 춘원에게‘죽음’이란 단연‘민족’의 패배와 좌절이었다. 그들의 문명론이‘소년’과‘청춘’세대의 궁극을 개성의 획득과 실현보다‘신대한’(국민국가)과‘대황조’(민족공동체)의 건설과 회복에 둔 것도‘죽음’을 초극하기 위한 당위적 행위였다. 그러니까 그들은‘무엇인가’를 오로지 민족의 광영과 영원함에 일치시킴으로써 스스로를 민족의 사제인 동시에 희생양으로 밀어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끝내‘민족’의 구원을 명분으로 뭇 인민을 대동아공영의 실현을 축도하는 번제물로 바침으로써 자신들의‘민족’과‘자아’모두를 기각하고 파탄시켜 버렸다. 이들의 비극은 당대의 죄인으로 수감됨을 넘어, ‘민족의 죄인’(친일의 대표)과‘죄인의 민족’(다중의 친일) 사이를 오가며, 식민지 흔적 지우기와 민족적 순결의 재구에 소용되는 기억의 번제물로 여전히 호출된다는 사실에 존재한다.

침묵의 밀약에 대한 도전적 문제제기

최근 학계의 관심은 이들의‘친일’자체보다는 그것을 구성하는 내면적·외부적 원리와 조건의 탐색, 민족을 삭제 또는 배반하는 민족주의의 실체, 민족의 숭앙과 파괴의 정점에 선 불우한 영혼의 진실을 밝히는데 집중되고 있다. 물론 이런 경향은 이들의 죄와 벌을 순치하려는, 무책임한 면책 특권의 실현보다는, 양 극단의 삶을 오가며‘민족’을 섬겨야 했던 심리적 외상의 복합성과 발화되지 못한 어떤 목소리를 들어보려는 방법적 대화에 가깝다. 사실 이들의 불발된 내면의 발화에 대한 관심은 그 자체가‘협력’과‘용서’의 맥락을 부감시킨다는 점에서 무관심과 저지의 영역으로 늘 변방화돼 왔다.

배신의 윤리에 대한 성찰을 표나게 내세운 서영채 교수의『아첨의 영웅주의–최남선과 이광수』는 이런 사치스런 동시에 옹색한 침묵의 밀약에 대한 도전적 문제제기라 할만하다. ‘비윤리성의 윤리성’으로 요약되는 육당과 춘원에 대한 저자의 대화는‘사실들의 배후에 놓인 진실’의 탐침과 그를 통한‘사실’들의 또 다른 발화를 목적한다. 요컨대 육당과 춘원은 그들의 내밀한‘진실’은 물론 그들에 관련된‘사실’로부터도 배제된 이중적 소외의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이 서교수의 판단인 것이다.

서 교수가 객관과 허구에 방점이 찍히는 논설과 문학보다는 자아의 주관과 열정이 투사된, 그러면서도 대중의 지지를 호소할 수 있는 고백록과 여행기를 대상 텍스트로 삼는 이유도 이와 무관치 않다. 교술 장르에 속하는‘고백록’과‘여행기’는 자아의 정신과 행위의‘사실성’못지않게‘내면성’이 족출하고 경합하는 글쓰기에 해당된다. 그러니까 민족의 배신 이전과 이후의 제 양상들, 이를테면 주체의 자가당착과 그것의 합리화를 위한 논리 구축, 그를 통한 민족에의 헌신에 대한 동기의 진실성 획득 및 확인, 그 결과로서 비윤리성의 윤리성 보장, 다시 말해 죄와 벌의 거절과 새로운 시대에 합당한 민족의 재전유 과정이 비교적 선명히 드러난다고나 할까.

이런 부분들을 주목한다면,이 책의 핵심은 역시‘친일’행위에 따른 파탄과 구원의 서사를 다룬「단군과 만주, 아첨의 영웅주의」와「이광수와 유머로서의 대동아공영권」, 육당과 춘원의‘민족주의’기획과 실제를 다룬「기원의 신화를 향해 가는 길」과「합리성과 숭고」이다. 내 입장에서 보자면, 춘원과 육당의‘사실’과‘진실’이 행복하게 조우하는 글들은 백두산과 금강산 기행을 다룬 앞의 논문 두 편이다.

육당은 성스런 국토의 발견을 통해 민족을 숭고한 대상으로 승압했다는 것, 이에 비해 춘원은 합리적·실용적인 태도로 국토에 인간화된 자연의 미덕을 부과했다는 것. 이 낭만적 열정이 일제 말 육당의‘현자의 불안’을 낳는 현실주의적 태도로 변환되며, 그 냉정한 합리성이 일제 말 춘원의 성자적 태도, 즉 규범적 절대성을 실천하는 구도자의 성정으로 변환된다는‘사실’과‘진실’의 변증법은 과연 이들의 민족주의를 향한 동기의 순수성을 구원하는 바 있다.

그러나 우리는 내면적 진실의 핵심에 해당하는 동기의 순수성이야말로 그들의 민족주의가 파탄을 구가하게 되는 결정적 요인이 아닐까 의심해봄직하다. 자신들을 가장 적극적인 민족의 배신자로 몰아넣음으로써 죽음을 대가로 황국신민이 되거나 민족의 영속을 떠안은 인민들의 민족에 통합되거나 그 주위를 배회할 자격을 얻는다는‘비윤리성의 윤리성’이 성립하는 것도 동기의 순수성과 그 실천의 일관성이 전제되지 않는 한 불가능한 것이다.

‘비윤리성의 윤리성’은 언뜻 춘원과 육당의 어떤 형태로든지의 민족주의를 구원할 것 같지만, 결국은 파탄으로 몰아가는 결정적‘불륜’이라 생각한다. 그들에게는 추상적이며 가치지향적인‘민족’은 있었지만, 그것을 구성하는 인민들의 육체와 정신, 이것들에 현실성과 구체성을 건축하는‘체제’에 대한 사유와 고뇌가 거의 전무했음을 우리는 안다. 요컨대‘민족’은 절대주체의 권좌를 틀어쥐었지만, ‘민족’의 서사를 구성하고 실천하는 개개의 구성원들은 지속적으로 타자화됐다는 것. 그러니 당대의 식민지 민중들에게‘죽으라면 죽으리로다’의 황국신민의 윤리성을 주창할 권능 자체가 그들에게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민족 없는 민족주의는 그들의 논리 안에서는 성립하지만, 이들에게 타자였던 뭇 인민들에게는 따로 존재할 수 없는 허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괄호 쳐진‘타자를 향한 윤리성’

저자는 왜 춘원과 육당의‘타자를 향한 윤리성’문제를 애써 괄호친 것일까. 서론에 적은 것처럼 그동안 민족주의에 대한 생각이 두 번이나 바뀌어서일까. 나는 저자의 글쓰기가 다음과 같은 전제와 상동성을 구축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신화로서의 단군 기사는 역사의 외부에 있지만 그래서 그것이 곧 역사의 진리다”. 어쩌면 서 교수가 말하고 싶었던‘진실’은 외부로 쫓겨날수록 오히려 지성사와 문학사 안으로 더욱 휘몰아치는‘역사의 진리’로서의 춘원과 육당의 휘황한 동시에 칠흑 같은 빛과 그림자일지도 모른다. 그가 육당과 춘원의 윤리성 이전에 사실을 구원하고 있다는 판단이 성립되는 지점이다. “사실을 살아 있게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는”서 교수의 책략은 이로써 어김없이 성취됐다. 그러니 이 책에서의 춘원과 육당의 실질적 복원은 정당하고도 효과적이다. 하지만 이들의 역사적 위치와 현재적 의미를 구축하는 일은 사실과 진실, 외부와 내면, 역사와 현재 따위의 짝패 사이에서 경향적인 진동에 의해 구축되지 않는다는 것, 오히려 이 짝패들의 경합과 갈등, 응축과 팽창, 연대와 적대 등의 복합성과 다면성을 냉정하게 재구성하는 작업에서 시작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육당과 춘원의 삶과 글쓰기에 울울하게 스며있는 어떤 다성성을 청취하는 것, 『아첨의 영웅주의』가 전하는 또 하나의‘진실’이다.

최현식 인하대·국어교육과
필자는 연세대에서 박사학위를 했으며, 199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으로 등단했다. 평론집『말 속의 침묵』등과 저서 『신화의 저편—한국현대시와 내셔널리즘』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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