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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 6월 항쟁이 민족예술에 끼친 영향과 의미
[초점] : 6월 항쟁이 민족예술에 끼친 영향과 의미
  • 전미영 기자
  • 승인 2002.06.1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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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6-17 15:49:08

월드컵 열기 뒤로 6월 항쟁 15주년을 기념하는 몇 가지 행사가 ‘조용히’ 열렸다가 조용히 끝났다. 한 신문사에서는 마라톤 대회를 열었고, 몇 개의 세미나가 열렸다. 15년 전 그날을 여전히 벅찬 감동으로 기억하는 이들이 있고, 애써 2002년 월드컵의 열기를 그날과 엮어서 의미를 찾으려는 이들도 있다. 누군가는 1987년의 6월과 2002년의 6월, 서울 시청 앞 광장에 모인 수십만의 인파를 두고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15년 전 6월 절차적 민주화를 손에 넣었다면, 2002년 6월 내용적 민주화를 맛보았다”고. 그러나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 없다는 옛말이 그르지 않다. 15년 전 모인 사람들과 15년 후에 모인 사람들이 같을 리 없고, 그때의 열망과 지금의 열정이 같을 리 없다.

6월 항쟁이 사회, 정치, 경제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고 하지만, 사실 87년을 겪으면서 가장 크게 자란 것은 예술이었다. 그 거리에 서있던 지금은 중견이 되고 노년이 된 예술가들은 주저 없이 이야기한다. “그들이 우리를 변화시켰노라”고, “거리에서 우리는 배웠노라”고.

천상에서 내려온 민중예술

문학, 미술, 음악, 연극. 민족 혹은 민중이라는 이름을 이들 예술 장르 앞에 제대로 붙이기 시작한 것은 비로소 1980년대를 지나서였다. 6월 항쟁은 민족문학작가회의, 전국민족극협의회 결정이라는 구체적 결실에서부터 노래운동의 대중화, 민족 미술의 방향 설정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문학은 기록을, 노래는 추임새의 역할을 맡았다. 만장 가득한 장례 행렬에는 어김없이 춤꾼들이 나서 씻김굿을 벌였고, 미술은 걸개로 걸려 시민들을 이끌었다.

“시위대는 매일 밤마다 명동을 순회하고 있었고, 강강수월래를 하고 있었다. 을지로 쪽에서 와아와아 하다가 신세계 쪽으로 돌고 퇴계로 쪽으로 술래잡기를 하다가 다시 충무로 쪽으로 제일백화점 앞으로 그리하여 명동성당 쪽으로 원무의 무대를 바싹 좁혀 놓곤 했다. 밤길의 사람들은 새로운 기질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최루탄이 터지면 마치 불꽃놀이에 놀란 강아지들처럼 흩어졌다. 그러나 금세 다시 모여들었다. 결코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6월 항쟁을 다룬 박태순 소설 ‘밤길의 사람들’中)대표적 민중미술가 임옥상씨는 이렇게 말한다, “6월항쟁은 미술을 본래의 자리로 되돌려놓은, 제자리로 찾게 한, 그래서 만인의 것으로 만들어준 결정적 사건이었다. 아니 미술운동은 6월을 6월이게 한, 6월로 하여금 확실하게 6월의 옷을 입게 한, 입혀준 일등공신이었다. 서로는 서로에게 성격을 부여했다. 미술을 천상에서 지상으로 끌어내려 민중과 동고동락해야 하는 것으로 만들었다.” 화랑 액자 속에 나른하게 걸려있던 그림을 끌어내려 거리로 나선 미술가들은 박종철과 이한열을 그리면서 비로소 그림 그리는 희열을 맛보았노라고 고백한다. 뒤집어 이야기하면, 최루탄을 맞고 쓰러지는 이한열의 처연한 걸개그림이 걸리지 않았더라면, 6월 항쟁의 뜨거움은 조금 덜했을 지 모른다. ‘서로는 서로에게 성격을 부여하며’, 그렇게 6월 항쟁을 거치면서 한국의 미술은 한 걸음 나아갔다. 민중미술이라는 독특한 영역은 그렇게 열렸다.

그렇다면, 노래는 어떠했나. 대중문화평론가 이영미씨는 노래 분야에서 6월 항쟁을 계기로 이루어진 가장 큰 제도적 변화는 ‘노래 표현의 자유’와 관련된 것이라고 진단한다. 유신부터 5공까지, 숨돌릴 틈조차 주지 않고 이어진 독재와 탄압의 시대에 나오느니 검열이오, 부르느니 금지곡인 수많은 노래들이 ‘왜색을 띤다’, ‘시의에 부적절하다’, ‘노랫말이 유치하다’, ‘가수가 대마초를 피웠다’는 이유들로 정권과 숨바꼭질을 계속했다. 그러다가 1987년 6월 항쟁 직후 대부분의 노래들이 해금을 맞는다. 이후 민중가요 음반이 정식으로 발매돼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 수십 만장의 판매고를 올리고, 대중적인 공간에서 불리고, 많은 이들의 애창곡이 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노래는 한층 그 지평을 넓히게 된다. 이씨가 보기에 가수 정태춘의 ‘사전심의제 철폐운동’에서 90년대 서태지와 아이들이 시대를 비판하는 날카로운 노랫말 역시 80년대 노패 표현의 자유에 이어지는 자연스러운 물줄기다.

연극평론가 김소연씨가 기억하는 80년대 연극은 노동연극을 정점으로 한 민족극운동이 열었다. “80년대 초반 대학마당극의 확산을 경과하면서 전국 곳곳에 극단 놀이패가 만들어지면서 좀더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작업을 위한 민족극운동의 토대가 마련됐고, 80년대 후반 노동운동의 비약적 성장 속에서 민족극운동은 진보적 지식인 공간을 넘어 생산대중의 공간으로 확장”된 것이다. 연극은 관객과 거리 좁히기가 가장 쉬운 예술이었고, 민족극과 노동극은 그 틈새로 파고들었다. 보기만 하는 연극을 넘어 직접 무대에 오르는 작은 희열이 노동자들을 하나로 묶는 계기가 됐음은 말할 것도 없다. 자신들이 만든 무대에서, 자신의 언어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 민족극은 발전해갔다.

6월 항쟁이 민족예술에 던진 가장 무거운 질문은 ‘누구를 위한 예술인가’이다. 문학의 배경이나 계몽의 대상이 아니라 역사의 주체로 전면에 나섰던 노동계급과 기층 민중은 그러나 ‘환멸의 90년대’를 주춤거리며 지나, 파편화된 개인주의와 냉소로 똘똘 뭉친 룸펜들에게 그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너무나 빠른 몰락에 모두들 당황한다. 하지만, 이것이 끝일까. 소설가 김남일은 아니라고 말한다. “개인을 관통하지 않고서 어찌 다른 무엇을 가치가 있다 말할 수 있는가. 새로운 경향을 대표하는 소설가들의 이런 도발적인 목소리조차 역설적이긴 하지만 6월항쟁의 결과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라고 말이다.

삶과 예술의 경계를 허물어라

집단으로 뭉쳐 새 세기에 대한 열망을 함께 꿈꾸었으되 그 속에서 개인을 새로 발견한 6·10 항쟁은 분명 전과는 다른 고민을 예술에 던져주었다.

“하지만 과연 어떤 작품이 온전히 작품의 내적 마력만으로 향유될 수 있으며 또 삶의 격렬함만으로 연극의 격렬함이 만들어지겠는가. 도리어 예술과 삶의 경계를 허물어뜨리며 확장되는 바로 그 지점이야말로 근대 이후 예술이 잃어버린 자신의 본향인지도 모른다. 절박한 삶의 한 복판에서 객석과 무대가 한 덩어리로 어우러지는 그 현장은 관객을 앞에 두고서야 완성되는 연극의 속성으로 볼 때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 할 것이다.” 김소연씨의 말은 비단 연극 뿐 아니라 모든 예술에 맞춤한 말이리라.
전미영 기자 neruda73@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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