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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한국판『許三觀賣血記』
新한국판『許三觀賣血記』
  • 심혜련 서평위원/전북대·과학학과
  • 승인 2011.07.22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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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혜련 서평위원/전북대·과학학과
전주에 살다보니, 서울을 왔다 갔다 할 일이 많다. 그러므로 내가 시간을 많이 보내는 장소 중의 하나도 바로 버스 터미널이다. 버스 터미널 화장실에 가면, 지금도 심심치 않게 장기를 산다는 불법 광고들을 본다. 신장을 산다는 등등의 광고 말이다. 장기 매매는 현재 불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광고들이 있다는 것은 암암리에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장기 매매를 다룬 영화들도 꽤 있다. 「복수는 나의 것」과 「아저씨」에서도 불법 장기 매매에 관한 내용들이 등장하곤 한다. 그 외에도 책에서도 여러 가지 이유들 때문에 자신의 신체 일부를 포기하거나, 팔거나하는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이를 장기 매매라는 것으로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위화[余華]의 『허삼관 매혈기』, 앙드레 지드의 『황금 골을 가진 사나이』,그리고 오스카 와일드의 『행복한 왕자』도 자신의 신체 일부를 팔거나 선물하거나 기증하는 이야기다. 『허삼관 매혈기』에서 주인공은 생활이 어려울 때, 그저 담담하게 자신의 피를 판다. 피를 판 돈으로 가족의 기본적인 생계를 이어가곤 한다. 『황금 골을 가진 사나이』에서는 지나치게 머리가 크다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한 주인공이 우연히 자신이 머리가 큰 이유가 바로 황금 골을 가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자신이 소외 당할 때, 사람들에게 환심을 사고자 할 때 자신의 황금 골을 조금씩 주거나 팔아서 사람들과의 관계를 유지하는데 사용한다. 『행복한 왕자』에서 행복한 왕자는 타인의 고통을 보고, 제비의 힘을 빌려서 보석으로 치장된 자신의 신체 일부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준다.

이 책들의 주인공들은 각각의 다른 이유로 자신의 신체 일부를 판다. 가족을 위해, 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또는 타인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러한 행위를 한다. 참으로 모진 사회 속에서 살아가기 위한 방편으로 택한 것이다. 참 모질고 잔인한 방편이다.

어찌 보면, 우리는 모두 『허삼관 매혈기』와 『황금 골을 가진 사나이』의 주인공과 같은 삶은 살고 있다. 가족을 위해서든 또 자신을 위해서든 자신의 일부를 팔아서 삶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육체노동은 신체를 소모하면서 발생하는 힘을 파는 것이며, 또 글을 쓰는 행위도 마찬가지다. 흔히 정신노동이라고 하는 일들도 근본은 노동에 있다. 책을 읽고 쓰는 행위도 육체적으로 매우 힘들다.

그런데 요즘 많은 매체들을 통해 대학생들이 비싼 등록금을 감당하기 어려워 일을 하다가 결국은 자신의 몸을 실험 대상으로 그리고 자신의 피를 팔기도 한다는 뉴스를 접하곤 한다.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그럴지 모르겠지만, 지금 한국 사회에서 자신의 꿈을 위해 많은 것들을 준비해야 할 대학생들이 주인공인 한국판 『허삼관 매혈기』가 등장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그렇게 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즉 많고 적고의 문제가 아니라, 있음과 없음이 문제의 핵심이다. 그런 학생들이 있다는 게, 그리고 그런 학생들이 있는 사회는 문제가 있는 사회다. 얼마나 극한에 몰렸으면, 그러했을까. 이러한 극단적인 상황이 아니더라도 지금 대학생들은 등록금을 벌기 위해 일을 많이 한다. 어떤 경우에는 뭔가 뒤바뀐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일을 많이 하는 학생들을 본다. 밤에 늦게까지 일을 하느라, 수업에 늦고, 수업에 오더라도 일 때문에 너무 지쳐서 수업에 집중을 못하는 학생들이 많다. 분명 학교를 다니기 위해 일을 하는 것 일터인데, 일 때문에 학교 다니는 일이 힘들어진다.

기본적으로 대학은 공부만 하는 곳은 아니다. 다양한 학과 활동과 동아리 활동 그리고 교우 관계 등을 통해 많은 것을 경험하는 장소인 것이다. 그런데 일 때문에 이러한 활동은 꿈도 못 꾸는 학생들이 많다. 그런 학생들을 앞에 두고 방학 때는 다양한 경험을 해봐라, 책도 많이 읽고, 문화생활도 많이 하고, 가능한 여행도 많이 다녀라 라는 말을 감히 하지 못한다. 이런 말을 하면, 철없고 세상 물정 모르는 교수의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됐을까. 누가 아직 가능한 세계가 많은 그들에게 가능한 세계를 꿈꿀 수 없는 그들이 되게 했을까. 누가 그들에게서 ‘꿈꿀 권리’를 박탈했는가. 바로 우리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그들에게 ‘꿈꿀 권리’를 되돌려 줄 수 있을까. 꿈을 실현할 수 있는 기반을 주는 것도 아니고 단지 ‘꿈꿀 권리’를 되돌려 줄 수 있는 일이 그토록 어려운 일일까. 너무 어렵게 창의력과 상상력이 기반이 되는 교육을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단지 ‘꿈꿀 권리’만 주어도 되는데 말이다. 지금 우리 모두 한번쯤 『행복한 왕자』의 왕자의 삶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마음이 심란하다.

심혜련 서평위원 / 전북대·과학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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