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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굴곡을 지나온 지성인이 던지는 메시지
역사의 굴곡을 지나온 지성인이 던지는 메시지
  • 민문홍 서강대 대우교수·사회학
  • 승인 2011.07.05 16: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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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읽기_ 심상필 지음, 『다시 찾은 시간-심상필 反자서전』(계간문예, 2011.6)

『다시 찾은 시간-심상필 反자서전』은 홍익대 총장을 지낸 심상필 교수(사진)의‘자서전’이다. 그는 이 책을 통해 그가 겪은 6·25, 동백림 사건, 프랑스의 68년 5월 혁명 등을 기억해내고, 이 기억을 통해 역사의 편린을‘사실’로서 재구성하고 있다. 현대사의 배경에 놓인 사상의 흐름과 다양한 역사적 전개 과정과 해석을 엿볼 수 있다. 자서전의 일반적인 관례를 벗어던지고, 논쟁적인 역사의 기억 속으로 뛰어 들어간 저자의 서술 방식은 그의 가치관에 동의하지 않는 독자들일지라도 경청할 부분임에 틀림없다. 심 교수는 현재 암과 고독하게 싸우고 있다.

이 책『다시 찾은 시간-심상필 反자서전』은 저자가 서문에서 말하고 있듯이 단순한 자서전이 아니라, 우리 한국인들이 체험한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심상필 교수의 증언이다. 심 교수는 이 책의 제목을 反자서전(Antimémoires) 이라는 앙드레 말로(André Malraux: 1901~1976)의 표현을 썼는데, 아마도 이 저술을 통해 당신이 체험한 특정 사건들을 고통스럽지만 어떤 상징적 의도를 가지고 회고한다는 뜻인 것 같다.

저자는 이 책에서 소설의 형식을 빌려 당신의 상처받은 과거를 재현하며, 동시에 그것을 통해 당신의 상처를 치유해 그것을 더 높은 미학적 진실로 승화시키려 노력한다. 그가 이 기억하고 싶지 않은 회고록을 쓴 동기는, 선진국 진입의 문턱에서 정치지도자들의 무능함과 지식인들의 비겁함과 일반 대중들의 잘못된 욕망의 분출로 좌절하고 있는 한국사회와 민족에 대한 충정심이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즉, 한국사회를 반듯한 선진국가로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모든 역사적 사실들을 거대 이론적 담론으로 재단해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삶 속의 진실을 그대로 직면하면서 역사적 변화 속의 구체적 사실들을 중심으로 공동체적 삶 속의 진실에 다가가겠다는 자세가 먼저 확립돼야 한다는 점을 가르쳐 주고 싶은 것이다.

이 책은 크게 3부로 나뉘어진다. 제 1부는 심 교수가 경기중학교 2학년이었을 때 직접 몸으로 체험한 6·25 이야기이다. 80년대 후반까지 6·25사변으로 불리다가 90년대 후반부터 브루스 커밍스의 영향으로 남북전쟁으로 불리게 된 6·25를, 저자는 당시 서울에 남아있었던 중학교 2학년 학생의 눈을 빌어 증언을 한다. 심 교수는‘우익 인사의 처형’으로 상징되는 당신이 직접 목격한 사건을 리얼하게 진술함으로써 공산주의 체제와 6·25를 증언한다. 그리고 이와 함께 남한 지도층의 무책임함, 공산당의 잔인한 학살과 야비함 등을 자신이 경험한 사건들을 중심으로 담담히 기술하고 있다.

심 교수는 이 작업을 통해 자신이 신조로 간직하고 있는 정통 자유민주주의 철학이 책으로부터 간접적으로 얻은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6·25 전쟁의 와중에서 온몸으로 직접 체득한 철학임을 보여준다. 제2부는 이른바 한국의 지식인들에게 신화처럼 남아있는‘동백림 사건’에 관한 회고다.

저자는 동백림 사건 때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공산주의자 혐의를 받고, 파리 유학시절 서울로 강제 납치됐다가 풀려난 자신의 경험을 까뮈와 카프카의 소설 주인공에 비유해 삶 속의 커다란 부조리로 소설의 형식을 취해 고발한다. 심 교수는 이 글을 통해 공산주의가 무섭다는 것을 온몸으로 체득한 사람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처벌하려던 당시 제3공화정 당시의 정부와 정보기관의 야만적 행위에 대해 거의 반세기가 지난 후에 상징적 항의를 한다.

제3부는 한국의 지식인들이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혁명 모델로 생각해 온‘68년 5월 혁명’의 신화를 해부한 글이다. 심 교수는 유럽을 뒤흔든 이 어처구니없는 혁명이, 낭테르대학(당시 소르본 대학 분교)의 여학생 기숙사에 남학생이 자유롭게 출입할 것을 요청하는 일종의 성개방 운동이라는 애매모호하고 부조리한 일상적 사건으로부터 시작됐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 68년 5월 혁명의 와중에 지식인들과 노동조합 지도자와 대중정치인들이 서로 경쟁적으로 기회주의적이고도 대중 영합적인 주장을 펼치며, 유럽의 존경받는 선진국 프랑스의 품격과 사회적 신뢰를 얼마나 크게 훼손시켰는가를 옆에서 지켜본 이방인의 자격으로 생동감 있게 증언하고 있다. 그리고 이 사건의 진행과정을 설명하면서, 흔히들 세계에서 가장 평등한 이상을 실현하고 있는 듯 보이는 프랑스 대학이 사실은 그랑제꼴이라는 특수 전문직 학교를 따로 운영하면서 미래사회의 엘리트들을 양성하는 이중적인 독특한 교육제도를 가지고 있음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3부의 후반부에서, 프랑스가 자랑하는 세계적 지도자 드골이 이 혼란을 어떻게 지혜롭게 수습했는가를 진정한 소명의식을 가진 통합적 지도력의 모본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이 사건의 여파로 프랑스를 승전국으로 만든 위대한 정치가이자 영웅인 드골 대통령이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빚어낸 시대의 흐름에 밀려 어떻게 정부를 떠나게 됐는가를 설명한다. 그와 함께 국민으로부터 버림받은 드골이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의인 국장과 모든 연금을 포기하고, 자신의 가족묘에 공식적 기념비도 없이, 죽는 순간까지도 滅私奉公의 정신을 보여준 대목을 소개한다. 이것은 진정한 국가지도자의 품격과 인격이 어떠해야하는가를 상기해준다.

이제 칠순을 훨씬 넘긴 심 교수는, 이 자서전의 형식을 빌린 회고록을 쓰면서 자신의 상처받은 영혼을 치유함과 동시에, 선진국 문초에서 좌초하고 있는 한국의 지식인들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고 싶어 한다. 그것은 60년대 이후 시작된 근대화를 통해 이제 막 풍요를 누리게 된 한국이, 한국의 현대사를 사실을 중심으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오늘의 선진국들을 가능하게 한 정치철학과 사회발전 모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때, 언젠가는 필리핀이나 아르헨티나와 같은 후진국으로 다시 전락할 수도 있음을 온몸으로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지금 한국의 지도자들이 크게 주목해야 할 리더십을 가진 통합적 정치인의 모델로 프랑스 제5공화정의 드골 대통령을 상세히 소개한 것이다. 그가 귀국 후 대학에 근무하면서, 그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유럽의 정통 자유주의 철학을 대표하는 당대 최고의 사회과학자인 레이몽 아롱(Raymond Aron)을 체계적으로 우리나라에 소개한 것도, 바로 그의 이러한 고통스러운 사상적 편린과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80을 앞둔 사회과학자가 선진국 문턱에서 좌초하고 있는 대한민국을 보며 안타까운 심정에서 감추고 싶은 자신의 과거 상처까지 드러내며, 평생의 경륜과 지혜를 회고록의 형태로 정리한 이 자서전은 한국의 현실을 고민하는 지식인들이라면 한 번쯤 정독을 해야 할 중요한 기록물이다.

민문홍 서강대 대우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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