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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은 재난을 어떻게 성찰할 수 있을까
인문학은 재난을 어떻게 성찰할 수 있을까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1.06.27 09:4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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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대 인문학연구원 정기학술대회

지난 4월 일본 동북부지방을 강타한 쓰나미와 이에 따른 원전 불능 사태는 '재난'의 의미를 인류에게 환기해주는 중요한 사건이다. 과연 재난은 인류에게 어떤 의미로 재해석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하나의 대답을 지난 25일 조선대 인문학연구원(원장 강옥미)이 마련한 2011년도 여름 정기학술대회―‘재난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번 학술대회는 전쟁과 기근, 전염병 등의 여러 재난현상이 인류의 역사에 어떤 흔적을 남기고 있는지를 인문학적인 관점에서 조명하고자 했다. 학술대회는 강옥미 인문학연구원장(인문과학대학 국어국문학과)의 「연구 윤리」 특강에 이어 이승렬 교수(영남대)의 「진보의 신화와 ‘문명’ 이후’」, 복도훈 교수(동국대)의 「세계의 끝: 최근 묵시록 서사의 징후들」, 이향준 연구원(전남대)의 「쇼아( SHOAH): 익명의 아이히만(I-chimann)은 어떻게 가능한가?」, 김덕진 교수(광주교대)의 「17세기 이상저온과 임산공물」, 박종우 교수(고려대)의 「재난 주제 한시의 형상화 양상과 그 의미」가 발표됐다.

이날 발표문 가운데 복도훈 교수와 이향준 전남대  BK21사업단 박사후연구원의 논문이 특히 눈길을 끌었다. 복 교수는 최근 한국 소설에 나타 '재난의 상상력'에 주목, 이 같은 양상들이 특정한 역사적 시기에 등장한 발생론적 의미망을 분석하면 '세계의 끝'을 조망했다. 이향준 연구원은 홀로코스트 영화 계열로 분류될 수 있는 「쇼아(Shoah)」를 매개로 우리 안의 '익명의 아이히만'을 성찰했다. 다음은 복 교수와 이 연구원의 발표문 가운데 발췌한 글들이다.

■ 복도훈 동국대 교수(국문학), 「세계의 끝: 최근 묵시록 서사의 징후들」

1985년 개봉된 클로드 란츠만 감독의 '쇼아(Shoah)'는 9시간이 넘는 다큐멘터리 영화다. '죽음이 만연했던 장소'를 찾아 다닌 감독은 생존 인물의 입을 통해서만 홀로코스트를 기억하는 방식을 제시해 논란을 일으켰다.
우리의 우주론적 묵시록에서는 재앙은 서구 최초의 철학적 금언이라고 부르는 아낙시만드로스의 말처럼 만물이 소멸을 향해 가는 평등한 엔트로피 상태이지만, 그렇게 상상한 ‘세계의 끝’에는 이데올로기적 층위와 계급적 차별이 엄연히 내포돼 있다. 글머리에서도 언급했지만, ‘세계의 끝’ 이후에도, 지구의 종말 이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불가사의한 응시 속에서 자본주의의 공장과 기계가 자신만의 서사적 법칙에 따라 잘 굴러가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것은 묵시록이, 편혜영의「저녁의 구애」(『 저녁의 구애』, 문학과지성사, 2011)의 마지막에 나오는, 자신의 트럭과 비슷한 불타버린 트럭을 바라보는 주인공의 응시처럼, 마치 자신의 죽음을 자신이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꿈-텍스트라는 형식에서 연유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행히도 한국문학은 재난을 ‘세계의 끝’이라는 형이상학적이고도 우주적 규모가 아니라 전 지구적 자본주의라는 정치경제학의 역학으로 접근하려는 매우 드문,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던 중요한 문학적 시도를 한 둘 갖고 있다. 조하형의 뛰어난 묵시록적 재난소설인『조립식보리수나무』(2008)는 한반도에 닥치는 불과 모래 비의 재난과 그 재난의 복구과정을 통해 재난이 초국적 자본, 다국적기업이 하는 사업의 일부로 명확하게 제시돼 있음을 보여준다. 재난은 시스템의 일부이며,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이고, 또 시스템이 파괴적으로 벌이는 막다른 자기유희이다.

프레드릭 제임슨은 윌리엄 깁슨의 사이버펑크인『뉴로맨서』(1985)에서 각종 불법투기와 대규모 암거래, 매각난서과 암살 등이 행해지는 스프롤화된 도시의 이면에는 다국적기업이라는 ‘원초적 장면’(primal scene)이 어른거린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조립식보리수나무』로 오면 이 다국적기업이란 텍스트의 흔적에 음화로 각인된 원초적 장면이 아니라, 노골적이고도 뻔뻔한 실재가 된다. 조금이라도 긴장을 늦추면 조하형의 소설문체가 읽기 어려울 정도로 뒤틀리고 추상적이면서도 히스테리적인 낯선 감각으로 특이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소설의 한 표현을 빌면 아마도 재난이라는 “세계 시스템 차원의 문제를 개체 수준으로 축소하고 신경계를 식민지화한” 결과로 닥친, “‘세계의 비참’에 대한 전 지구적 규모의 불감증”에 대한 거의 아메바적인 개체 수준에서 행할 수 있는 격렬한 이디오진크라지적 몸부림이 실감을 획득하기 때문이다.

『조립식보리수나무』의 한 구절을 응용해 말해보면, 한국문학은 재난의 상상력 덕분으로 현재의 연장 또는 단절로서의 미래를 상상하기 시작했지만, 그 미래를 예정된 미래로, 좌표수정이란 도무지 불가능한 것으로 취급한 경향이 없지 않았다. “예정된 미래를 바꿀 수 있는가?” 이제 한국소설의 재난의 상상력은 도래할 실제적인 재난보다도, 재난을 재생산하고 소비하는 자본주의의 서사보다도, 자가-면역의 ‘세계-시뮬레이션’보다도 더 빠르거나, 또는 더 느리게, 과연 돌연변이하거나 진화를 거듭할 수 있을까.
 

■ 이향준 전남대 BK21사업단 박사후연구원, 「쇼아( SHOAH): 익명의 아이히만(I-chimann)은 어떻게 가능한가?」

결국 이 모든 것의 중심에는 개념혼성을 가능케 하는 뇌를 부분으로 포함하는 신체를 가진 인간 존재가 놓여 있다. 그리고 사실상 이것이 가장 근원적인 부분이다. 원초적인 악에 대한, 집단 학살에 대한 우리의 대처 방안이 무엇인가를 물을 때 이것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어떻게 해야 우리 자신, 친구들, 연인들 그리고 우리를 둘러싼 세상 속에 있는 이러한 적의의 파괴성을 인식하고 그것과 함께 알아갈 수 있을까? 결국 이것이 우리가 뼈저리게 느끼는 악의 문제다. …… 해답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있다면 악에 관해 말할 수 있는 이야기를 발견하고 타자들과 공유하는 것이다. "

악에 대한 우리의 대처 방법이란 결국 말하기와 알리기를 통한 공유 이상의 것을 넘어서지 않는다. 도대체 왜 몇 백만이라는 어마어마한 숫자를 오르내리는 집단 학살과 같은 비극에 대해서 고작 말하기와 알리기라는 방법 이외에 다른 효과적인 수단이 없는 것일까. 왜 레비는 그저 과거에 대한 기억 나부랭이가 미래의 파시즘과 같은 도전에 대해 효과적일 수밖에 없다고 고백하는 것일까.

우리의 인간적인 본질은 집단 학살에 대한 말하기를 경험할 때, 그것을 우리 자신의 경우와 혼성해서 과거의 경험을 배경으로 구성함으로써, 타인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치환하는 방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정말로 아주 평범한 사람이고, 국가와 같은 공동체가 주도하는 적이나, 또는 타인종에 대한 멸절의 요구를 공식적으로 요구받는다면, 우리가 택할 수 있는 방법이란 무엇이겠는가? 101예비경찰대대에 대한 고찰은 불길한 교훈을 던져준다. "만약 101예비경찰대대 대원들이 당시의 조건 아래서 학살자가 될 수 있었다면, 오늘날 유사한 조건이 주어질 때 어떤 집단이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소박한 이유를 대면서 공개적인 집단 학살을 거부했던 대원들은 겨우 10∼20%에 불과했다. 이런 이유라도 대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업가로서, 예비역 소위로서 자신의 체험이 가르쳐주는 삶의 양식을 공식적으로 하달된 행정 명령과 혼성시켜, 새로운 행동 양식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한나 아렌트가 아이히만을 비난하면서, 악의 평범성을 거론할 수 있었던 것, 특히 그를 가리켜 ‘상상력의 결여’라고 말했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아이히만은 그저 상상력이 결여된 것이 아니었다. 기존의 상상적 사고, 즉 '유대인은 동물/사물', '집단 학살은 행정 조처'라는 '살인은 최종해결'이라는 기존의 상상적 구도가 그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그의 상상력은 그저 결여됐다기 보다는 이미 동일한 능력에 의해 생산된 기존의 결과물에 억제돼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는 아이히만이나 우리 자신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평범한 아이히만(Eichimann)이 집단 학살의 대명사가 될 수 있다면, 오늘날 우리 자신은 그 아이히만과 동일한 상상적 사고 능력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누구나 익명의 아이히만(I―chimann)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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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7-05 10:49:55
순수 자연과학자로서, 인문학이 자리를 잃어 가는 일에 동병상린의 안타까움을 느낀다. 물질만능의 시대에 인간의 정신을 이해하는 일의 가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인문학자들이 자연과학자들만큼 자신의 분야에 학문적 순수성과 열정을 가지고 있는지에 항상 의문을 가진다. 인문학자 하면 떠오르는 일은 말과 행동이 그들의 학문적 깊이에 너무 앞선다는 것이다.

우리는 세계적 인문학자를 가질 수 없는 것인가? 인문학자들은 자연과학자들처럼 연구실로 돌아 가서 보다 보다 치열하게 학문적 깊이를 쌓는 일에 정진해서, 인간의 정신사에 획을 긋는 업적을 이루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