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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조원택 계보, 마침내 한국무용을 만들다
최승희·조원택 계보, 마침내 한국무용을 만들다
  • 문애령 무용평론가
  • 승인 2011.06.08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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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무용은 어떻게 이 땅에 정착했을까

오늘날 대학에 뿌리내린 서양무용은 어떻게 한국에 정착했을까. 또 정착기의 특징적 흐름은 무엇일까.

최승희, 조택원이 개척한 한국무용의 계승과정은 지적 호기심을 불러내기 충분하다. 이와 관련, 지난달 21일 경희대에서 한국무용예술학회(회장 안병주 경희대 무용학과)가 마련한 제16차 학술발표회에 주목할 수 있다.

‘근현대 비교무용연구Ⅱ -서양무용의 한국 정착기를 중심으로’를 주제로 한 이날 학술발표회에는 「한국 현대무용의 정착과 수용에 관한 연구」(송정은 경기대), 「1930년대이후일본현대게이샤춤에대한연구」(카주코구니요시와세다대), 「 서양무용한국정착기의특징적흐름고찰」(문애령무용평론가) 등이 발표됐다.
특히 무용평론가 문애령은 1960년대 한국무용의 계보가 1930년대 최승희, 조택원으로부터 이어진다고 분석했다.

최승희(왼쪽), 조택원(오른쪽)은 한국 최초의 서양무용가이자 오늘날 한국무용의 대모·대부로 평가되고 있다.

한국에서의 첫 서양무용 공연은 1926년 3월 21일 경성공회당에서 열렸다. 독일 현대무용의 영향을 받은 일본 최초의 현대무용가 이시이 바쿠가 순회공연 중 경성에 들른 3일간의 무대다. 이 공연 후 그의 제자가 되기 위해 일본행을 택한 젊은이들이 한국 최초의 서양무용가인 최승희, 조택원이다.

그러나 이들은 오늘날 한국무용의 대모·대부로 평가되는데, 서양무용을 전공한 일본인의 제자가 어떻게 한국무용의 뿌리가 될 수 있었는가에 대한 개념적 혼란이 크다. 또한 ‘한국무용’이란 용어가 언제부터 사용됐으며, 초기에는 여러 장르의 춤을 추던 사람들이 어떤 계기로 오늘날처럼 한국무용·발레·현대무용으로 전공을 엄격하게 가르게 됐는가, 한국무용의 개념은 무엇이며 어떻게 변화했는가를 ‘특징적 흐름’으로 칭해 관찰하고자 한다.

서양무용은 크게 고전발레와 현대무용으로 분류되나 창작에서는 자주 공통 영역이 존재한다. 보통 발레 이후에 현대무용을 수용하지만 우리나라는 그 반대의 체험을 했다. 발레 전공자들이 해방 이후에 등장한 반면 현대무용은 최승희가 1930년, 조택원이 1933년 개인공연을 시작하며 조선무용계를 대표했다. 당시에는 신무용·신흥무용·모데르네 탄츠 등으로 불렀고, 조선 향토무용에 비해 우월한 예술로 평가받았다.

1962년 국립무용단 창단과 ‘조선의 빛’

서양무용이 한국에 정착한 시기에 관해서는 1962년 국립무용단 창단을 유력한 시점으로 본다. 국가 문화정책의 결과로 생긴 기관이라는 점, 임성남·송범 등 당시 무용계의 중심인물들이 단체를 대표한 점, 그리고 그들이 현 무용계에 대단한 영향력을 미쳤다는 점 등이 ‘정착’에 힘을 실어준다. 이 정착기의 특징이 ‘한국무용’의 등장으로 도입기의 두 개척자가 강조한 ‘조선 빛’을 더욱 공고히 한 것으로 간주된다. 민속무용이 창작무용에 적극 수용된 원인은 외국과의 교류나 문화·교육 정책 같은 외적인 환경에서 보다 쉽게 찾을 수 있다.

1930년 “무용은 육체의 율동으로써 춤을 창작하는 사람의 의지와 감정을 표현하는 것입니다”라며 독일 표현주의 무용론을 피력한 바 있는 최승희는 1934년 이후로 조선고악이나 가야금 산조에 의한 작품으로 민속적 측면을 강조한다. 심지어 1937년 일본공연에서는 이왕직 아악부의 궁중무용 「처용무」, 「 봉산탈춤」같은 조선 빛 농후한 무용을 하게 된다. 조선일보 1937년 10월 26일자에서 그 이유를 유추할 수 있는데, 중국의 매란방을 서구에 소개한 미국인 비킨스가 “조선의복으로 세계 일주를 한다는 것이 계약 조건의 첫째”로 최승희를 초빙했다는 기사를 통해서다. 조선 악기와 관혼상제 의복과 보료, 촛대, 문갑, 방석 등을 공연하는 곳마다 전시한다는 설명이 덧붙었다.

1937년 말 프랑스에 간 조택원은 <조선일보> 1938년 9월 8일자에 “열 달 동안의 파리 생활에서 나는 12년 동안 내가 연구하였다는 소위 신무용이란 것이 얼마나 값없는 것인가를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조선의 고전에 발을 두고 거기서 새 시대의 호흡을 불어 넣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것-나의 예술가로서의 포스에 대한 황홀한 결론을 얻어가지고 돌아왔습니다”라고 밝히며 ‘조선 향토무용’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처럼 일본 유학생들이 무대를 세계로 넓히며 창작 동기나 음악, 의상을 민속에서 찾게 된 결과 조선 신무용 즉 한국무용의 모델이 등장했다.

이 형태는 최승희의 월북, 조택원의 외국행(1947년~60년)으로 잠시 공백을 거친 후 현 무용계와 직결되는 국립무용단 창단세대와 연결된다. 동란 중에 월남한 최승희 직계인 김백봉, 역시 최승희 계열로 알려진 장추화의 제자 송범과 김진걸, 조택원의 부인 김문숙, 후에 문화재 예능보유자가 된 강선영 등이다. 국립무용단 창단 시에 구성원의 전공을 발레(외국무용)와 한국무용으로 구분한 것은 한국적인 창작무용을 서양적인 창작무용과 병행해야한다는 의지표명으로 보인다. 임성남과 송범이 발레(외국무용) 전공으로, 김백봉·강선영·김진걸 등이 한국무용 전공으로 국립무용단을 구성했다. 오늘날의 시각에서는 현대무용이 빠진 것이 유감이겠으나 조택원이 “그곳(파리)의 무용계는 고전과 모던 두 가지 류파 밖에 없는데 전통적인 것은 무엇이던지 고전에 속하고 새로운 것은 모다 모던에 속합니다”라고 정의한 기준이 이론적 배경일 수 있겠다.

따라서 초기 ‘한국무용’은 외국무용에 대한 상대적 개념인 것은 확실하나 전통무용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조선일보> 1962년 6월 26일자에 “몇 해 전만 하더라도 민속무용과 혼동을 가져와 한국 전래의 춤을 추는 것이 한국무용이 아니냐는 등 얕은 수준을 면하지 못했었는데, 김백봉·강선영·권려성씨 등의 현대에 대한 창조적인 감각에 의해서 한국무용의 독특한 스타일이 이룩되어왔다”라는 기사가 있다.

그러나 최승희·조택원이 외국공연을 통해 민속무용가로 자리매김 한 것처럼 이번에도 해외공연이 한국무용의 민속화를 부추긴다. 1968년 “세계민속예술제전에 초청받았으나 참가자 전부가 신무용 계열이라 ‘무용 예술단’으로 불러야 한다는 건의에도 불구하고 당국이 끝내 ‘민속예술단’을 고집”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화관무」, 「 부채춤」같은 민속무용 대용 작품이 나온 시대적 상황을 그려볼 수 있다.

인간문화재의 등장도 민속예술단 파견과 무관하지 않다. <조선일보> 1972년 12월 24일자 ‘민속예술단 周遊천하’에서 판소리의 김소희·박귀희, 69년에 「승무」로 지정된 무용의 한영숙이 인간문화재로 특별대우를 받는 인상을 준다. 이런 전통 찾기 움직임은 궁중무용에도 번져 1980년부터 시작된 김천흥의 발굴 작업이 큰 결실을 맺기에 이른다.

왼쪽부터 송범(1926~), 김백봉(1927~), 김문숙(1928~) 그리고 육완순(1938~). 송범, 김백봉은 최승희의 제자이며, 김문숙은 조택원의 아내였다. 이들에게서 한국 무용의 한 계보를 엿볼 수 있다.

예술대학 무용과 설립과 전공 삼분법의 확립

1973년 국립무용단과 발레단이 분리되면서 송범과 임성남이 각각 단장을 맡는데, 민속예술단 공연에 동참한 송범이 전공을 한국무용으로 옮겨갔다. 이시이 바쿠의 현대무용이 몇 대를 거쳐 결국 전통계승적 한국무용이라는 새로운 장르로 정착된 일대 사건이다.

송범·김백봉·김진걸 등 50년대의 창작무용가 대부분이 한국무용가로 정착한 이 시기에 등장한 육완순은 상대적으로 약화된 현대무용계에서 완전히 새로운 계보를 형성한다. 때마침 대학에서 무용교육을 시작하는데, 1962년 서라벌 예술대학 이후 연달아 설립된 여러 대학 무용과에 송범·김백봉·김진걸·육완순이 교수로 재직하게 되면서 현재의 전공 삼분법이 불변의 법칙처럼 자리 잡았다. 송범은 전 국립무용단장 국수호 같은 현재의 원로들을, 김백봉은 김말애 경희대 교수를 비롯한 많은 제자를, 육완순은 박명숙 경희대 교수를 비롯한 여러 제자를 배출했다.

서양무용 한국정착기의 특징적 흐름은 ‘한국무용’ 용어 등장과 그 형태의 고전화, 새로운 현대무용의 등장, 그리고 엄격한 전공 삼분법의 확립으로 요약된다. 발레는 해방 직후에 등장한 한동인과 그 무용단원 임성남이 정형화된 영역을 지킨 역사라 특기할 부분이 적은 반면 1930년대의 현대무용 계보가 1960년대에 한국무용을 이룬 역사는 특징적 흐름이라 칭할 충분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문애령 무용평론가

필자는 파리 팡테옹-소르본느대 예술철학 DEA를 졸업했다. 한양대에서 박사학위를 했으며, 지은책으로는『서양무용사』,『 전환기의무용예술』등이있다. 경기대, 수원대, 한국예술종합학교, 한양대 대학원 및 학부에서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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