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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을 만나 본 사람은 스승의 길(道)을 이어 간다
스승을 만나 본 사람은 스승의 길(道)을 이어 간다
  • 강신표 인제대 명예교수
  • 승인 2011.05.09 15: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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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스승의 길을 걷는 후배 교수들에게 / 강신표 인제대 명예교수

강신표 인제대 명예교수
스승의 길은 스승님을 만나 본 사람이 안다. 그 길은 말로 설명하자면 끝이 없지만. 그러나 분명 각자에게는 스승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 스승님이 있을 것이다. 특히 스승 노릇을 하는 선생님이나 교수님들에게는 자기에게 특별한 존재이신 “스승님”이 계실 것이다. 자신이 모실 스승님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스승의 날”을 맞아 스승님을 다시 생각 해 보는 데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왜 우리는 “선생의 날”, 또는 “교수의 날”이라고 하지 않고 “스승의 날”이라고 했을까. 스승, 선생, 교수, 세 단어는 동일한 뜻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서로 다르다. 각 단어들이 사용되는 상황을 따져 보면 확연한 차이를 볼 수 있다.

 내가 근무하던 모 대학에 새로 부임한 교수에게 “김 선생!” 이라고 부르곤 했는데 그러던 어느 날 그분으로부터 이제부터 “‘김 선생’ 이라고 부르지 마시고 ‘김 교수’ 라고 불러 주세요” 라고 정식으로 항의조의 부탁을 받고 나는 깜짝 놀랐다. 교수라는 직업적 호칭보다, 선생이라는 호칭이 더 친숙하고 개인적인 존경의 뜻으로 사용해 온 나에게는 너무 의외여서 수년이 지난 지금도 잊지 못한다. 선생은 초·중·고등학교에서 사용되는 것이고, 대학에서는 교수로 불러야 옳다는 것이 김 선생의 생각이었던 게 아니었나 생각된다. 나 같은 늙은 교수는 아직도 “교수라는 호칭보다는 선생”이라는 호칭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 한국 전통사회의 신분의식이 이러한 구별을 낳았을 것이리라. 시대는 변하고 있다. 동일한 단어가 동일한 뜻을 지니고 있을 수 없게 돼 가고 있다.

 선생은 글자 그대로는 나보다 먼저 태어난 사람이다. 그러나 그래서 살아 온 삶의 역사가 길기 때문에 보고 들은 견문과 체험한 것이 많아 배울 바가 많은 사람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요즘 통용되는 선생은 나에게 낯선 사람에 대한 존칭을 뜻하는 호칭이기도 하다. 나보다 젊은 사람도 “아무개 선생”이라고 흔히 쓴다. 교수는 대학에서 가르치는 사람을 뜻한다. 한 사회의 최고 고등교육 기관에서 가르치고 연구하는 선생의 직업적 호칭이다. 사회의 지도자 계급이요, 내일의 이 나라를 이끌어 나갈 나라의 인재를 양성하는 고등 교육선생을 생각한다. 존경받는 직업의 명칭이요, 점차로 복잡 다양한 사회문화적 환경변화에 대처할 국가 지도자들의 자문에 응하고, 때로는 직접 정치·경제·사회·문화 영역에 참여하는 지도자 교수들도 많다.

 스승이라는 단어는 선생이나 교수와 동일하게 사용되지 않는다. “김 스승”이라는 호칭은 들어 본 적이 없다. 선생이나 교수는 객관적인 대상으로 교육을 담당하는 사람을 뜻하는 데서, 스승이라는 단어와 같은 의미를 가지지만, 호칭으로 사용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가 특별히 유의해야 할 점이다. 스승은 3인칭 지칭 명사이지, 2인칭 호칭 명사가 아니다. 따라서 스승이라는 명사 속에는 선생이나 교수라는 명사가 함의하는 내용보다 한층 깊은 뜻이 있음을 자각하게 된다.

 한층 깊은 뜻이 있다는 말은 스승에 대한 나 혼자 만의 생각일까?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이 점이 바로 나 같은 늙은 세대가 가지고 있는 스승에 대한 생각인지도 모른다. 일제로부터 해방, 6.25라는 민족상잔의 혼란기를 지나면서 나는 평화 시에 쉽게 만날 수 없었던 스승님들을 여러분 만날 수 있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혼란기는 그 혼란을 넘어서기 위한 몸부림이 한 사회의 모든 영역에 팽배해 있다. 어떻게 보면 지난 한 세기 동안 한국인 모두가 서양 제국주의적 도전과 일본 식민지 정책에서 빚어진 갖가지 혼란 속에서 “생존을 위한 방황”의 연속을 경험하였다. 여기에 어느 하나의 절대적 “해답”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제각각의 길을 찾아 달려왔다.

 물질적 궁핍과 사회적 혼란은 인간의 삶 자체를 회의하게 만들었고 의지할 곳을 찾아 다방면으로 탐색의 길에 나서게 했다. 젊은 날의 방황은 시대적 혼란과 겹쳐 암울한 현실은 더욱 더 삶의 의미를 찾아 나서게 만든다. 그러나 중·고등학교의 교과과정 교육에서 그에 대한  해답은 존재하지 않았다. 어쩌다 교단에 서 계신 선생님이 우리들에게 야단치면서 지나는 말로 던지던 말에서 정신이 번쩍 들게 하던 가르침이 있었다. “세월은 자네들을 위해 기다려 주지 않는다.” 지금-여기 이 순간의 이 장소에서 해야 할 공부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안타까운 심정에서 노여움을 삭이면서 외치던 그 외마디 가르침이 잊혀지지 않는다.

 우리에게 무엇인가 열심히 가르치려고 혼신의 힘을 다해 노력하시던 선생님이셨다. 숙제를 제대로 해 오지 않았을 때 두 손바닥을 펼치고 서서 선생님의 회초리를 맞아야 했다. 정신이 번쩍 낫다. 그 분은 자신도 열심히 공부하고 연구하시는 선생님이라는 소문도 들렸다. 다른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과 동아리 모임도 많았고, 자기들이 자랑하는 선생님 이야기도 들었다. 우리들은 선생님들을 찾아 다녔다. 피난 시절 당시의 선생님들은 소속한 학교를 가리지 않고 여러 다른 학교 학생들의 모임에 나와 자신의 삶과 견문을 전해줬고, 우리들의 질문이 아무리 어설픈 것이라도 차근히 답해 줬다. 나라를 빼앗긴 일제하에서 계몽주의적 시대정신이 우리에게 그대로 이어진 것이다.

 우리가 대학에 입학했을 때 그 선생님들은 다시 대학 교단에서 우리를 가르치셨다. 우리 세대는 많은 스승님들을 만날 수 있었던 운이 좋은 세대였는지도 모른다. 교과과정의 지식을 넘어 “삶의 지혜”를 일깨워 주시려고 틈틈이 많은 이야기를 해 줬고, 그분들의 행동에서도 우리는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 “세상은 보는 대로 있고, 마음먹기에 달렸다.” “네 인생은 네가 하기 나름이다. 누구도 네 삶을 대신해서 살아주지 않는다.” “언제나 메모하라. 아무리 흐린 연필도 정확한 기억력보다 오래 간다.” 자신들의 삶에서 터득한 생생한 지혜였다.

 “스승의 날”은 스승님의 가르침을 되돌아보는 날이다. 스승님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행로에 어떤 좌표를 말과 행동으로 가르쳐 주신 분들이다. 철이 들기 전에 “정신을 번쩍 차리게”해 주시던 스승님들은 아직도 우리 가슴 속에 살아 계신다. 우리 같은 늙은 세대의 선생들은 아직도 어떤 주제의 강의에서도 어린 시절 스승으로부터 들었던 소중한 이야기를 생각하며 그 정신을 전해 주고자 노력한다. 스승님을 만나 본 사람들은 스승의 길(道)을 이어 가는 것인가. 스승의 날에 스승에게 바치는 카네이션에 더해 스승님에 대한 정의를 한 번씩 생각해 보는 것은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이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과제라고 본다.

강신표 인제대 명예교수·문화인류학
미국 하와이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영남대·이화여대·한국학대학원·한양대 교수, 한국문화인류학회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한국문화연구」,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과 한국학」, 「세계와 함께 나눈 한국문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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