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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의 모색 또는 현실적 화두를 찾아서
주체의 모색 또는 현실적 화두를 찾아서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1.03.14 16: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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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지 리뷰_ 2011년 봄호, 세상을 만나다

이심전심이었을까. ‘진보성’을 표방하는 두 계간지 <문화과학>65호와 <진보평론>47호는 공교롭게도 비슷한 주제를 특집으로 겨냥했다. ‘주체형성’의 문제다. <문화과학>은 총론에다 역사적 평가, 관련 논쟁, 새로운 혼종성 등 3개의 주제를 덧붙이는 제법 큰 형식으로 접근했다.

그렇지만 이미 여러 차례 이 주제를 놓고 논객들의 내공을 펼쳐보였던 바, 새로운 논의보다는 기왕의 주체형성이론을 ‘총괄’하는 데 포커스를 뒀다(심광현, 정정훈, 심세광, 이동연, 이득재, 황주영, 최정우). <진보평론>은 편집자의 말대로 “저항적 정치의 가능성을 살펴보려는 의도에서 기획”된, “지배 이데올로기에 갇혀 시야에서 사라진, 하지만 여전히 실재하는 변혁의 토대를 찾으려는 시도”로 볼 수 있는 특집 구성이다(박영균, 조정환, 서영표, 이승원, 마이클 하트).

<문화과학>은 심광현의 글 「‘통치양식’의 문제설정과 새로운 주체이론의 탐색」을 맨 앞에 내걸었다. 다소 장황하게 보이지만 그는 푸코-마르크스-칸트-벤야민-인지과학을 ‘변증법적 절합’하겠다는 의욕에서 접근, 신경정신분석학과 벤야민의 미메시스의 결합에 주목했다. <진보평론>은 박영균의 글 「주체형성의 유물론적 관점」을 冒頭에 내걸고 논의를 정리해가고 있다. 그가 주목한 것은 ‘대안적 사회-자기 통치의 권력체’를 공통적인 목표로 한 적(마르크스주의)-녹(생태주의)-보(페미니즘) 연대의 정치다. 

두 개의 특집을 견지하고 있는 <오늘의 문예비평>80호는 ‘매체환경의 변화와 문학의 좌표’(표정훈, 한혜원, 임태훈), ‘불안의 정치와 불안의 향유’(최정우, 김경연, 김재경)를 소환하고 있다. 특히 특집Ⅱ는 시의성 있게 읽힐 수 있는 최정우의 글 「불안의 정치경제학 비판 서설」이 흥미롭다. 그는 “불안을 사회적 치유나 승화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불안을 생체적이고 조직적으로 관리하고 해소하려는 체제의 프로그램에 불과하다”고 보면서 오히려 불안을 헤집고 증폭시키는 방법을 통해 불안의 대량생산에 기생하고 있는 체제에 대항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김재경의 글「지금 여기 시간강사라는 유령은 누구인가?」는 한국사회에 7만 명 이상 존재하고 있는 시간강사의 유동하는 삶과 거기서 발생하는 불안을 집중 조명했다. 어쩌면 이들이야말로 가장 浮游하는 지식의 편린체일 것이다.

‘다시 동아시아를 말하다’를 특집으로 내 건 곳은 <창작과비평> 151호. 백영서, 박민희, 개번 매코맥, 쑨 꺼, 백낙청 등의 글을 실었다. <창작과비평>은 1993년 봄호 특집 이래 주된 관심사의 하나로 ‘동아시아’를 내걸어왔다. 특히 봄호에서는 중국의 부상과 더불어 변화와 갈등을 겪는 동아시아 정세를 논하되, ‘국가주의를 넘어서는 동아시아공동체’를 지향하는 담론과 연대 움직임에 주목했다. 이런 ‘국가주의 극복’이란 문제의식은 ‘논단과 현장’에 수록된 첸 리췬의 글 「중국 국내문제의 냉전시대적 배경」에서 거듭 확인된다. 흥미로운 것은 ‘사회인문학 연속기획’이다. 임형택의 글 「전통적 인문 개념과 문심혜두」를 첫 번째로 내세워, 인문학의 총체성 회복 노력을 가시화하고자 했다. 이 연속기획이 어떻게 이어져갈지, 학계에 어떤 內波를 불러올지 주목된다.

아마도 특집 주제의 시의성으로 본다면 <황해문화>70호의 특집 ‘복지국가, 제대로 논의하기’(김진석, 김대호, 홍경준, 김영미, 방하남, 최윤정, 이은경) 가 가장 현실감 있게 읽힐 것이다. 김진석의 논쟁적인 글 「‘보편적 복지’만 정답인가?-약이지만 동시에 독인 복지」는 민주당이 내세우는 보편적 복지에 논의의 초점을 맞췄다. 김진석은 거기서 포퓰리즘과 복지만능주의를 찾아내, 전자는 ‘착각’, 후자는 ‘환상’이라고 비판한다. 이른바 ‘자칭 진보’의 이념 과잉과 교조적 사고가 작동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여하튼, 그의 글은 논쟁적이어서 재미있는 것이 아니라, 복지담론의 저편에 놓여 있는 현실적 문제와 각 개인의 자유, 자발성을 동시에 고민하고 있어서 눈에 번쩍 띈다.

<황해문화>가 ‘복지’를 겨냥했다면, <역사비평> 94호는 ‘조세의 공공성’을 제기했다(정태헌, 전강수, 이정철, 김정진). 흥미롭게도 이들 역시 ‘사회인문학의 모색’이란 작은 부제를 단 대담(대학과 학문의 회복을 위하여-김우창·박명림)을 마련했다. 조세의 공공성 없이는 복지의 미래가 없다는 편집집의 문제의식이 그대로 읽힌다. <역사비평>은 조금 우회하는 방식을 택했다. 근대 조세 100년사, 토지보유세의 역사적 의미, 대동법에서 본 조선시대의 공공성 관념, 한국조세제도의 시사점 등의 구성이 그렇다.

<문학동네> 66호와 <문학과사회>93호의 특집은 이들은 각각‘한국어의 성찰-미디어, 번역, 비평’(김예란, 서석배, 허윤진), ‘21세기 장편소설의 현주소’(김형중, 임경규, 안천, 송병선)를 내세웠다. 이 특집들은 두 계간지, 나아가 에콜의 시야각을 보여주는 것으로 읽힌다. 지금 왜 ‘한국어’와 ‘장편소설’에 주목하고 성찰해야하는 걸까. 그것의 대척점에 놓인 암묵적 상대를 떠올려보면 자명하다. 하나는 안의 언어를, 다른 하나는 외부의 양식적 환경을 껴안고자 한다. ‘문학’의 존재 가능성을 묻는 또 다른 이름인 셈이다.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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