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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약! I’m Your Energy
절약! I’m Your Energy
  • 엄병환 미국 통신원·화학공학
  • 승인 2011.02.28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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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천장 심사자료를 PDF로 바꾼 이유

임용이나 정년심사는 어느 곳이나 까다롭나 보다. 필자가 재직하는 대학은 정년심사를 받기 위해 논문을 비롯, 이력을 분야별로 일목요연하게 요약해 학장을 포함한 심사위원들에게 제출해야 한다. 아직은 풋내기 조교수인 나의 경우도 대학원, 박사후 연구시절, 그리고 지금까지의 업적을 모두 종합하다보니 A4용지 200장 정도나 됐다. 심사위원이 5명이라 가정하면 1천 장의 종이가 소모된다.

그런데 대학은 지난해 가을학기부터 이 규정을 바꿨다. 이유는 종이, 에너지, 시간 등을 절약하면서 ‘그린에너지’에 동참한다는 취지라고 한다. 모든 자료는 PDF파일로 제출하고 심사도 전자파일로 하겠다는 것이다. 차세대 에너지를 고민하는 나로서는 꽤 흥미로운 방침이다. 과감한 결정이기도 하다.

미국 북동쪽 맨 끝자락에 있는 메인주립대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일한 적이 있다. 메인주립대는 펄프와 바이오리파너리에 관련된 최고 수준의 연구력을 자랑하는 곳이다.

그런데 이곳은 북미지역의 종이역사와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메인 주는 전체의 90% 이상이 자연림으로 덮여있고, 이 자연림은 미국의 종이산업을 이끌었다. 한국에서 바이오리파이너리 분야에 관심이 증가하자 많은 언론사가 이곳을 방문해 연구소와 펄프공장을 취재하기도 했다.

“한국은 펄프공장 단 하나인데…”
취재를 마친 기자들의 반응은 미리 약속한 것처럼 똑같다. “한국가면 정말 종이 아껴 쓸 겁니다.” 펄프를 엄청나게 많이 만드는 공장을 견학하고 나오는 반응이 ‘아끼겠다’는 것이니 흥미롭다. 펄프 만드는 과정을 직접 보면 아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나 보다. 엄청난 화학약품의 악취에 놀라고, 나무에서부터 기나 긴 공정 끝에 만들어지는 게 한 장의 종이도 아닌, 단지 그 한 장의 종이원료가 된다는 사실이 충격이었나 보다.
종이의 재료는 펄프이고 펄프는 주로 나무를 원료로 사용해서 생산된다. 종이는 동양의 산물이지만 지난 세기는 서구가 지배적 사용자였다. 1970~80년대까지 전세계 펄프시장을 북미와 유럽이 주도 했다. 하지만 90년대에 접어들면서 사정이 바뀌기 시작했다. 선진국들이 하나 둘씩 자국에서의 펄프생산을 멀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친환경적인 사업이 아니라는 것. 이제 선진국들은 중국과 동남아시아에서 생산되는 펄프 중 70~80% 이상을 수입하는 실정이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현재 펄프생산의 최강국은 중국이다. 2000년대부터 대략 두 달에 하나 꼴로 대규모 펄프공장이 중국 남쪽지방에 들어서고 있다. 황해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지역이다. 지금 중국 경제사정으로는 펄프공정에서 나오는 유해물질의 활용과 정제에 대한 관심보다는 생산능력에 관심이 높을 것이다. 환경과 생태계 걱정은 아마도 시간이 걸려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종이문서 사라지자 깔끔해진 연구실
한국은 단 한 개의 펄프공장을 보유하고 있을 뿐 거의 대부분의 펄프를 원유처럼 수입에 의존하는 나라다. 국민들이 자동차의 기름 값이 오르는 것은 아주 민감하게 반응하는데 반해 매일 가정과 직장에서 사용하는 종이 원자재 값에는 그다지 민감하지 않다.

최근 한국대학에서 배출하는 이산화탄소량이 유명대학일수록 압도적으로 많다는 기사를 접하고 조금 놀란 적이 있다. 대학의 종이사용량도 비슷한 실정일 것이다.

줄일 방법을 생각해보면 의외로 많다. 학부에서 수학문제를 풀어야하는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과제를 전자파일로 받고 평가하는 방법, 그리고 대학원에서의 논문 교정, 학위논문 수정 등은 컴퓨터 프로그램 내에서 해결하는 방법, 학내 각종 행정 공문 등을 전자사인으로 결재하는 방법, 학생을 선발하거나 교수 채용 시 제출서류의 온라인화 방법 등 방법은 많다.

내가 있는 대학은 지난해 가을학기부터, 그리고 이전에 있던 메인주립대는 올 봄학기부터 건물은 물론이고 캠퍼스 내 모든 구역을 금연구역으로 지정했다. 흡연자들의 반대와 불편이 있지만 모든 사람의 건강, 환경, 그리고 타인에 대한 배려를 우선한 것이다. 우리 몸은 하루아침에 갑자기 좋은 건강과 몸매가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결국 조금씩 꾸준히 노력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쁜 습관을 우선 멈추는 것이다.

하지만 나쁜 습관을 우선 멈추고 고치는 노력은 여전히 인색하다. 아직도 거리에 대형 자가용은 넘쳐나고 종이는 그저 ‘종이조각’이라는 통념이 자리하고 있다. 원유와 펄프는 우리가 수입해야 하는 값비싼 원자재이고 무엇보다 지구의 건강을 위협하는 최고의 암적 존재라는 사실을 항상 기억할 필요가 있다.

불편할 수 있다. 흡연자처럼 말이다. 하지만 흡연처럼 종이소비는 결국 지구의 건강을 위해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문제는 누가 먼저 그 제약을 스스로 실천할 것이냐일 텐데, 내가 보기에 정부와 대학이 맨 앞에 서야 한다. 국가는 당연히 그린에너지 정책 주체로서 그래야 하고 대학은 진실을 추구하는 집단으로서 실천책임이 무겁기 때문이다. 해보면 의외로 좋은 점이 많다. 매년 산더미처럼 쌓인 학생들의 보고서를 애써 버리는 수고를 덜 수 있다. 덤으로 연구실도 깔끔해진다.

 

엄병환 미국 통신원·화학공학

미국 와이드너대 화학공학과 조교수다. 미국 어번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의 대체에너지 정책과 새로운 연구방향 및 투자계획 등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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