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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ㆍ미술관 관장과 適材適所
박물관ㆍ미술관 관장과 適材適所
  • 윤범모 경원대·미술평론가
  • 승인 2011.02.22 13: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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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맞은 인재를 알맞은 자리에 앉히는 삼고초려 정신이 아쉽다.

  김리나와 김영나, 이들 자매는 미술사 전공 교수다. 국립중앙박물관 초대 관장인 김재원의 딸이다. 얼마 전 언론은 이들의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기자들의 질문, ‘리’자입니까, ‘영’자입니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정부는 예측불허의 인사발령을 단행했다(예측 가능한 인사는 언제 정착될 것인가). ‘느닷없이’ 정부는 국립중앙박물관 관장으로 김영나 교수를 임명했기 때문이다. 박물관 관장이라면 불교미술사 전공의 김리나 교수가 어울린다. 서양미술사 전공의 김영나, 한국미술사의 보고인 국립중앙박물관과는 뭔가 거리가 먼 것처럼 느껴진다. 당사자도 이 점이 부담스러웠는지 언론을 향해 박물관 경영과 전문지식과는 별개라고 주장했다 한다. 이 무슨 소리, 전문성 없이 박물관 경영이 가능하다고?

  언론이 지적한 내용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적재적소다. 적재적소, 정말 우리 사회에서 화두로 삼아야 할 비중 있는 단어이다. 사전식 설명을 하면, 알맞은 인재를 알맞은 자리에 앉히는 것, 이것이 적재적소다. 유비가 제갈량을 얻기 위해 삼고초려 한 것, 그 정신이 아쉬운 사회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우리 사회는 엉뚱한 인물들이 엉뚱한 자리를 차지하는 경우가 속출하고 있다. 자기 분수도 모르고 감투사냥에 열중하는 자들이 판을 치는 사회이기도 했다. 그러니 부작용은 당연한 결과, 사회 도처에서 썩은 물이 흘러넘쳤다.

  얼마 전 나는 전문성 부재의 미술관 문화를 질타한 적 있다. 미술관 관장 자리가 작가들의 사랑방이 아니라는 지적, 여러 군데에서 칭찬의 박수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공립미술관의 경우, 작가가 관장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예가 많다. 전문성 무시의 현장이다. 미술관 운영은 미술관 운영 전문가에게 맡겨야 한다. 작가들로 하여금 폼 잡기 위해 마련된 자리가 아닌 것이다. 지극히 당연한 지적이다. 하지만 아직도 원시시대인지 한국 미술관 마을에서는 이러한 원칙조차 지켜지지 않고 있다. 지자체 수장은 왜 원칙조차 무시하면서 전문성과 무관한 (삼류?) 작가들을 관장 자리에 앉히려 하는가. 선거 캠프에서 득표활동에 도움을 주었기 때문인가, 인맥 관리 차원에서의 선물인가. 오늘도 몇몇 지역 미술관 관장 자리를 두고 ‘운동’하러 다니는 이른바 작가들, 언제 정신 차릴 것인가. 비전문가가 관장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기간만큼 미술관 문화가 퇴보한다는 사실, 왜 모르는가.

  적재적소와 무관한 대표적 인사가 바로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이다. 무슨 인사발령이 이런가. 작가는커녕 아예 미술계와 무관한 이공계통 인사를 미술관장으로 발령했기 때문이다. 이는 미술계를 무시하는 처사가 아닐 수 없다. 미술계에 미술관장 깜이 없다는 반증의 시각이기 때문이다. 정말 미술관을 이끌만한 인물이 미술계에 없다는 뜻인가. 외인부대의 낙하산을 보고 숱한 미술인들은 좌절감을 안아야 했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데에 있다.

  아니나 다를까. 미술을 모르는 관장 체제, 미술관은 표류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밖에 없는 국립미술관, 미술계를 선도해야할 국립현대미술관이 미술계의 꼬리에서 허덕거리고 있는 형상이다. 미술관이 담론 제공의 발원지가 되기는커녕 미술계 현안이나마 제대로 정리조차 못하고 있는 꼴이다. 전문성 부재의 미술관이 자초한 당연한 결과이다.

  문제는 이 같은 부적격 인사에 대해 누구 하나 속 시원하게 비판하는 인물이 없다는 것이다. 침묵은 동의라고 하지 않는가. 침묵은 아무 때나 금인 것은 아니다. 전문성이 최고의 가치로 존중되는 사회에서 살고 싶다. 이에 나는 미술관ㆍ관장 평가를 제도적으로 정착하기를 기대한다. 전국의 박물관과 미술관 관장들의 업무 결과에 따른 객관적 평가 제도를 기대하는 것이다. 관장 성적표를 공개하라(이를 위해 미술관 학회를 결성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비전공자들은 평가가 무서워서라도 관장 취임을 두려워 할 것이다.

  따지고 보면 관장 개인의 문제만은 아닐 수 있다. 우리 사회는 평가라는 부분과 친숙하지 않은 환경을 지니고 있다. 비판문화가 정착되지 않았다는 것,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는 신문을 보면서 제일 아쉽게 생각하는 것으로 리뷰의 부재를 든다. 행사 예고는 열심히 하면서, 그 행사의 결과에 대한 평가를 무시하는 관행을 지적하는 것이다. 전시평이나 공연평, 왜 한국 신문에서는 볼 수 없는가. 평가가 없이 무슨 발전이 있는가. 신문사마다 분야별 전속 평론가가 활동하는 시대, 언제 도래할 것인가. 언론이 비평의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면, 적재적소 문제는 항상 반복할 개연성을 가지고 있다.

 

윤범모 경원대 교수
  제비는 제비의 길이 있다. 독수리는 독수리의 길이 있다. 제비에게 독수리의 길을 가라고 하면 탈이 난다. 현재 전국의 박물관ㆍ미술관 관장들, 저 강원도 꼭대기부터 제주도까지, 과연 적재적소의 관장인지 냉정하게 따져 볼 필요가 있다. 업무 평가표의 공개를 두려워하지 않을 관장이 과연 몇 명이나 될지, 자못 궁금하다.

윤범모 경원대 교수,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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