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7 10:00 (토)
15년 만의 전면 改譯…오역․비문 바로잡고 해제 보완
15년 만의 전면 改譯…오역․비문 바로잡고 해제 보완
  • 김성도 고려대 교수
  • 승인 2011.01.20 11:1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책을 말하다_ 자크 데리다 지음, 『그라마톨로지』(김성도 옮김, 민음사, 2010.12)

프랑스 사상가 자크 데리다의 난해하기 그지 없는 『그라마톨로지』가 국내 첫 번역된 것은 1996년의 일이다. 김성도 고려대 교수(언어학과)가 번역했다. 당시 이 번역서는 적지 않은 오역 시비에 휘둘려야 했다. 오역뿐만 아니라 비문, 잘못된 서지 정보들이 즐비했다.

 ‘자크 데리다’라는 현란한 이름은 한없이 미끄러지는 미로와 같은 문장과 함께 번역의 한계를 보여줬다. 그리고 14년이 흘렀다. 김성도 교수는 1996년 번역본의 문제점을 의식해 이를 바로잡는데 공력을 집중했다.

김 교수는 “상당 부분의 내용에서 최초 번역을 다시 번역했다는 점에서 재번이라 해도 무방하나, 동일 역자에 대해서 재번역이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못한 것 같아 개역본으로 명했다”고 밝혔다.

『그라마톨로지』개역본은 번역의 가능성과 한계를 숙명적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번역가의 고민을 그대로 보여준다. 다음은 김성도 교수의 ‘전면개정판 옮긴이 서문’의 일부를 발췌, 게재한 내용이다.  

제1판 번역의 분량이 역자 해제와 역주를 포함해 약 650쪽이었던 반면, 이번 개정판의 분량은 1천쪽에 육박하는 방대한 분량이 됐다. 늘어난 분량에는 대폭 증가된 옮긴이 주와 보다 상세한 주제 분석을 담은 해제의 분량이 늘어난 것 외에도, 데리다가 각주에서 많은 경우에 개략적으로 또는 아예 서지 사항 자체를 생략해 책 제목 또는 논문 제목만 제시한 모든 1차 문헌의 서지를 일일이 확인해 고증하는 작업을 거쳐 완성시킨 참고 문헌 서지 작업을 비롯해, 그의 전기를 연보 형식으로 정리한 것이 포함됐다.

또한 다양한 언어 전공자들의 참고를 위해, 이 책에서 사용된 핵심 용어 600여 개를 선별해 프랑스어 원어와, 한국어, 영어, 독일어, 일본어, 중국어의 번역본에서 사용된 번역어를 대조하는 용어 대조표가 포함돼 있다.

또한, 데리다가 생전에 출판한 그의 저술 목록을 다양한 데리다 참고 서지를 종합해 작성했으며(하지만 데리다의 이름으로 출판된 저서의 정확한 수는 확정적인 것은 아니며, 그의 논문과 다양한 시론과 칼럼 등을 모두 아우르는 서지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상태이다), 저서들 가운데 한국어로 번역된 목록을 정리했다. 아울러 한국에서의 데리다 연구의 상황을 개괄한다는 취지에서, 한국어로 발표된 데리다 관련 연구물의 서지를 작성했다.

역자가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와 맺은 인연과, 그 인연으로 인해 경험한 바는 결코 범상한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있다. 박사 학위 논문을 준비하면서 이 책을 처음 만난 이후, 학위를 취득하고 국내에 들어와 우연히 대우 학술 총서의 번역 지원 목록에서 이 책을 발견하고, 별다른 생각 없이 지원해 선정된 후 약 4년 반 동안 고투 끝에 번역서를 내놓게 됐다.

당시 역자가 이 책에 대해서 갖고 있던 지식은 데리다가 해체 독법의 전범으로 선정한 소쉬르의 『일반언어학 강의』를 비롯해 옐름슬레우, 야콥슨, 마르티네 등을 포함하는 구조언어학과, 문자학에 대한 기초적 지식,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인류학에 대한 것이 전부였다. 이 책의 전반부를 차지하는 후설의 현상학, 하이데거의 존재론에 대한 지식은 거의 전무한 상태였다.

더구나 이 책의 절반을 차지하는 루소의 저술과 그의 사상에 대한 지식도 기초적 수준을 넘지 못한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뼈저리게 절감한 것은 데리다가 사용한 개념어들과 생경한 표현과 그의 독특한 조어 및 통사법을 한국어로 번역하면서 역자의 개인적 한계와 동시에, 한국어의 한계였다.

이 책을 번역한 후, 역자는 상찬에서 비난까지 극단을 오가며 선의의 비판과 질타와 동시에 원색적 비난 모두를 직간접적으로 접하게 됐다. 최초 번역에 대해서 역자 스스로는 절반의 성공과 절반의 실패라 자평해 본다.

성공의 내용은 데리다의 저술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가장 많이 인용되는 책을 최초로 번역해 내면서 데리다가 일부 인문학 전공자가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전공자들에게 새로운 지적 자극과 영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작은 동기 부여 내지는 촉매제 역할을 맡았다는 것이다. 아울러 데리다를 본격적으로 한국에 수용하는 데 작은 밑거름이 됐을 것이라는 기대를 걸어 본다.

반면, 최초 번역에서 노출된 적지 않은 오역들과 판독을 힘들게 하는 문장들로 인해서 일부 독자들에게 잘못된 정보를 제공하고, 불편을 끼친 것에 대해서는 자성의 마음을 표하고자 한다.

전면 개정판을 내기 위해서 훨씬 더 나은 번역서를 내야 한다는 큰 부담감을 갖고 프랑스 단어 하나, 문장 하나에 온 정신을 집중해 한국어로 옮기려 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넘을 수 없는 데리다 언어의 높은 ‘산’을 또 다시 경험했을 뿐이다. 가장 어려운 것은 데리다가 사용하는 기본 개념어들이 세 개 이상의 다의성을 지니고 있는 경우이다. 맥락에 따라서 하나의 의미로 좁혀지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어느 하나를 선정하기 불가능하고, 다의성 자체로 고유한 의미장을 구성하기도 하는 경우이다.

예를 들어, 이 책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인 에크리튀르문자, 문자 언어, 글쓰기 등)는 무려 천 번 이상 사용된다. 어떤 데리다 전공자는 용어의 일관성을 위해서 이런 경우, 동일한 한국어 번역어로 일관되게 사용할 것을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역자는 이 같은 일관성 논리에 동의할 수 없다.

이를테면 영어의 rice라는 단어를 일관성을 위해 ‘쌀’이라고 번역하면, 밥을 먹었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생쌀을 먹는 장면을 연출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하나의 단어가 전공 영역에서 제 각기 다르게 번역되고 있는 경우에 번역어의 일관성 논리를 지키는 것이 어려워진다. 이를테면 데리다가 이 책의 초반부에서 종반부에 걸쳐 주기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프랑스어 repr?sentation, repr?senter(동사)와 관련된 파생어들(repr?sentant, repr?sent?, repr?]sentative 등)이다. 문화 연구에서는 통상 ‘표상’으로, 미술사와 미학에서는 ‘재현’으로, 정치학에서는 ‘대표’로 옮겨지고 있으며, 언어학에서는 ‘표기’등으로 옮겨지며, 루소의 저술에서는 ‘대리’라는 의미가 강하다.

그런데 문제는, 적지 않은 문장들에서 이들 의미들 가운데 최소한 두 개 이상의 의미를 모두 머금고 있는 경우이다. 이를테면 소쉬르가 문자는 언어를 repr?senter한다고 말할 때, 역자의 판단으로는 단순히 ‘표기’라는 고전적 의미와 더불어, ‘대리를 한다’는 의미와 동시에 ‘재현을 한다’는 의미로도 얼마든지 이해될 수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에, 어느 특정 번역어가 맞고 틀리다는 이분법으로 갈라놓기 힘들다는 점이다.

또 하나, 지적할 것은 일부 표현이기는 하지만, 데리다가 사용하는 단어들 가운데 전혀 상반된 의미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는 경우에, 한국어로 어느 하나를 택하면 해석의 시각에 따라서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경우이다. 이를테면 aveuglant(명약관화한, 맹목적인), entamer(개시하다, 상처를 입히다)가 그런 경우에 속한다.

이 개정한을 내놓으면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는 기쁨에 앞서, 얼마나 더 나아진 번역서가 됐는지 걱정하는 마음도 절반이다. 하지만, 이 개정판은 결코 완벽한 번역이 아니라는 점에서, 독자제현의 날카로운 비판과 지적을 통해서 계속해서 수정 보완될 것임을 약속한다.

김성도 고려대·언어학과
필자는 파리10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95년부터 고려대 언어학과에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 『현대 기호학 강의』등이 있으며, 그레마스, 퍼스, 에코 등의 저서를 번역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