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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직한’ 역사의 접점 … ‘정체성’을 탐구하다
‘묵직한’ 역사의 접점 … ‘정체성’을 탐구하다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0.12.27 15: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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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대회로 본 2010년 우리 학계

2010년 한 해는 ‘묵직한’ 역사의 접점이 틀림없었다. 저무는 한 해의 끝에서 학계가 마련한 다양한 학술대회를 되돌아봤을 때, 경술국치 100년, 한국전쟁 60주년, 4·19 50주년 등과 같은 역사의 굴곡이 깊게 주름을 파고 있었다. 학술대회나 심포지엄 등이 좀 더 현재적인 고민의 흔적을 읽는 자리라고 한다면, 학계가 이들 큰 역사적 주제를 이 자리에 담아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구체적인 현안과 씨름하기도 했다. 미국발 금융위기의 여파를 고민하면서 한국경제의 향방을 묻는다던가, 이명박 정부의 각종 정책에 대한 평가를 시도하거나(한국교육학회, 한국정책학회 등), 한국 사회 깊숙이 형성되기 시작한 다문화 문제를 고민했으며, 세계체제의 새로운 중심축으로 부상한 중국에 대한 논의를 모색하고, 독일통일 20주년이 한반도 통일에 어떤 시사점을 줄 지를 따져봤다(통일연구원, 한독경상학회, 한국공법학회). ‘개헌’과 관련한 논의들도 있었다.

‘인문학 위기’ 담론이 불편하게 여겨져서일까, 새로운 인문학을 모색하는 논의도 올해 의미있게 진행됐다. 주로 HK사업단을 통해 전개됐다. ‘동아시아’는 여전히 중요 화두였다. 학회나 대학 연구소, 민간에서까지 동아시아를 사유하고자 했던 것은 기억할만한 일이다. 융합학문의 지평을 인지과학에서 찾는 시도도 값졌다. 비록 원칙적인 논의에서 머문 감이 있긴 하지만, 기초과학의 방향을 고민한 자리도 있었다. 

학문 연구의 정체성, 연구자의 정체성 문제를 논의 테이블에 올린 것도 특징적인 모습이었다. 사회학자의 역할 정체성을 따진 논의가 있었고, 영어의 세계화 추세에 따라 변방으로 밀려난 학문 연구의 정체성과 본질을 성찰한 자리도 있었다. 기존의 연구 방법론을 소장학자들이 쇄신할 것을 주문하면서 새로운 논의의 가능성을 모색한 학회들도 있었다.

정부가 학술정책에 팔을 걷고 나선 탓인지 학술대회는 점점 ‘국제화’했다. 올해 국제학술대회 개최도 눈에 띄게 늘었다. ‘국제’학술대회가 아닌 학술대회가 이상할 정도였다. 이는 장점 못지않게 문제점도 노출할 수 있는 현상이었다. 학술대회가 실질보다는 ‘외형’에 집착한다는 비판이 가능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굵직한 ‘세계적’ 규모의 학술대회가 서울에서 두 차례 열렸다.

경술국치 100년 조명 등 다양했지만

올해 논의가 가장 집중된 역사적 주제는 단연 ‘한일병합 100년’이었다. 한국전쟁 60주년, 4·19 50주년 기념 학술대회도 집중됐다.
한양대 현대영화연구소(소장 최영철)가 5월 15일 ‘경술국치 100년, 식민지시기 조선영화’를 주제로 학술대회를 마련한 이후 17개 역사학 관련 학회가 모여 공동 개최한 전국역사학대회가 5월 28일부터 이틀간 진행되기도 했다. 이들은 ‘식민주의와 식민책임’을 주제로 구체적 주제 탐색에 나섰다. 동아시아역사시민네트워크(대표 이장희 한국외대)는 6월 9일 ‘1910년 한일 강제병탄조약의 무효성, 불법성 및 일본의 국가 책임’을 주제로 학술포럼을 마련했다.

이어 한국정치외교사학회(회장 이재석 인천대)가 7월 2일 ‘국치 100년, 국권상실의 정치외교사적 재조명’을 주제로, 한국독립기념관(관장 김주현)·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소장 김상기)가 8월 5일 ‘경술국치 100년, 회고와 성찰’을 주제로 학술심포지엄을 개최했다. 한국역사연구회(회장 한상권 덕성여대)는 8월 20일 ‘강제병합 100년에 되돌아보는 일본의 한국 침략과 식민통치체제의 수립’을 주제로 식민통치체제의 실상을 상세하게 분석했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원장 노태돈 서울대) 역시 8월 27일 ‘강제병합, 100년 전을 되돌아본다’를 주제로 논의를 밀고 나갔다. 

올해 60주년을 맞는 한국전쟁과 관련해서는 연세대 동서문제연구원(원장 김기정)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현대한국연구소(소장 김복수)가 6월 25일 ‘한국전쟁 연구의 새로운 방향: 국내외 경험, 선전 정책 그리고 성격’을 주제로 개최한 제1회 국제학술회가 기억할 만하다. 주제에 명시된 것처럼 이들은 국내외 경험에 주목하면서 새로운 연구 방향을 도출하고자 했다. 그러나 학술대회가 명망가 중심으로 치러진 데다가 참여한 학자들 스스로가 자신의 논의를 반복하고 있어서 ‘새로울 것 없는’ 학술대회라는 비판도 제기됐다. 또한 전쟁 발발 60년이라는 연대기적 조명에서 벗어나지 못한 학술대회 프레임도 학술대회의 차별성을 확보하는 데 방해가 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간 국제사회에서 한국전쟁 연구는 미국과 일본, 러시아 등 해외 자료에 의존해왔다. 박명림 교수나 정미령 연구원 등이 국내의 자료 발굴과 학계의 학문적 균형회복을 강조한 대목은 이후 한국전쟁 연구에 관한 한국 학자들의 가능성을 시사한 대목으로 읽힌다.

‘인문학 위기’ 담론 그 뒤

올해는 위기 타령에서 벗어나 ‘새로운’ 인문학 모색에 발맞췄다는 게 인상적이다. 인문학이 우리 사회에 어떻게 형성됐는지를 조명한 연세대 국학연구원 인문한국사업단(단장 백영서)의 시도가 돋보였다. ‘1950년대 교양으로서의 인문학의 형성’(3월 16일), 그리고 ‘1960년대 한국사회의 담론과 지식인사회의 분열’(6월 8일)은 참신한 접근이었다. 1950년대 우리 사회에서 인문학이 대학 내에서 어떤 활동과 제도적 편제에 의해 정착됐는지를 분석하는 한편, 인문학적 교양의 형성 과정과 제도화를 결정하는 요소들은 무엇이었는지 등을 탐구함으로써 인문학의 계보를 추적한 점이 흥미롭다.

인문학의 새로운 모색과 함께 학문간 융합의 미래를 조명한 논의에도 주목할 수 있다. 한국인지과학회(회장 채희락 한국외대)가 5월 28일 마련했던 ‘인지과학과 21세기 융합 학문의 시대’는 전 학문 분야로 스며들어가 이들의 관계망을 재구축하는 ‘인지과학’의 가능성을 타진한 학술대회였다. 이정모 성균관대 명예교수는 “인지과학은 학제적 과학으로써 그리고 이론적 개념적 측면에서 융합의 전형을 보여줬다”고 말하면서 “최근에 인지경제학, 인지법학, 인지종교학, 인지문학, 인지미학, 인지음악학 등의 분야를 창출시켜 사회과학, 인문학, 예술을 포함하는 학문간 융합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강조했다.

한국문학의 세계화를 위해 번역 쪽에 지원하기보다 글로벌 학자 양성에 무게를 둬야 한다고 주장한 한국비교문학회(회장 정정호 중앙대)의 국제비교문학대회(8월 15일)도 흥미롭다. 흥미로운 까닭은 이 주장이 매우 상반된 해석과 부딪치기 때문이다. ‘한국문학의 세계화’라고 했을 때, 그것의 전체상이 무엇인지, 왜 세계화가 필요하며, 어떻게 세계화를 진행할 것인지 등은 여전히 논쟁적이다. 최근 한국번역비평학회(회장 전성기 고려대)가 ‘세계문학전집의 구조’를 주제로 진행한 학술대회도 유사한 문제의식에 걸려 있다.  

학문연구의 정체성을 묻다

올해 학술대회에서 놓칠 수 없는 장면은 ‘학자의 정체성’을 따진 부분이다. 비판사회학회(회장 정근식 서울대)와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소장 방인혁)가 8월 16일 ‘한국사회학의 사회학’ 을 주제로 진행한 학술대회는 이채롭다. 특히 이 자리에서 한국 사회학자들의 역할 정체성을 짚은 젊은 학문후속세대의 논의가 눈길을 끌었다.

선내규 박사(서강대)는 지난 40년간 한국 사회학자들이 수행해 온 자기성찰적 논의들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이런 논의들이 지닌 비사회학적 특성의 실체를 밝혔다. 뿐만 아니라 국내 사회학자 36명을 대상으로 자신의 역할 정체성과 학술문화에 대한 평가를 설문조사를 통해 정리했다. 이들 사회학자들 스스로가 내린 자기 비판은 뼈아팠다. 윤상철 한신대 교수(사회학)는 미국 중심의 주류 사회학이 한국 사회학을 지배하면서 사회학의 사회적 영향력이 위축됐다고 꼬집었다. 사회학은 엄연한 기초과학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특징은 간과된 채 응용학문과 도구적 경쟁에 나서면서 사회학의 쇠퇴가 가속화됐다는 분석을 제시했다.

불어불문학회는 점점 주변화되고 있는 이 학문에 종사하는 것의 의미를 진단하는 데 무게를 실었다. 한국불어불문학회(회장 전성기 고려대)는 12월 10일부터 이틀간 ‘21세기 동북아시아에서의 불어불문학 연구: 쟁점과 전망’을 주제로 국제학술대회를 개최, 이 같은 질문을 유효화해냈다. 이들은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위기를 맞고 있는 불어불문학 연구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점검하고, 위기극복을 위한 방안을 마련하고자 했다”고 밝혔다.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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