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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그마티즘의 관점에서 서구 정신주의의 ‘몸 경멸’ 비판
프라그마티즘의 관점에서 서구 정신주의의 ‘몸 경멸’ 비판
  • 이창남 한양대·독문학
  • 승인 2010.12.06 11: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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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슈스터만 지음, 『몸의 의식: 신체미학-솜에스테틱스』(이혜진 옮김, 북코리아, 2010.10)

『몸의 의식』은 미국의 철학자이자 미학자인 슈스터만의 두 번째 한국어 번역서이다. 『프라그마티즘 미학』이라는 책으로 처음 국내에 번역 소개된 슈스터만은 그 마지막 장을 ‘몸의 미학’이라는 주제에 할애하고 있다. 거기에서 그는 “모든 사람은 그 자신의 몸이라고 불리는 사원을 짓는 자이다”라고 말한다. 동양의 선불교나 요가 사상의 단면을 드러내는 듯한 이러한 언급이 듀이와 제임슨과 같은 진화론과 신경생태학에 기반한 철학자들의 사상에 선을 대고 있는 슈스터만의 주장이라는 점이 이채롭다.

칸트적인 풍토와 듀이적인 풍토

이 책에서 저자는 『프라그마티즘 미학』을 쓸 무렵 발아된 사상을 독일(비트겐슈타인), 프랑스 (푸코, 메를로퐁티, 보부아르) 등의 사상가들과의 논쟁적 접점을 만들면서 본격적으로 전개하는 계기를 마련하고 있다. 그의 기본적인 생각은 『몸의 의식』에서도 ‘프라그마틱’한 것으로 압축된다. 실천을 향해 정향된 그의 미학적 철학적 사상은 미적 체험을 윤리적, 인식적 체험과 날카롭게 구분해온 독일의 이상주의 미학과 논쟁적인 접점을 형성하고 있다.

칸트 이래로 미적인 것은 윤리적인 것과 인식적인 것과는 ‘다른’ 경험으로 인식돼 왔다. 독일 내에서 이러한 미적 자율성에 대한 미학적 담론을 윤리와 인식의 영역으로 확장해야 한다는 논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조심스러웠던 것도 사실이다. 왜냐하면 나치는 정치를 미학화하고, 신체를 정치적 훈육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상당히 왜곡된 방식으로 몸에 대한 ‘실천’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독일에서의 이러한 부정적 경험은 몸의 사회적 훈육과 자본주의적 왜곡에 대한 아도르노의 호르크하이머의 비판으로 이어진다.

몸의 실천에 대한 이러한 비판적 전통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미국에서는 오히려 그러한 이데올로기적 문제가 프라그마틱한 실천으로 미학과 신체철학을 확장하는 데 장애가 되지 않는 강점이 있다. 슈스터만이 적극적으로 신체미학의 실천을 주장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다른 문화적 토양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 『프라그마티즘 미학』에서부터 그는 전통 미학의 폐쇄성을 극복하고, 적극적인 실천학으로서 신체미학을 확장할 것을 제안한 바 있다. 그리고 『몸의 의식』에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한편 서구철학의 정신주의적 정향성이 낳은 몸에 대한 무관심 혹은 경멸을 반성하고, 다른 한편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에 대한 선견적 인식을 가진 사상가들의 사고들을 ‘프라그마틱’한 입장에서 비판하고 복구하면서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몸의 의식』에서 전체 6명의 사상가들과 논쟁하고 있는데, 슈스터만이 가장 많이 감화를 받았던 것으로 보이는 제임슨과 존 듀이에 대해서는 마지막 두 장을 할애했다. 듀이로 끝맺고 있는 이 책의 사상은 어쩌면 듀이에서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정서를 신경생리학적으로 정의’ 하려고 시도했던 제임스의 제자이자 진화론에 뿌리를 두고 있는 존 듀이에게 몸은 ‘광대한 세계의 모든 구조들 중 가장 훌륭한 것’이다. 그리고 생물학적 요인이 ‘미학의 뿌리’를 형성하고 있다. 이들은 개개 논의에서 차이를 보이지만 기본적으로 인간의 정서가 기본적으로 생물학적 토대를 갖는다는 사실에서 합의하고 있다.

반면 독일의 비트겐슈타인은 인간의 정서를 몸의 감각으로 환원하는 태도에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마찬가지로 프랑스의 메를로 퐁티 는 특히 몸의 지각에 중점을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반성적인 몸의 표상에 비판적이었다. 그럴 것이 몸이란 반성적 표상보다 더 근원적인 반성되지 않는 어떤 것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퐁티의 이러한 관점은 한편 몸에 대한 그의 주제적인 집중에도 불구하고 반성적 몸의 표상에서 출발해 몸의 실천을 강조하는 슈스터만의 입장에서 이의를 제기하게 되는 지점이 되고 있다. 몸에 대한 반성적 성찰과 반성에 기초하는 표상 없이는 몸에 대한 실천은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푸코, 왜곡된 실천일 수 있다”

그 밖에 여성의 몸과 노인의 신체에 관심을 기울였던 보부아르에게서 슈스터만은 몸이 철학적 인식적 논쟁의 영역에 그치지 않고 정치적 사회적 함의를 갖는 것으로 확장될 수 있음을 확인한다. 가부장적 사회에서 억압되고, 폄하돼온 여성의 몸, 그리고 젊은 세대의 몸의 가치에만 집중하고, 병과 노화를 겪는 노년의 몸에 부정적인 사회적 태도는 타인의 눈에 의해 강요된 표상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부정적 표상 역시 몸에 대한 의식과 실천을 통해서 교정될 수 있다고 슈스터만은 주장하고 있다. 끝으로 푸코의 새도마조히즘적 몸의 실천은 어쩌면 과도한 몸의 수행을 통한 왜곡된 실천일 수 있다는 그의 지적은 성에 대한 사회적 억압 즉 일종의 육체에 대한 억압을 수행적으로 교정할 수 있는 다른 길을 모색하고 있다.

몸에 대한 실천학의 기반을 닦고 있는 이 책은 영미권의 철학이 전통적으로 견지해온 경험심리학의 토대에서 몸과 몸에 대한 표상을 실천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탐색한다. 오늘날 사회의 외면적 가치들에 준거해 성형과 다이어트와 같은 몸의 왜곡된 실천들이 활개를 치는 세태 속에서 긍정적 의미의 실천과 개선의 길을 찾는 슈스터만의 작업은 숙고의 여지가 많아 보인다. 동시에 인종차별과 같은 몸의 정치와 연계될 수 있는 이론적 쟁점들을 일부 포함한다는 점에서 현재성도 있다. 아울러 이 책이 견지하는 실천과 개선이라는 패러다임이 강박하게 되는 불가피한 관점의 제약을 어떻게 극복할지 생각해 보는 것은 독자들에게 의미 있는 숙고의 여지를 남긴다.

분량이나 가독성의 측면에서 번역자의 수고가 많이 느껴지는 책이다. 하지만 주어와 서술어의 조응적 관계가 불안정하고, 사람과 사물을 지칭하는 대명사들이 종종 혼동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초보 번역자들이 흔히 간과하는 이러한 작은 오점들이 때로 독서를 방해한다. 몸의 의식도 언어를 통해서 더욱 명증해진다고 슈스터만은 말하고 있다. 책의 몸이 언어라면 좋은 책을 위해서는 ‘몸의 의식’ 만큼이나 ‘언어의 의식’도 좀 더 첨예해질 필요가 있겠다. 

이창남 한양대·독문학

필자는 베를린자유대에서 박사를 했다. 『아테네움 시대의 문학』, 『예술의 시대』(공저) 등의 저술이 있다.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HK연구단에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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