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6 12:50 (금)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말아야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말아야
  • 박배균 서울대·지리교육과
  • 승인 2010.11.15 13:4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학단협·교수신문 ‘학술정책 진단’ 연속기고] <끝> 국가의 학술·교육정책과 연구자율성

이미 2~3년 전에 유행한 말이지만 지금도 유효한 말이기 때문에 다시 한번 상기하면서 이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우리나라의 인문학은 위기다. 필자는 이 말에 100% 동의한다.

하지만, 필자가 보는 인문학의 위기는 철학, 사학, 문학 등과 같은 특정 인문학 분과학문의 위기가 아니라, 우리나라 학계 전반에 걸친 인문학적 사고의 위기다. 인문학의 위기는 전 학문분야에서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어, 사회과학 분야에서 사회이론, 정치사상, 경제사상, 공간이론, 도시이론, 문화이론 등과 같은 철학적이고 이론적인 분야에 대한 연구가 90년대 이후 급격히 침체되고 있다.

이들 분야에 대한 신규 교수의 충원도 어려운 형편이다. 실용적 학문만이 득세하고 순수이론적인 학문이 위기에 처하는 이러한 상황은 한국의 학문사회와 고등교육 전반의 발전을 심각하게 저해하는 요인이다.

순수학문의 위기를 초래한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필자는 그 중에서도 학자들의 연구 자율성을 저해하는 정부의 학술 및 교육정책의 문제를 지적하고자 한다. 특히, 국가와 시장으로부터의 이중적 지배를 강화하는 현재의 학술 및 교육정책은 연구자들이 순수학술활동과 기초연구보다는 국가 지배 엘리트와 자본의 이해와 필요에 부응하는 단편적이고 실용적인 연구에 내몰리게 강요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다.

1960년대 이후 국가주도 산업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체계화되기 시작한 우리나라의 근대적 학문과 고등교육은 국가관료들의 이해와 필요에 부응하는 실용화가 강요돼 왔고, 그 결과로 한국의 학자집단은 국가 관료들이 떡고물처럼 던져주는 정부용역 프로젝트에 길들여지면서 순수한 학술적 가치와 이상을 추구하는 아카데미즘의 전통을 수립하지 못했다. 이러한 척박한 학문적 환경은 2000년대 들어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학술·교육정책에 의해 더욱 더 악화되고 있다.

학술·교육정책, 국가·시장의 지배 심화

<교수신문>과 학단협이 공동으로 수행한 설문조사 결과와 앞서 연재된 칼럼에서 잘 지적됐듯이, 정부의 학술정책은 연구자의 학문적 자율성을 높여 순수학문과 기초연구의 육성에 기여하기 보다는 오히려 저해하는 역할을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놓여 있다. 이러한 학술정책의 문제와 더불어 반드시 지적돼야 할 것은 정부의 고등교육정책이 초래하는 문제들이다.

최근 정부가 의욕적으로 밀어붙이는 일부 국립대의 법인화법안과 여러 사립대에서 추진되는 구조조정의 사례에서 잘 드러나듯이, 대학은 그 자율성을 점차 상실하고 국가와 시장의 지배에 학문과 교육이 점차 시장화-상품화되도록 강요받고 있다. 이러한 대학교육과 학문의 시장화-상품화는 대학에 대한 정부의 시장주의적 개입과 간섭의 증대, 시장논리에 따른 대학교육의 재편, 실용적 학문으로 자원집중의 심화, 대학민주주의의 후퇴, 대학서열화와 격차의 심화와 같은 문제적 상황을 가져와서, 학문과 사상의 자유는 극도로 위축될 것이고, 순수학문과 기초적 연구는 고사적 위기상황을 맞이할 것이다.

정부와 일부 대학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세계일류 대학의 육성과 국제적인 학술적 경쟁력의 향상은 SCI나 SSCI 논문의 편수를 늘리거나, 노벨상을 획득하는 것과 같은 표피적이고 성과주의적 업적의 획득을 통해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학문사회에서 건전한 아카데미즘이 확립되고 그를 통해 순수학문과 기초연구 활성화를 통해 우리나라 학문의 자생력과 독창성이 강화될 때에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이를 위해 학술활동과 고등교육에 대한 국가와 시장의 지배를 강화하는 현재의 학술 및 교육정책은 근본적인 방향전환을 모색해야 한다. 필자는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하고자 한다.

‘세계적 경쟁력’의 출발점은

첫째, 정부는 고등교육의 기초 인프라와 교육 및 학술활동의 공공성을 견고히 구축하는 바탕에서 고등교육의 질적 수준을 높이기 위한 정책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 고등교육과 학술활동의 기초 인프라를 확충하는 문제는 대학의 건물이나 시설과 같은 하드웨어적 인프라를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대학의 교수, 대학원생, 강사, 연구원들이 마음 편히 학문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기본적인 제도적 장치를 갖추는 것을 의미한다.

 교수들이 제자들의 학자금과 생활비를 마련해 주기 위해 정부나 기업의 용역 프로젝트에 매달리지 않게 하고, 대학원생들이 생계비를 마련하기 위해 각종 아르바이트에 시달리지 않게 하며, 대학의 많은 강사들과 연구원들이 학문적 생존권을 위협하는 비정규교원제도에 시달리지 않게 하는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한국의 대학들이 세계적 대학이 되고 한국의 학문이 세계적 경쟁력을 갖추게 하는 가장 기본적 출발점이다.

둘째, 국립대 법인화 시도는 반드시 철회해야 한다. 국립대는 시장이나 국가관료의 필요에 복무하는 실용적 학문 보다는 기초학문·기초과학기술을 중심으로 한 대학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국립대는 우리나라 학문의 질적 성장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순수학문과 기초연구를 수행하고 교육하는 교육 및 연구기관으로 재정립돼야 한다.

셋째, 순수학문과 기초연구에 대한 정부의 지원을 대폭 확대해야 한다. 현재 한국연구재단이나 여타의 정부기관에서 주어지는 순수학문과 기초연구에 대한 지원은 우리나라의 학문이 처한 위기적 상황을 타개하기에 턱 없이 부족하다. 순수학문과 기초연구에 대한 지원을 늘리도록 강제하는 법률·제도적 장치와 재정적 지원이 마련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인문·사회과학 지원·육성법’과 같은 법안을 통해 순수학문과 기초연구에 대한 국가의 제도적이고 재정적인 지원을 강제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넷째, 앞의 방안들을 현실화하기 위해 정부는 고등교육에 대한 재정적 지원을 획기적으로 늘릴 필요가 있다. 현재의 정부 재정보다 적어도 2~3배 이상 확보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는 현실적으로 전혀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정부가 4대강 개발과 같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사업에 천문학적인 재정을 쏟아 붓지 않고, 그 재정의 일부를 고등교육에 돌린다면 이러한 재정의 확보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노파심에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더 붙인다면, 이러한 정부의 고등교육에 대한 제도적·재정적 지원의 확대가 학술활동과 교육에 대한 정부의 간섭을 정당화하는 것으로 이해돼서는 안 된다. 정부가 우리나라 학문과 고등교육의 진정한 발달을 원한다면,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는 말을 가슴 깊이 명심할 필요가 있다.

박배균 서울대·지리교육과

박배균 서울대·지리교육과

 

박배균 서울대·지리교육과

 

필자는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Political Geography> 편집위원, 한국공간환경학회 학술위원장을 맡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