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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지법 또는 발칙한 사이버스페이스, 樂園을 환기하다
축지법 또는 발칙한 사이버스페이스, 樂園을 환기하다
  • 김홍렬 성공회대 정보사회학
  • 승인 2010.09.24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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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축제란 무엇인가

축제는 노동과 더불어 인간 집단활동의 두 가지 기본 축으로 우리 삶의 전 분야에 걸친 중요한 키워드이다. 최근 『축제의 사회사』(한울)를 출간한 김홍렬 성공회대 외래교수는 이 축제를 새롭게 읽어내는 지적 모험을 감행했다. 그는 최근 전개되고 있는 사이버스페이스라는 가상현실 역시 이러한 축제의 해석학을 통해 전유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두식, 「축제」, Acrylic on canvas(10호). 기문둔갑술로 상징되는 16세기의 축제적 상상력이 오늘날 사이버스페이스 세계에서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엉뚱한 질문을 하나 해보자. 신의 세계에도 축제가 있을까. 시공간 제약을 받고 있는 우리의 상상력으로는 모든 것이 제한적이지만, 그래도 무모함을 핑계 삼아 답을 구해 보자. 모든 것이 완전한 신의 세계에 과연 축제가 필요할까.
축제는 일상을 전제로 하지만 일상 그 자체는 축제가 아니다. 일상을 벗어나는 순간에 축제가 시작된다. 그 일상에는 노동으로 고단해진 심신의 피곤함도 포함돼 있고 물질적 신체 구조의 한계를 절감하는 불안감도 포함돼 있다. 그러나 축제는 바로 이런 일상에서 출발한다. 매일 매일의 불안한 삶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이 축제의 시작이다.

삶이 피폐해질수록 인간은 더 많이 상상한다. 그 상상을 통해 신을 만나 현실의 고단한 삶에 대해 일시적으로나마 위로 받기를 원한다. 이런 갈망이 인간을 상상하게 하고 축제를 하게 만들고 술을 마시게 하고 엑스타시의 세계로 빠져들게 한다. 결국 축제는 상상의 시작이고 과정이고 결과이다. 축제를 통해 인간은 잠시나마 신의 세계와 접하게 된다. 그리고 신이 돼 다시 자신에게 힘을 주고 그 순간을 기억한다. 엑스타시 후에 다시 일상적 노동의 세계로 귀환하지만 이제는 그 상상의 힘이 남아 있어 버틸 수 있다. 상상은 때로 두려운 모든 것들을 환기시키는 작용도 하지만 이렇게 잠시나마 신이 됐던 기억을 상기시켜주기도 한다. 축제는 상상을 잠시나마 현실화시키는 이벤트다. 

16세기 홍길동, 그 둔갑술의 희망들

16세기 말 조선의 실정은 비참했다. 두 차례에 걸친 왜란 후에 남는 것은 폐허가 된 암울한 현실뿐이다. 살기 힘든 시대 홍길동이 나타났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홍길동은 한 명 뿐이다. 전라도에서 나타났다는 홍길동이 함경도까지 오려면 아직도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 이 때 허균의 상상력이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 홍길동은 둔갑술을 써서 7명의 홍길동을 만들었고 이들은 모두 축지법의 도사들이다. 백성들은 조선 팔도 어디에서든 홍길동을 만날 수 있다. 이제 백성들은 희망이 생겼다. 당장의 초근목피가 힘들기는 하지만 버틸 수 있다. 인간은 상상 속에서 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제 축제를 준비할 수 있다. 축제는 힘든 현실과 상상의 내일 사이에서 탄생한다. 둔갑술과 축지법이 이 기대를 가능하게 해 준다. 조선 중기 이후 민간에서 내려온 민담이나 설화의 주인공이 대개 홍길동과 유사한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런 흐름은 꽤 질긴 생명력을 갖고 조선의 근대사를 관통한다.

유물론에 바탕을 두는 공산주의에서는 모든 것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전제돼야 함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자 김일성의 항일투쟁 기록은 많은 경우 ‘신비로운 행적’으로 가득 차 있다. 역사의 발전 방향과 자본가 계급의 몰락, 공산주의 사회의 도래는 그저 낭만적인 환상 속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철저한 학습을 통해 단련된다. 노동자, 농민이 먼저 깨어 계급적 각성을 획득해야 한다. 그러나 과학적 유물론을 수입하기에는 식민지 조선에 남아 있는 홍길동의 전설이 너무 강했다. 자생적 근대화의 길은 조선 성리학의 보수성과 고루한 유학자들의 폐쇄적인 세계관에 의해 이미 그 맹아가 꺾여버렸고 조선의 백성은 근대 시민이 되지 못한 채 어느 날 갑자기 공산주의라는 과학의 세례를 받아야만 했다. 결국 조선의 백성은 공산주의의 전사로서 혁명적 사고관을 갖는 대신 둔갑술과 축지법에 의한 천지개벽을 원했다. 백두산 신화 속의 김일성은 솔방울로 폭탄을 만들고 가랑잎으로 군사를 실어 나르는 또 다른 홍길동이었다. 조선 민중의 상상력은 혁명전사의 이미지마저 둔갑술과 축지법 속에서 이해했고, 이런 상상을 통한 해결 방식이 당시로서는 가장 적절한 솔루션이었다.

상상에 의한 축제의 간접 체험은 시대를 초월해 존재한다. 지금은 모든 것이 과학의 이름으로 이해되고 분석되는 지식의 최첨단 시대다. 사람들은 더 이상 둔갑술이나 축지법 같은 요술을 믿지 않는다. 종교도 과학과 동떨어져서는 안 된다. 신앙이 할 수 있는 일은 마음의 위로 정도로 축소되고 만다. 그러나 인간은 그런 위로만으로는 결코 만족하지 못한다. 인간이 사는 시대는 늘 문제가 있고 문제가 있으면 사람들은 해결 방안을 찾아 나선다. 둔갑술과 축지법이 사라진 지금 사람들은 다시 시공간을 초월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사이버스페이스는 그렇게 탄생했다.

디지털 테크놀로지 시대의 가능성

사이버 공간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16세기 말 조선의 백성이 상상 속에서 문제해결의 가능성을 찾았다면 오늘 우리들은 사이버 공간에서 문제를 해결한다. 그곳은 현실이 아니지만 현실과 유사하게 운영되고 체험되는 가상현실이다. ‘나’는 다양한 모습의 아바타로 변해 여러 사람들과 만난다. 내가 홍길동이 된다. 가상공간에서는 둔갑술과 축지법이 자연스럽게 실현된다. 현실의 나와 가상공간 속의 내가 구별되지 않는다. 술과 춤과 노래와 상상이 만들어준 엑스터시의 세계, 현실의 나와 도취된 내가 하나 되는 경지를 이제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만들어 준다. 인터넷과 네트워크 게임, D3와 버추얼 콘텐츠는 각박한 현실을 잊게 해주고 엑스터시의 세계로 나를 안내한다. 오프라인 속에서만 존재하던 축제를 이제는 온라인 속에서 즐길 수 있다. 전설 속에서만 존재하던 축지법과 둔갑술이 사이버 공간으로 이동했고, 내가 그 주인공이 된다.

노동이 인간이 인간임을 끊임없이 확인시켜 주는 과정이라면 축제는 인간이 인간이 아닐 수도 있다는 하나의 가능성이다. 실락원 이전 인간은 인간이자 신이었다. 실락원 이후 오로지 인간으로만 남은 인간은 시공간의 제약 속에서 물리적 고통을 감당해야 생존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인간은 에덴의 추억을 결코 잊지 못한다. 잠시나마 신이었던 그 시절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죽어 다시 신이 되기 전까지 끊임없이 낙원을, 기쁨을 환기해야 한다. 축제는 그 기쁨을 잠시 맛보는 것이다. 상상이라는 대리 축제를 통해서 인간은 삶에 대한 마지막 기대를 포기하지 않았고, 늘 새 힘을 얻었다. 인간에 대한 믿음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우리는 늘 축제를 통해 다시 신이 된다는 그 믿음에서.

 

김홍렬 성공회대 정보사회학

필자는 성공회대에서  정보사회학 분야의 박사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성공회대 외래 교수로 있다. 지은 책에는『축제의 사회사』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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