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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비평] 월드컵 괴담
[출판비평] 월드컵 괴담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2.05.1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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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5-18 11:14:36
강성민 / 출판저널 기자

‘월드컵 특수’, ‘중국 특수’ 등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하지만 이는 출판동네와는 별로 상관없는 말이다. 앞으로 두달 간 콘텐츠 소비에서 신문과 텔레비전이 전권을 장악하면서 독서인구가 큰 폭으로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요즘 가장 호황을 누리는 아동출판을 살펴봐도 알 수 있다. 어린이책을 펴내는 출판사들은 5월 5일 어린이날을 전후해서 신간을 대량출하 해왔지만 이번에는 그 양이 많이 줄었다. 대체로 구간에 장난감을 덧붙여 파는 것으로 만족하는 분위기다.

월드컵 등 국가적 이벤트가 벌어질 때 가장 크게 영향 받는 출판 분야는 종합베스트셀러에서 비중이 높은 대중소설과 비소설류다. 기타 경제 관련 트렌디 도서, 인문사회 분야에서 지적 엔터테인먼트를 표방하는 역사서, 기행서 등도 몸을 사리고 있다. 베스트셀러에 의존해서 독서하는 습관을 가진 대중들은 월드컵 때 책을 거의 외면할 거라는 출판계의 공공연한 인식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책들은 행사기간을 피해서 전후방으로 배치하고, 시류에 영향 받지 않는 고전, 전공서, 전문서, 아동학습류들을 그 기간에 몰아 내는 소극적 경영으로 갈 것으로 예상된다.

‘축구’나 ‘월드컵’을 주제로 월드컵 특수를 노린 기획 출판물들도 예상외로 적다. 인문교양 차원에서 접근한 책은 ‘축구 전쟁의 역사’(이지북 刊) 단 한권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월드컵 100배 즐기기’ 같은 가이드북이나 ‘축구스타’ ‘월드컵 비화’ ‘월드컵 여행’ 등에 초점을 맞춘 가벼운 읽을거리들이다. ‘홍명보, 나카타 TOGETHER’(컬처라인 刊)의 경우 회사원들을 대상으로 한 경품행사에 참가하는 등 마케팅을 펼쳐봤지만, 축구공 같은 다른 경품에 밀려 거의 효과를 못보고 말았다.

출판사들은 월드컵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88올림픽 당시 맛본 패배의 쓴맛도 있고, 오히려 이벤트나 트렌드에 한번 휩쓸리다보면 출판사 내부의 기획 흐름이나 판매흐름이 깨지는 경향이 있다고 입을 모은다. 또 올해 같은 경우 월드컵 뒤에 대선이 도사리고 있어서, 월드컵이 진작시켜 놓은 축제와 여흥의 분위기가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오히려 월드컵이 끝난 후 나타날 경제적 상승효과를 노리는 기획물들이 경영서와 실용서를 주로 펴내는 출판사 사이에서 은밀히 진행중이다. 부동산이나 주식 관련 책들, 해외여행 가이드북, 요리와 취미 등 엔터테인먼트 도서들이 월드컵 이후에 쏟아져 나올 것으로 업계 관계자들은 예측하고 있다.

지난 4월부터 달리기 시작한 지하철 책열차 ‘2002 메트로 북메세’는 책과 월드컵을 결합한 대규모 이벤트다. 이 열차는 월드컵 기간 내내 외국 관광객들을 포함한 사람들에게 한국의 좋은 책들을 소개할 것이다. 책읽는사회만들기 국민운동 등 독서관련 단체들의 행사도 월드컵 기간에 몰려 있어서, 이것이 어느 정도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면 도서시장이 그다지 크게 위축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또, 최근 각 방송사마다 책 관련 프로그램을 방영하고 있는데, 월드컵 기간에는 사람들의 이목이 텔레비전에 집중되는 만큼 방송의 탄력도 어느 정도는 받을 것이다.

하지만 월드컵은 출판동네에 여러모로 도움이 안 된다. 늘 그랬듯이 가장 중요한 출간종수와 매출에서 하락세를 면치 못할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일단 스포츠를 속도감 있게 그리고 다채롭게 재현하는 출판의 매체적 경쟁력이 약하다는 것에서 찾아야겠지만, 출판계의 소극적 대응도 어느 정도 지적돼야 할 것이다. 아쉬운 것은 출판이 축구 관련 콘텐츠를 생산하는 방식이다. 즉, 실용서 출판사들이 축구 관련 도서를 독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팔아먹을 궁리’만 하거나 정보성에 그쳐 제대로 된 축구 교양서를 생산하지 못하고 있다.

최근 출판 편집자 사이트인 북에디터(bookeditor.org) 게시판에 올라온 한 익명의 글은 그런 정황을 잘 말해준다. 프리랜서 저널리스트이자 번역가인 그는 사이먼 쿠퍼란 사람이 22개 나라를 돌아다니며 축구와 정치의 관계를 사색한 에세이 ‘축구의 적(Football against the Enemy)’을 번역해서 여러 곳에 출판의사를 타진해봤지만 모두 거절당했다고 한다. 시장성이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한가지 예를 더 들자면 우리 축구가 발전하지 못하는 이유로 축구교육 시스템과 교육철학의 부재를 많이 꼽는다. 하지만 그런 점을 지적하고 대안을 제시한 출판물은 거의 없다. 출판계가 월드컵을 맞을 준비를 하지 못한 상태여서, 월드컵이 악재라고 한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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