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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적 지진의 한복판에서 홀로 불타고 찢겨졌던 그를 보라!
정신적 지진의 한복판에서 홀로 불타고 찢겨졌던 그를 보라!
  • 교수신문
  • 승인 2010.08.31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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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백년 논쟁의 사람들_ <7> 함석헌

‘근대 백년 논쟁의 사람들’ 일곱 번째 인물은 함석헌(1901.3.13~1989.2.4)이다. 철학 분야와 전체분야에서 각각 4표와 9표로 총 13표를 얻어 학자들의 가장 많은 추천을 받았다. 김재현 경남대 교수(철학)는 “함석헌은 사상의 폭이 매우 넓을 뿐 아니라 평화주의자로서 근대국가를 비판적으로 성찰했다”고 평했다. 함석헌은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 철학자, 문인, 사상가로서 한국 현대사상의 원류를 제공했다. 김상봉 전남대 교수(철학)와 박재순 씨알재단연구소장(신학)이 각각 철학과 신학 분야에서 함석헌 사상이 가진 논쟁점을 짚어봤다. 두 학자는 이 시대, 함석헌 사상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출처: 사단법인 함석헌 기념사업회

아마도 후세는 20세기 한국지성사를 긍정적으로 보자면 만남의 시대요, 부정적으로 보자면 혼란의 시대였다고 규정할 것이다. 또는 부정적으로 보자면 타자 속에서의 자기상실의 시대요 긍정적으로 보자면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 그렇게 낡은 자기를 상실하고 새로운 자기를 잉태한 시대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20세기의 이 양면적인 지성사적 의미는 아직 우리 자신에게 충분히 의식되지 않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자기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다른 어떤 일보다 어렵기 때문이다. 특히 새로운 생명이 잉태되는 것은 육체의 영역뿐만 아니라 정신의 영역에서도 처음에는 눈에 띄는 일이 아닌지라 자기 자신에게도 의식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들 대다수는 여전히 20세기 이후의 한국지성사를 단순히 서양학문을 학습한 시대로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다른 민족들이 서양문명과 만난 뒤에 어떤 정신적 굴곡을 경험하고 그로부터 어떤 새로운 통찰을 이끌어냈는지에 대해서는 탈식민주의다 상호문화철학이다 하면서 작은 것에도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도 바로 이 땅에서 일어난 동서양 문명의 만남과 충돌이 어떤 정신적 드라마를 연출했는지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교수신문>이 설문조사한 근대 100년 한국지성사의 주요인물이라고 내건 경성제대-서울대 동문명부에 그들과 아무 상관없는 함석헌이 가장 많은 표를 얻었다는 것은 늦었지만 한국의 학계가 조금씩 사람을 알아볼 줄 알게 된 것이라 해야 할까.

지난 몇 백 년은 사상의 대륙에서 서양판과 동아시아판이 격렬히 충돌하면서 한편으론 지진을 일으키고 다른 한편으론 산맥을 밀어올리기 시작한 시대다. 한 때 역사의 종말이라는 말이 유행한 적도 있었으나 그것은 한국의 ‘휴거소동’과 다름없는 유치한 발상일 뿐, 정치 경제적으로 중국과 미국의 본격적인 대결이 이제 시작이듯 정신의 지평에서도 동아시아와 서양의 만남과 충돌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함석헌은 그런 정신의 지각변동이 가장 높이 밀어올린 봉우리이다. 이런 의미에서 함석헌의 삶과 사상은 세계사적 사건이다.

자기상실을 통해 얻은 자기정립

우리 시대를 뒤흔든 정신적 지진 가운데서 영리한 사람들이 사류에 편승해 그때그때마다 안전한 곳, 곧 지배적인 정신에 자기를 내맡길 때, 함석헌은 그 지진을 피하는 법을 찾지 못하고 그 한복판에서 불타고 찢겼다. 그 어리석음이 그를 우리 시대의 가장 지혜로운 자로 만들었다. 자기분열 속에서 그는 평생에 걸쳐 자기가 누구인지 물어야 했기 때문이다. 동양도 서양도 아닌 자기, 기독교인도 유학자도 불교도도 아닌 자기는 누구인가. 그 물음에 대해 그는 자기가 아무도 아닌 까닭에 모두일 수 있다는 깨달음에 도달했다. 그것이 씨알의 자아의식이다. 인간이 하늘이요 가장 작은 내가 또한 전체라는 자각은 동학의 人乃天 이래 유영모를 거쳐 함석헌에 이르기까지 20세기 한국의 정신적 저류를 형성했던 근본사상이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그러한가를 또렷하게 말해준 사람은 함석헌이다. 씨알은 아무도 아니므로 모두이며, 아무 것도 아니므로 전체일 수 있다. 이를 통해 그는 우리의 자기상실을 뒤집어 새로운 자아인식과 자기정립의 가능성을 열어보였다. 이 주체성, 하지만 자기동일성 속에서 추구되는 홀로주체성의 아집이 아니라 타자성 속에서 자기를 비움으로써만 열리는 이 서로주체성의 개방이야말로 함석헌의 첫째가는 성취이다.

종교적 당파 넘어 보편적 만남 지평 열어

물론 이 자기의식이 아무런 내용 없는 추상적 언명 속에서 제시될 수는 없으니, 세계관적인 차원에서 그는 다른 무엇보다 기독교와의 대결 및 세계종교와의 대화를 통해 서로 충돌하는 신들의 세계 속에서 어떤 특정한 신의 종노릇도 거부함으로써 자기를 확립할 수 있었다. 그는 유교적 고전 교육을 받고, 장로교 신자로 기독교에 입문했으나 일본유학시절 스승으로 모신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의 영향 아래 무교회주의자가 됐고, 감옥에서 老莊과 불경을 읽고 네 종교 내 종교가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으며, 간디의 손에 이끌려 『바가바드기타』를 우리말로 번역했다. 말년에는 퀘이커에 심취했으나 그것은 더 이상 교리적 구속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는 청년시절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에 대해 수많은 글을 남겼는데, 그것은 세계사의 변방에서 탄생했던 원시 기독교가 어떻게 다시 세계사의 또 다른 변방에서 완성되는가를 보여주며 동시에 지양되는지를 보여준다. 함석헌의 스승이었던 우치무라가 교회를 버렸을 뿐 기독교를 버리지 못했던 것과는 달리 함석헌은 기독교적인 길을 끝까지 걸어 기독교를 넘어갔다. 그는 종교에서 아무 것도 고집하지 않음으로써 종교적 당파성을 넘어 참된 보편적 만남의 지평을 열었던 것이다.

대개 철학의 보편성은 지배적 권력에 기초한다. 그리스 철학자들이 추구했던 아르케(arche)의 원뜻이 권력이라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하지만 함석헌이 추구한 보편성은 민중성에 뿌리박고 있다는 점에서 이전의 종교와 철학이 추구했던 보편과 다르다. 우리는 이것을 특히 그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의 의의는 다른 무엇보다 한글로 씌어진 최초의 通史라는 데 있지만 단지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이 땅에 기독교가 들어와 맺은 가장 심오한 자기인식의 열매이다. 이 책에서 함석헌은 역사의 뜻을 묻는데 여기서 역사란 고난의 역사이다. 그러니까 그는 역사에서 패배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 곧 민중의 입장에서 도대체 역사와 삶의 뜻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철학은 처음으로 양반귀족의 철학도 시민의 철학도 아닌 민중의 철학으로 낮아졌다.

하지만 함석헌 사상의 주체성과 민중성이 아무리 독보적인 것이라도, 그의 사상의 현대성이 없었더라면 새로운 사상의 정립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대개 철학자의 지혜는 앞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반추하고 해석하는 데서 드러난다. 그러나 함석헌은 옛길을 통해 앞길을 밝힌 참된 온고지신의 철학자였다. 그는 민족국가의 의미를 누구보다 명확히 인식한 사람이었으나 또한 민족국가의 수명이 다했음을 깨달은 세계주의자였다. 새로운 세계는 자본주의도 공산주의도 아닐 것이니, 그는 한반도의 통일이 과거 민족국가로의 복귀가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개방하는 세계사적 사건이 되리라고 믿었다. 그리고 남들이 과거의 진화과정을 두고 창조냐 진화냐 설왕설래할 때, 그는 앞으로 우리들 자신이 책임져야 할 진화의 방향을 고민하면서 기술문명의 의미를 되묻고 인간과 자연 그리고 뭇 생명의 보편적 화해를 추구했다. 그리고 이런 모든 미래적 전망에 입각해 그는 낡은 종교와 철학 그리고 윤리 도덕을 쇄신하려 했다. 나는 이런 철학자를 달리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그가 학자들에게 무시돼 온 까닭 가운데 하나는 그의 글이 읽기 쉽기 때문이다. 복음서가 쉽고, 논어가 쉽듯이 그의 글도 모두에게 열려 있다. 그는 학자가 아니라 민중의 친구가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 꾸밈없는 그의 글은 荊山의 璞玉이다. 그 보석을 갈고 다듬는 것은 이제 우리에게 남겨진 일이다.

김상봉 전남대·철학

필자는 독일 마인츠대에서 박사를 했다. 주요 논문으로는 「함석헌과 주체성의 문제」, 저서로는 『서로주체성의 이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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