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7 02:25 (토)
[책갈피_ 다시 읽는 名文] 율곡, 학문을 말하다
[책갈피_ 다시 읽는 名文] 율곡, 학문을 말하다
  • 교수신문
  • 승인 2010.08.31 15:5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사람의 식견에는 세 단계가 있습니다. 성현의 글을 읽고 그 명목을 이해하는 것이 첫 번째 단계입니다. 성현의 글을 읽어 명목을 이해한 사람이 다시 깊이 생각하고 정밀하게 살피면, 그 명목의 이치가 마음과 눈 사이에 뚜렷이 있다는 사실을 퍼뜩 깨우칠 것입니다. 그러면 성현의 말씀이 과연 나를 속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두 번째 단계입니다.

다만 이 단계에는 여러 층위가 있습니다. 한 가지 단서만 깨우친 사람도 있고 전체를 깨우친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전체를 깨우친 사람 중에서도 깨우침의 깊고 얕은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둘 다 입으로만 읽고 눈으로만 본 것에 비할 바가 아니라, 마음으로 깨우친 것이므로 모두 두 번째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명목의 이치가 마음과 눈 사이에 뚜렷이 있다는 사실을 깨우친 사람이 직접 행동해 아는 것을 실천에 옮긴다면 급기야 직접 그 경지를 밟고 몸소 그 일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눈으로 보고 마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된 다음에야 비로소 참된 지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가장 낮은 단계는 다른 사람의 말만 듣고 따르는 것이고, 중간 단계는 바라보는 것이며, 높은 단계는 그 땅을 밟고 직접 보는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이러하지요. 여기에 높은 산이 하나 있습니다. 산 정상은 경치가 매우 빼어나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한 사람은 그 산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 채 남의 말만 듣고 믿습니다. 누군가 산 정상에 물이 있다고 하면 물이 있다 여기고, 누군가 산 정상에 바위가 있다고 하면 역시 바위가 있다 여기겠지요. 직접 보지 못하고 남의 말만 따르므로 어떤 사람이 물도 없고 바위도 없다고 하면 그것이 정말인지 거짓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의 말이 일치하지 않고 자기 의견이 정해지지 않았으니, 어쩔 수 없이 사람을 골라 그의 말을 따르게 됩니다. 믿을 만한 사람이라면 그의 말도 믿을 만하겠지요. 성현의 말씀은 반드시 믿을 만하니 어김없이 따르면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말씀을 따르더라도 그 뜻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믿을 만한 사람의 말을 잘못 전하는 경우라도 따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지금 학자들의 도에 대한 소견 역시 이와 같습니다. 성현의 말씀만 좇을 뿐  그 뜻을 알지 못하므로 그 본뜻을 잃어버리는 사람도 있고 잘못된 기록을 보고서 억지로 맞추어 따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직접 보지 못하였으니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산이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됐다고 합시다. 그 사람이 고개를 들어 바라보면 산 위의 빼어난 경치가 눈에 가득 찰 것입니다. 직접 바라보았으니 다름 사람들이 잘못 전한 말이 어찌 그를 동요시킬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되면 빼어난 경치를 좋아한 나머지 반드시 그 땅을 직접 밟고자 산 정상에 오르려는 사람도 있을 것이요, 그 경치를 직접 보고나서는 좋아하면서 그저 말만 좇아다니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저도 모르게 박장대소하고 있지만, 여기에 만족해 산을 오르려 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산을 바라만 보는 사람들 중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동쪽에서 그 동쪽 면을 보는 자가 있고, 서쪽에서 서쪽 면을 보는 자가 있으며, 동쪽과 서쪽에 구애되지 않고 그 전체를 보는 자도 있습니다. 한쪽만 보았는지 전체를 보았는지 하는 차이는 있지만 이들은 모두 직접 본 것입니다. 직접 보지 않고 남의 말을 따르는 사람도 전체를 말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말이 아니라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전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어찌 한쪽 면만이라도 직접 바라본 사람의 마음을 감복시킬 수 있겠습니까?

대체로 이와 같은 세 단계가 있습니다만, 그중에도 곡절이 있어서 일일이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그 산이 있는 곳을 먼저 알고서 비록 바로비지 못했더라도 산을 오르는 일을 그치지 않으면 하루아침에 산 정상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발과 눈이 함께 도달해 곧 자신의 것으로 만들게 됩니다. 曾參이 그러한 사람입니다. 또 그 산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다가 우연히 산길을 만나 산을 오르게 됐지만, 애당초 산을 알지 못한 데다 산 정상을 바라보지도 않았기에 끝내 산 정상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司馬光이 그러한 사람입니다. 이와 같은 사람들을 어찌 다 열거하겠습니까?

이렇게 비유하자면 요즘 학자들은 대부분 남의 말을 따르는 사람일 것입니다. 비록 별 탈 없는 말을 할 수야 있겠지만 겉모양을 따라 흉내를 내는 것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겉모양을 따라 흉내를 내면서도 별 탈 없는 말을 하는 사람조차 많이 볼 수가 없으니 더욱 한탄스럽습니다.

□ 이 글은 『글로 세상을 호령하다』(이종묵 지음, 김영사, 2010. 7)에 수록된 율곡 이이의 「등산과 학문은 무엇이 같은가」에서 발췌 수록한 글입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