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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축제와 현대 일상의 비극
[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축제와 현대 일상의 비극
  • 이창남 서평위원 / 부산대·독문학
  • 승인 2010.07.26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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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암동에 가면 큰 공이 하나있다. 월드컵 경기장 주변에 만들어진 ‘공’ 형상의 조형물이다. 그 조형물을 볼 때마다 우리시대의 우상을 마주하는 느낌이다. 공은 수만의 인파를 서울 시청 앞 광장에 모으고, 수만의 인파를 부산의 해운대에 집결시킨다. ‘공’이 아니라면 어떻게 모래알 같은 개개인들이 개인성의 틀을 벗고 엑스타시스를 체험하겠으며, 어떻게 이 많은 사람들이 하나가 되겠는가. 그렇게 보면 ‘공’은 자아의 좁은 테두리와 복잡한 세계의 구획들을 한꺼번에 날려버리는 초자아적 집단의 축제를 주재하는 우리시대의 우상이 되고 있는 것 같다.

공이 상암동에 신상처럼 서 있는 것이 전혀 어색해 보이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사람들은 공이 만드는 축제를 통해서 사회적 유대의 끈을 확인하고, 개인들은 개체성을 벗어나 사회적 합일의 경험을 하게 된다. 이런 역할은 고대 사회에서는 신화가 하던 역할이었다. 현대의 새로운 신화는 어쩌면 축구공이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동차의 좁은 쇠울타리 속에서 고속으로 서로를 비껴가는 사람들, 아파트 칸칸이 나누어진 개개인들의 방속에서 이웃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 사무실 책상을 하나씩 차지하고 섬처럼 침잠하는 사람들, 오늘날 우리는 점점 더 견고해져가는 개체성의 굴레 속에 살고 있다. 그러나 어느날 갑자기 아파트 벽이 무너질듯 소란스럽고, 사무실과 거리가 열광하고, 맥주집 테이블 칸막이를 없애고 하나가 되는 현대의 드물고도 특이한 축제의 순간 한 가운데에는 어김없이 ‘공’이 있다.

어떻게 보면 ‘공’은 마치 니체의 『비극의 탄생』에 나오는 디오니소스 같다. 광란의 축제를 주관하는 이 신은 그의 대척자로 개체성의 원리를 대변하는 아폴론을 압도한다. 아폴론은 디오니소스의 혼돈과 광란의 바다 위에 떠있는 한조각 조각배에 불과하다. 개체성과 합리성을 한꺼번에 초월하는 디오니소스적 도취와 열광을 우리는 오늘날 수많은 ‘공’의 팬들에게서 확인하게 된다. 붉은 옷에, 번쩍이는 뿔을 달고 다니는 사튀로스들, 인디언 부족처럼 얼굴에 국기를 그리고 있는 여성과 아이들. 이들에게서 이성의 시대를 넘어 신화의 시대가 새로 도래한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은 우연일까. 게임이 끝나면 물론 우리는 다시금 계획된 합리적으로 구획된 공간으로, 계약된 사무실의 세계로, 관습적인 윤리와 도덕의 세계로, 아폴론의 빛의 세계로 되돌아간다.

막스 베버 이래로 주제화돼온 신화와 이성의 변증법을 오늘날 새로 쓰자면 스포츠, 영화 등 현대의 대중 축제들을 빼놓고는 이야기하기 힘들 것 같다. 전세계를 떠들썩하게 하는 월드컵과 1천만 명 이상의 관객을 모으는 영화를 생각하면, 한 때 민주주의를 외치며 금화터널에서 시청까지 대로를 가득메우던 수십만 대중들의 변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근대적 자유의지로 이념을 생산하고, 그 이념 아래 모여 사회를 보다 나은 것으로 바꿔가고자 하는 역사철학적 기획의 주창자들은 90년대 이후 국내에서 그 대중적 주체세력이 증발해버린 듯한 현상 앞에서 당황해하고 있다. 반면 현대축제의 유희와 오락은 수많은 군중들을 모으는 마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현대의 대중들은 이념보다는 유희를 원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순응주의, 니힐리즘, 현실주의 따위의 수사로 그러한 현상을 진단하는 것은 이념과 역사에 경도된 근대적 사고의 강박은 아닐까. 현대의 축제는 물론 『계몽의 변증법』에서 아도르노가 비판하듯이 자본주의 체제와 공모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공모적인 연관성만으로 현대의 축제를 평가하기에는 어딘지 부족해 보이는 면이 없지 않다. 일군의 프랑스와 영미권의 사상, 가령 세르토의 『일상의 발명』, 피스크의 『대중문화론』 등은 독일의 비판이론이 주도했던 현대 대중에 대한 경직된 이데올로기 비판을 경계하고 있다. 독일의 진지함과 프랑스, 영미권의 쾌활함이 대조를 이루는 이러한 지적 논쟁의 전통 속에 최근 국내에 번역 소개된 마페졸리의 『영원한 순간』은 또 하나의 의미 있는 숙고를 보태고 있다. 

그는 현대적 일상 속에 나타나는 디오니소스적 도취와 열광에 주목하면서 현대인의 쾌락을 근대적 당위의식과 역사의식으로 재단하지 말 것을 권유한다. 그 쾌락은 역사의 진보라는 이념적 시간과는 달리 끊임없이 회귀하는 순환적 시간 속에 삶과 일상에 대한 긍정을 위한 활력이다. 동시에 그것은 삶의 덧없음과 순간성에 대한 포스트모던 부족들의 비극적 인식의 반전이다.

니체는 ‘여기에 살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여기에 살고 있으니까’라고 말한다. 삶에 대한 니체의 이 역설적 긍정은 현재를 부정하며 미래의 이념에 투신해온 근대적 윤리와 달리 육감적이고 생생한 현재에의 몰입, 즉각적이고 생기발랄한 순발력, 게릴라적인 창조성과 같이 ‘공’처럼 튀는 포스트모던한 삶의 윤리로 숙고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운명을 받아들임으로써 삶에 몰입하는, 그래서 때로는 축제의 향연 속에 비극적 운명을 이기기도 하는 오늘날 대중의 독특한 삶의 방식이 보여주는 어떤 가능성과 결부되기 때문이다.

이창남 서평위원 / 부산대·독문학

필자는 베를린자유대에서 박사를 했다. 『아테네움 시대의 문학』, 『예술의 시대』(공저)등의 저술이 있다. 부산대HK로컬리티 인문학 사업단에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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