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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과학자가 먼저 이해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사회과학자가 먼저 이해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 이기홍 강원대·사회학과
  • 승인 2010.07.26 11: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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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 로이 바스카 지음, 『비판적 실재론』(이기홍·최대용 옮김, 후마니타스, 2010)

‘비판적 실재론’은 1970년대 후반에 영국의 철학자 로이 바스카(Roy Bhaskar)가 제기하고 이후 발전한 과학철학의 이름으로, (자연)과학이란 어떤 특징을 갖는 지식탐구 활동인가를 밝히는 ‘초월적 실재론’과 인간과 사회에 대한 과학은 어떤 특징을 갖는 지식탐구 활동인가를 밝히는 ‘비판적 자연주의’를 축약한 것이다. 비판적 실재론은 20세기의 3분의 2를 지배해 온 실증주의 과학철학에 대한 비판의 맥락 속에서 등장했다.

1950년대 후반부터 비판받은 실증주의 과학철학은 이제 ‘죽은 개’로 취급될 만큼 논의 지형이 변했지만, 그 잔재는 강고하게 남아있다. 과학을 관찰과 실험으로 자료를 수집하고 일반화를 거쳐 이론을 구성하는 또는 이론에서 가설을 연역하고 가설을 경험자료로 검증하는 활동으로 간주하는 통념은 그것의 핵심이다. 실증주의 비판의 과정에서, 경험은 이론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 경험으로 이론의 진위를 판정하기 어렵다는 점, 과학적 지식이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점, 과학의 추론이 복합적인 논리를 사용한다는 점 등이 지적됐지만, 인간 및 사회 과학자가 이런 통찰을 실제 연구에 접목하는 사례는 찾기 어렵다.

그런데 실증주의 비판은 과학이 ‘객관적 진리성’을 갖는다는 환상을 붕괴시키는 데에서 멈추지 않았다. 협약주의 과학철학의 주창자들은 한 이론과 그것에 뒤이은 이론이 ‘비교불가능하며’ 이런 이론들 사이에서 합리적 선택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지식의 대상을 논의에서 소거하는 이런 견해는 이론에서 독립된 세계의 존재를 부인하고, 과학의 객관성이나 합리성을 부인하는 회의주의로 나아간다. 결국 이 견해는 인간이 ‘알고 있는 것’(인식의 차원)을 ‘세계에 존재하는 것’(존재의 차원)이라고 믿으면서 존재의 독립적 실재성을 부인하고 존재의 영역을 인식의 영역으로 부당하게 환원했다. 이런 환원과 회의주의는 탈근대주의 담론에서 특징적으로 만개했다.

실증주의 비판과 과학적 지식

후기 실증주의 과학철학의 이러한 회의주의적이고 패배주의적인 귀결에 직면해 바스카는 과학적 지식의 생산과 그것의 객체(또는 준거)를 구별함으로써 그것의 합리적인 통찰을 구출한다. 과학적 지식은 특정한 사회형태들 속에서 구성되지만, 지식의 대상은 그 지식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과학적 지식은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대상으로 인간이 ‘알아낸 세계’이다. 두 세계는 구분되고 상이하며, 인간은 ‘알아낸 세계’를 통해서만 ‘있는 그대로의 세계’에 접근할 수 있다. 비판적 실재론은 이 ‘상식적인’ 구별을 기초로 과학에 대한 더 진전된 이해를 제공한다.

과학의 실제를 분석해보면, 세계는 물리화학적, 생물적, 심리적, 사회적 층위 등 여러 층위로 구분되며, 상위의 층위는 하위의 층위들의 요소들로 구성되지만 그 요소들의 성질로 환원할 수 없는 고유의 발현적 속성을 갖는다는 것, 특정의 속성과 힘을 가진 객체가 존재하더라도 적절한 조건이 주어지고 다른 객체들의 간섭이 없어야 특정의 현상을 발생시킨다는 것, 그러므로 세계에서 인과기제의 영역과 사건의 영역과 경험의 영역은 구분된다는 것 등의 존재론적 전제가정을 찾아낼 수 있다. 사회세계에는 개인의 생물학적이거나 심리학적인 층위로 환원할 수 없는 고유의 층위가 존재하며, 사회현상의 발생에 작용하는 이 층위의 실재들이 인간 및 사회 과학의 연구 대상이 된다.

과학적 탐구는 (부분적으로) 일정한 유형의 경험적 증거들을 판별해낸 다음 그런 경험을 발생시킨(것으로 추정되는) 세계 속의 실재들 즉 인과적인 힘들이나 기제들을 찾아내어 경험을 설명하는 활동이다. 이점에서 과학의 핵심은 ‘경험에서 (사유 속에서) 실재의 재구성으로의 도약’에 있다. 그런데 세계에 존재하는 실재들은 직접 관찰하기 어렵기 때문에 과학자들은 사유능력을 사용해 실재의 존재와 속성을 추정하고 확인하고자 시도한다. 이 과정에서 사용하는 ‘과학적 방법’으로는 실증주의가 강조하는 귀납, 연역 및 검증 등과, 실증주의 비판의 맥락에서 확인된 유추와 모델구성, 가추(abduction), 역행추론(retroduction) 등을 열거할 수 있다. 더불어 비판적 실재론은 과학이 복합적인 사건의 과정을 그것의 구성 요소들로 분해하고, 각 기제에 대한 이론에 입각해 구성요소들을 재서술하며, 구성요소들의 원인을 되돌아 지시하며, 가능하지만 부적합한 다른 원인들을 제외하는 네 단계로 진행하는 것으로 분석한다.

그리고 이런 작업을 통해 과학자가 ‘알아낸’ 실재들은 세계 속의 ‘있는 그대로의’ 실재들과 유사할 수도 있고 상이할 수도 있다. 인간 사유의 생산물인 과학적 지식은 언제나 오류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며, 인식적 실천의 발전과 함께 기각·수정·발전될 수 있다. 그렇지만 이것이 모든 이론이 동일한 정도로 오류가능성을 갖는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과학의 역사는 ‘설명력’이 더 뛰어난 이론이 다른 이론들을 대체해 왔음을 보여준다.

한국 사회과학의 현주소

한국의 학계는 과학에 대한 이러한 분석에 거의 관심을 갖지 않는다. 이점은 대학의 교육과정 등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상황이 한국 학계가 ‘과학이 무엇인가’에 대해 충분한 또는 적절한 이해를 갖추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은 결코 아니다.

관념 수준에서는 ‘패러다임’이니 ‘연구프로그램’이니 하는 후기(post)실증주의의 개념들을 언급하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경험적 조사의 실시, 또는 가설연역적 방법의 준수, 심지어는 통계적 방법의 사용이 곧 과학이라고 믿고 실행하는 연구자가 허다한 것이 솔직한 현실이다(이 현실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논의가 필요하다).

그러나 ‘과학이 무엇인가’에 대한 적절한 이해를 갖추지 못한 연구자가 인간과 사회에 대한 ‘과학적 연구’를 성공적으로 실행할 수는 없을 것이다(자연과학은 대상이 특정돼 있고 방법이 확립돼 있기 때문에 사정이 다르다). 인간과 사회에 대한 과학적 연구의 수준이 높지 못한 한국 학계 현실의 가장 중요한 요인은 이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그리고 (현실은 정반대 방향으로 치닫고 있지만) 이 때문에 인간과 사회에 대한 ‘과학’을 추구하는 연구자는 먼저 과학에 대한 이해를 갖춰야 하며, 『비판적 실재론』 공부는 이런 숙제의 수행에 기여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이기홍 강원대·사회학과

필자는 서울대에서 박사를 했다. 주요 논문으로는 「사회현실과 사회이론」, 역서로는 『비판적 실재론과 해방의 사회과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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