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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들의 풍경] 『세계의 비참』(부르디외 外 지음, 김주경 옮김, 동문선 刊)을 통해 본 사회과학 연구의 방
[책들의 풍경] 『세계의 비참』(부르디외 外 지음, 김주경 옮김, 동문선 刊)을 통해 본 사회과학 연구의 방
  • 교수신문
  • 승인 2002.05.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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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5-07 13:30:30

안현효 / 탐라대·경제학

‘세계의 비참’이라는 책을 보았을 때, 필자는 책의 제목을 ‘세계화의 비참’으로 착각했다. 원문을 보니 ‘비참한 세계’라고 이해해야 옳았을 법한데, 왜 ‘세계화의 비참’으로 읽었을까. 그러나 세 권의 방대한 책을 모두 읽고 나니 ‘세계화의 비참’이라고 읽어도 무방하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주로 프랑스(미국도 일부 포함돼 있다)의 빈곤 지역 또는 빈곤층을 포함한 다양한 사회계층에 대한 조사연구 보고서이다. 이 책의 특징은 다른 여타의 보고서와는 달리 어떤 결론을 내리지 않고 선진 자본주의 나라 프랑스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비참의 영역에 사는 사람들이 자신의 처지를 스스로 묘사하도록 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판단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각기 자신의 관점에서 읽고 판단할 자유를 갖고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필자가 느끼기에 독자의 감상 또는 인상이 크게 다를 것 같지는 않다. 이는 이 책이 독자적 방법론을 드러내어 강조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독자에게 일관된 메시지와 이미지를 전달하는 데 크게 성공하고 있다는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어둠을 더 어둡게 하는 선진국화 비판

우선 독자의 감상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이 책에서 대부분의 응답자들은 지난 과거에 비해 최근 십수년간 빈곤이 증대하고 삶이 고달파졌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시카고 흑인 게토에서의 인터뷰에서도 명료하게 드러난다(316쪽). 여기서 응답자는 1980년대부터 마약거래가 활성화돼 그 지역이 초토화됐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프랑스 빈곤층의 변화에 대한 인터뷰 결과와 상당한 유사성을 보여준다. 이러한 서술이 책의 도처에서 발견되는데, 시기적으로 이 시기는 선진 자본주의 나라에서 신자유주의가 광범위하게 채택돼 유포된 때이므로 이를 신자유주의의 효과로서 파악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339∼349쪽). 신자유주의가 선진국에서 빈곤층에 미친 파괴적 영향은 이 책의 전체에서 드러난다.

또한 이 책에서 묘사하고 있는 사실로 인해 우리들은 선진국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 심각하게 질문하게 된다. 선진국에 대한 우리의 일상적 이미지는 깨끗한 환경, 우월한 문화, 첨단적 도시공간인데 이 책은 빈곤 지역이 선진국에서 제도적으로 분리돼 양성되고 있다는 사실을 아주 적나라하게 구체적으로 보여줌으로써 비록 예전에 이를 알고 있었던 사람들도 충격을 받는다. 물론 여기에는 인종적 차별 또는 이민의 문제가 결합돼 있어 우리나라에 바로 적용하기 어렵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진행되는 세계화는 자본의 세계화에서 시작하지만, 결국 사람의 세계화로 나아간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나라 역시 예외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라는 물결을 우리나라가 회피해 갈 수 없다면 이 책에서 묘사하는 어두운 미래 역시 회피할 수 없다는 점을 암시한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빈곤의 문제가 단순히 경제적 차원이 아닌 삶의 문제라는 점을 보여준다. 분명히 빈곤은 경제적 문제이다. 따라서 해결도 경제적 급부를 통해 해결해야 할 것 같은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암시가 주어져 있다. 빈곤은 다른 차원에서는 자존심의 문제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는 부르디외가 자신의 사회학 방법론에서 주로 다루는 경제결정론에 대한 비판(또는 구조주의에 대한 비판), 문화자본, 상징자본에 대한 강조와 일맥상통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 점을 정책과 연관지어 보면, 부르디외가 추신(1521∼1525쪽)에서 맹렬히 비판하고 있듯이 정치가와 정책입안자, 관료, 지식인, 기자들이 사람들의 삶의 구체적 부분에 대해 전혀 모른 채 자신의 편견에 사로잡혀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를 뿐인 정책만을 추진하는 것을 비판하는 효과가 있다. 사실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이 책에서의 묘사를 통해 우리는 그러한 문제들이 비록 경제적 문제들에서 출발하나 그 해결책은 경제적인 차원에서 그쳐서는 안되고 정치·사회적, 심리·문화적 영역에서도 정교하게 다뤄져야 함을 알게 된다. 이른바 정책의 미시적 섬세함이 부르디외가 주목하는 계급적 문제 의식과 결합돼야 보다 선진적 삶을 위한 조건을 창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감상들은 필자뿐이 아니라 이 책을 읽는 다른 독자들도 (만약 이 책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공감하게 될 텐데, 이 감상은 곧 우리나라의 제반 문제와 관련하여 많은 시사점을 주는 것 같다. 우리나라 역시 어설픈 세계화 정책의 부산물인 금융위기를 겪은 1990년대 후반부터 명백한 전환기에 놓여 있는데 바로 그 전환의 방향이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가속화이므로 프랑스와 미국의 사회적 쟁점이 바로 우리나라에도 곧 도래될 것이라는 점이다. 선진국이 된다는 것은 밝은 면은 더욱 환하게, 어두운 면은 더욱 어둡게 만드는 경향을 말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어두운 면에 대한 보다 깊은 관심이 필요할 것이 아닐까.

한편 이 책은 부르디외가 집필한 다른 연구서와는 달리 방법론에 대한 명백한 진술을 많이 갖고 있지는 않지만, 그의 ‘발생론적 구조주의’라는 방법론과 일관된 방침을 여기저기서 볼 수 있다. 우선 이 책은 전통적인 사회조사의 방법인 설문조사와 통계처리라는 수량적 방법을 부정하고 질적인 조사라고 할 수 있는 심층 인터뷰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는 경험적 방법에 의거해서 구체 사례에 대한 연구 결과를 종합한다는 부르디외의 사회학 방법과 일치한다. 이러한 방법이 어떻게 주관주의와 이데올로기적 편향에서 벗어날 수 있느냐는 것은 부르디외가 해결해야 할 주제임에는 틀림없으나, 최소한 이 책은 수량적 조사가 아닌 질적 조사를 통해서도 나름대로의 구체 분석을 통한 종합을 이룰 수 있다는 부르디외의 신념을 잘 실현하고 있는 예증이 아닌가 한다.

부르디외는 사회과학의 방법 및 경향과 관련해 매우 중요한 지위에 있는 사람이다. 그는 주관주의와 객관주의,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과학과 이데올로기, 구조와 주체라는 양자택일의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끊임없이 모색해왔다고도 평가할 수 있다. 사회적 갈등과 투쟁이 이뤄지는 역사적·사회적 공간인 場(champ, field), 경제적 차원으로 국한되지 않는 資産인 문화자본(지식·교양·취미·감상·각종 문화상품들에 대한 집단적·계급적 수용의 차이), 학력자본(학교제도를 통해 주어지는 문화자본의 특수형태), 사회자본(집단계급과 관련된 개인들의 친분 네트워크)은 아비투스(habitus)라는 개념을 통해 구조주의적 정태성을 극복하게 된다. 아비투스는 개인에 의해 표현되는 여러 실천들은 개인이 주관적으로 표출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자신이 속한 집단의 객관적 논리를 반영해 표출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이 개념을 통해 사회(구조)는 개인과 결합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관점에 설 때 사회과학은 심층에 놓인 구조를 이해하기 위해서, 또는 그러한 구조의 변화 가능성을 이해하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개인의 의식·주장·이념 등에 천착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와 같은 부르디외의 사회과학방법론에 비춰 볼 때 이 책은 가장 구체적 사례 분석의 풍부한 자료를 제공한다. 그리고 이 자료들은 사회에 대한 거시 담론을 풍부화하고 향상시키는 데 기여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부르디외가 이 책에서 진정으로 목적한 것이리라.

‘아비투스’로 구조주의적 정체성 벗어나

우리나라의 사회과학계, 특히 비판적 사회과학계의 논의 지형은 모더니즘적 전통(또는 거시 담론)에서 포스트모더니즘적 전통(또는 미시 담론)으로 급속히 이동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 사회가 전통·현대·탈현대라는 삼층 차원이 중층적으로 결합돼 있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연구방법상 하나의 문제로 남는다.
그러므로 그의 노력이 성공했느냐, 또 어떤 점에서 발전 가능성이 있느냐를 보는 것은 많은 연구 검토가 필요할 것이지만, 필자는 그가 사회과학자들의 합의가 최소화된 현대 사회과학의 위기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는 연구자 중의 한 사람임에는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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