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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대의 지적 토양 과시 … 그의 시도에 던져지는 의혹들
하버드대의 지적 토양 과시 … 그의 시도에 던져지는 의혹들
  • 정원섭 건국대·철학
  • 승인 2010.06.28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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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샌델 지음, 『정의란 무엇인가』(이창신 옮김, 김영사, 2010)

서양 철학 전반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주석이라고 할 수 있다면, 현대 미국의 규범적 담론은 롤즈에 대한 주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 할 정도로 그의 『정의론』(1971)은 현재까지도 도덕철학, 정치철학, 사회철학 및 법철학의 주요 논쟁의 진앙지가 되고 있다.

그의 『정의론』이 출간되자마자 하버드대에서는 노직과 월쩌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강좌를 공동으로 맡아 정의에 대한 논쟁에 불을 지폈다. 우파인 노직은 정교하면서도 현란한 철학적 논변으로 롤즈를 공격하는 『아나키에서 유토피아로』(1974)를 출판하면서 자유지상주의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반면 좌파인 월쩌는 정의란 공동체라는 구체적인 맥락 속에서 고찰돼야 한다는 점을 주장하면서 『정의와 다원적 평등』(1980)을 출간한 이래 공동체주의의 핵심 이론가로 부상했다. 이로써 하버드대는 정의에 대한 논쟁의 명실상부한 터전이 됐다.

‘정의’를 주제로 한 마이클 샌델의 정치철학강좌가 폭발적인 인기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그 개인의 탁월한 철학적 소통능력과 더불어 하버드대의 이러한 지적 전통 나아가 1970년대 정의에 대한 미국 사회의 진지한 고뇌와 결코 무관할 수 없다 할 것이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2007)는 바로 그의 스승 롤즈가 복원시킨 규범적 담론 문화의 굳건한 이러한 토양 덕분에 거둔 소중한 결실이라 할 것이다. 

스승 롤즈가 복원한 토양 위에서


2004년 멕시코 만에서 발생한 허리케인 찰리가 유발한 가격폭리 논쟁(제 1장)에서부터 지금도 미국 사회의 뜨거운 논쟁거리인 동성간의 결혼(제 10장)에 이르기까지 샌델은 이 책 전체에서 정의와 관련된 참으로 다양한 사례들을 쉴틈없이 제시한다. 저자가 제시하는 사례는 대부분 정말 지금 당장이라도 있을 법하거나 최근 10여년 미국 사회에서 실제로 있었던 것이라는 점에서 샌델의 지적 성실성과 현실적 감수성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나아가 더욱 훌륭한 점은 강의 시간 학생들과의 질문과 답변 그리고 토론 과정에서 이 사례에 대해 학생들이 즉흥적으로 제시하는 여러 접근 방식을 검토하면서 우리 내면에서 어떤 규범 이론을 받아들이고 있는지 스스로 성찰하고 그 한계를 스스로 찾도록 이끌어간다는 점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강의 동영상은 멀티 미디어 책읽기의 또 다른 즐거움을 제공할 것이다(www.harvardjustice.org).

샌델은 다양한 사례를 정교하게 배치해 현대의 3대 규범이론-사회 전체의 효용을 극대화하고자 하는 공리주의, 개인의 선택의 자유를 강조하는 자유주의 그리고 사회의 전체의 공동선을 강조하는 일종의 덕 윤리설을 체계적으로 소개한다. 주지하다시피 벤담이래 20세기 초반까지 영국과 미국 학계의 지배적 전통은 공리주의였으며 지금도 그 위세는 만만치 않다. 롤즈는 이런 공리주의가 노예제조차 정당화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개인의 존엄성을 충분히 보장할 수 없다고 비난하면서 로크, 루소, 칸트로 대변되는 사회계약론 전통을 원용해 평등주의적 자유주의를 제시한다. 바로 이점에서 샌델은 개인의 선택의 자유를 강조하는 롤즈식의 이러한 자유주의야말로 결국 개인을 공동체적 유대로부터 분리시켜 아무 연고없이 고립화시키고 말 것이라고 비판하며 공동체주의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다시 롤즈식 자유주의를 비판하다


“정의로운 사회에는 강한 공동체 의식이 필요하다면, 사회는 시민들이 사회 전체를 걱정하고 공동선에 헌신하는 태도를 키울 방법을 찾아야 한다. … 사회는 좋은 삶에 관한 지극히 사적인 견해를 배격하고, 시민으로서 마땅히 갖추어야 할 미덕을 키울 길을 찾아야 한다.”

공동체의식이 점점 더 사라지고 천박한 이기주의로 갈등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 던지는 이 주장은 우리에게 진지한 성찰을 요구한다. 또한 이 주장은 바로 그의 출세작 『자유주의와 그 한계』(1985)에서부터 일관된 주장이다. 그로부터 30여년이 지난 뒤에 출간된 저서에서 여전히 일관성을 본다는 것은 분명 아름다운 일이다.

그러나 30여년 전 ‘공동체주의자’로 불리는 것을 거북해하던 그는 이제 공화주의자로 진화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 책에서 롤즈식의 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처럼 강조되고 있는 공동체 의식, 공동선, 시민의 미덕과 같은 개념들은, 매킨타이어나 왈쩌 등 여타 공동체주의자들과는 달리, 공동체의 구체적인 맥락과 무관하게 제시되고 있다. 이러한 시도는 개별적인 다양한 문화적 전통들에서 나타나는 특수성을 넘어 보편성을 지향하고자 하는 철학자의 운명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바로 그점 때문에 센델의 시도는 21세기 형 거대 담론을 시도하고 있다는 의혹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또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이름 아래 당연히 기대할 수 있는 국제 정의의 문제가 거의 언급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롤즈는 국제 정의의 문제를 정상적인 정의 이론을 국제적 영역으로 확장 적용하는 문제로 간주했다. 그리고 그 작업을 『만민법』을 통해 보여 주었다. 그러나 국제 정의의 문제가 과연 확장의 문제인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21세기는 新중세시대라 일컬어질만큼 국내 상황에 국제적 요인의 영향력이 날로 확장되고 있는 바, 국제 정의에 대한 센델의 입장을 알기 위해서는 다음 저술을 기다려야 한다.

마지막으로 번역과 관련된 점. 우리의 독서 대중은 정치철학 전공 학자가 아니라 전문 번역가의 손을 통해 센델을 만나게 됐다. 센델의 현란한 수사의 묘미를 살리며 어려운 한자어로 구성된 전문용어를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살리고자 적극적인 의역을 한 점은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그러나 대중적으로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저작을 번역할 때 해당 분야 전공 학자의 도움을 받는다면 충분히 피할 수 있었을 오해의 소지가 일부 남아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paternalism’의 경우 ‘온정주의’로 번역했는데 ‘간섭주의’로 번역해야 마땅하다. ‘온정주의’란 너그러운 마음으로 타인의 잘못을 너그럽게 받아들인다는 의미이지만, paternalism이란 타인에게 간섭한다는 의미가 훨씬 강하게 부각돼야 한다. 자유지상주의자가 온정주의를 받아들일 수는 있지만 간섭주의는 결코 수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번역의 고통을 잘 알면서도 서평자의 역할에 충실하고자 역자에게 더 많은 온정을 보여 주지 못하는 점에 대해서 역자는 너그러운 온정을 베풀어 주리라 믿는다.

정원섭 건국대·철학

필자는 서울대에서 박사를 했다. 건국대 교양학부 강의교수로 있다. 저서에는 『롤즈의 공적 이성과 입헌민주주의』, 논문에는 「공적 이성과 정치적 정의관」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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