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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서구적 근대성 모델을 모색하는 두 목소리의 反響
비서구적 근대성 모델을 모색하는 두 목소리의 反響
  • 이택광 /경희대·영미문화이론
  • 승인 2010.06.22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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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광의 세계사상지도 읽기] <6>아시아에서의 새로운 사유방식의 출현

우리에게 언제나 서양사상은 ‘첨단의 노래’였다. 김수영이「서시」에서 ‘성장은 소크라테스 이후의 모든 현인들이 하여온 일’이라고 썼을 때부터, 서양사상의 수입에 대한 반성은 진지하게 제기됐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론은 보편적인 것이고, 근대적 세계관을 특징화하는 과학적 사유는 동서양의 구분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보편성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언제나 실천의 구체성이고, 들뢰즈의 말처럼, ‘영토’라는 터전이다.

영토는 사유이미지를 터 잡아주는 경계이자 토대이다. 따라서 서구사상과 다른 차원에서, 우리의 터전에서 발생하는 이론에 대한 모색은 여러 인문학적 작업 중에 취할 수 있는 하나의 선택사항이라기보다, 인문학 자체를 규정하는 근본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에게 인문학은 ‘수용의 문제’이기도 하다.

비서구적 영토에 근거한 새로운 사유방식의 출현을 예고한 조반니 아리기(왼쪽)와, 가라타니 고진(가운데), 그리고 왕후이(오른쪽). 이들은 침묵에 빠진 한국 지식계에 흥미로운 지적 자극을 주고 있다.

하이데거가 서양철학을 일러 ‘백인 남성의 것’이라고 지칭했을 때, 인류사를 형성해온 사상의 지평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이데거의 논리에 근거해서, 바타이유처럼, 동양은 자신의 내적 경험을 기술할 수 있는 현대적 언어를 획득하지 못했다고 말하더라도, 이런 발언에서 동양과 서양이 서로 다른 ‘내재성’을 가졌다는 사실을 전제하는 구도를 읽어내기란 어렵지 않다. 결국 서양사상의 언어가 보편적일 수 없다는 것, 다시 말해서 동양이라는 ‘타자’를 설득시키지 않는 한, 서양사상은 ‘전 지구적’일 수 없다는 사실이 여기에서 드러난다.

이런 상황에서 동양과 서양은 20세기를 거치면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체제적 양분에 따른 역사적 경험에서도 상당한 차이를 보여줬고, 이 와중에 중국이 세계경제의 중심으로 부상하면서 서양사상을 떠받치고 있는 가치체계와 다른 가치들에 대한 관심들이 중요한 인문학적 관심사로 떠오르는 것이라고 하겠다. 얼마 전에 타개한 조반니 아리기(Giovanni Arrighi, 1937.7.16~2009.6.18)의 작업들은 자본주의의 소내로서 중국의 사회주의를 일반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바깥에서 다른 체제를 만들어낼 수 있는 가능성을 ‘서양의 타자’에서 발견하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들이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새롭게 펼쳐지고 있는 국면들이 잘 말해주고 있듯이, 지금까지 일방적으로 서양에서 동양으로 진행해왔던 사상이나 이론의 ‘이동’과정에 대한 습관적 인식을 수정해야할 지경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과거처럼 무조건 서구가 최신의 이론을 생산하고, 그것을 비서구가 수용하는 방식으로 이론의 이동이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이런 역전현상은 단순하게 객관적 조건의 변화로 인해 발생한다기보다는, 비서구적 영토에 근거한 새로운 사유방식의 출현을 통해 일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최근 눈에 띄고 있는 왕후이와 가라타니 고진의 작업들은 단순하게 서구의 이론을 중국과 일본 사회를 위한 분석의 도구로 사용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서구의 근대성에 근거한 이론적 탐색과 다른 방식으로 어떻게 사유가 구성될 수 있는지를 탐색하는 중요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왕후이와 가라타니 고진은 서구사상의 말석을 차지한다기보다, 그 사상전개의 첨단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되새길 필요가 있다.

서양사의 ‘전 지구화’에 대한 도전

『트랜스크리틱』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세계사상의 지도에 보탠 가라타니 고진의 행보는 이런 맥락에서 중요한 기점들을 제기한다고 볼 수 있다. 한때 한국 사상계에서 감춰진 기원이었던 가라타니 고진은 칸트와 연계해서 마르크스를 읽어내는 독특한 시각을 통해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가라타니 고진의 칸트 읽기는 궁극적으로 윤리에 대한 관심과 무관하지 않다. 가라타니 고진은 일본 내에서 붐을 이뤘던 탈근대이론의 수입에 상당히 비판적인 관점을 견지하면서, 마르크스와 칸트를 일본의 문맥에 맞춰서 새롭게 읽는 작업을 수행했다.

이 작업의 의미는 단순하게 ‘텍스트 다시 읽기’ 따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본 사회에 만연한 ‘무책임성’에 대한 치열한 반성을 통해 서양사상에서 제기하는 가치들의 문제를 재점검해보는 것이기도 하다. 사실 『트랜스크리틱』이 탈근대이론의 문제점을 넘어선 이론적 탐구를 보여주는 것이라면, 『윤리21』은 이런 서양의 고전텍스트를 ‘가능성의 중심’에서 읽고자 하는 가라타니 고진의 속내를 솔직하게 드러낸 저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서두를 장식하고 있는 에피소드는 ‘부모의 책임을 묻는 일본의 특수성’에 대한 것이다. 유명한 고베 시 중학생 사건에서 ‘연소자’ 범죄를 사회적인 관점에서 조망하지 않고, ‘부모의 책임’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는 일본 사회의 ‘특수성’을 가라타니 고진은 지적하고 있다. 사건을 저지른 부모가 사죄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일본 사회에서 가라타니 고진은 서양적 가치체계를 호소하는 ‘윤리’의 문제를 검토하고 있는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일본의 침략전쟁에 대해 사죄를 요구하는 아시아 나라들을 무시하고 사죄에 응하는 정치가를 규탄하는 신문일수록 부모의 책임을 과도하게 요구한다는 사실을 거론하면서, ‘애당초 이 사람들에게 ‘책임’이란 무엇인가’하고 묻는다. 이 물음에 해답을 제시하기 위해 가라타니 고진은 칸트로 복귀한다. 선악의 기준을 부여할 사회가 부재할 때, 아니 설령 사회가 있더라도, 그 사회가 규정하는 선악의 기준이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할 때, 어떻게 윤리가 가능할 수 있는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제시하고 있는 것이 바로 ‘도덕성을 ‘자유’로 간주한’ 칸트이다.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도덕의 기준을 마련하는 것, 다시 말해서 내부의 도덕이 곧 외부의 자유를 보증해주는 것이 될 수 있는 경우를 가라타니 고진은 비서구의 근대화에 필요한 윤리라고 파악하고 있는 셈이다.

가라타니 고진과 다른 관점이긴 하지만,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왕후이는 서구근대화와 다른 방식으로 가능한 근대화의 과정에 대한 천착을 지속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왕후이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로 양분하고, 동양과 서양을 구분했던 과거의 분류체계를 함께 아우르기 위해 ‘근대성’이라는 범주를 중요한 이론적 교두보로 확보한다. 가라타니 고진이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을 통해 수행하고자 했던 목적과 비슷하긴 하지만, 그보다 더 발생론적인 관점에서 왕후이는 자본주의적 근대화와 다른 모델을 발굴하기 위해 중국의 사상사를 파고 들어간다. 이를 통해 왕후이는 서구 근대화의 ‘거울상’으로서 일본의 근대화 문제를 거론했던 가라타니 고진의 문제의식을 넘어서서, 비서구적 근대성의 모델을 중국의 사례를 통해 제시하고자 한다.

이론 생산에 실패한 한국, 대안은

    1990년대 이후 왕후이는 신좌파의 대표주자로서 중국 내에서 끊임없이 근대성과 관련한 문제제기를 해온 것으로 명성을 쌓았다. 중국 지식계에서 그의 존재는 이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게 된 것처럼 보이는데, 얼마 전에 그동안 집필한 글들을 모아서 『혁명의 종언: 중국과 근대성의 한계』라는 책을 영국의 버소에서 영문판으로 출간함으로써 서구사상사에 대한 개입을 본격화하고 있다. 물론 그의 주저는 중국에서 나온 『중국근대사상의 기원』이고, 이 작업에서 왕후이는 유럽보다 더 많은 부를 축적하고, 자본주의에 가장 근접한 경제체제를 갖추고 있었음에도, 자본주의적 근대를 달성하지 못한 원인에 대한 서구학자들의 의문점들을 해소시킬 야심찬 기획을 진행하고 있다는 것이 학계의 평가이다.

    가라타니 고진과 왕후이를 지켜보고 있으면, 상대적으로 침묵에 빠진 한국의 지식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김진석 교수는 언젠가 한국은 ‘이론 생산’에 실패한 사회라고 지적하면서 이론이 아니라 다른 실천의 맥락을 찾아 나가야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바로 이런 실패의 지점에 세계사상의 흐름에 힘을 보탤 수 있는 이론 생산의 근거가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것을 굳이 ‘한국적’이라고 불러야할 이유는 없겠지만, 여하튼 김진석 교수가 예측했던 그 지점보다 세계사상사의 지도가 훨씬 확장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 흥미진진한 전환의 시기에 우리가 서 있다.

이택광 /경희대·영미문화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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