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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정치, 나는 이렇게 본다] 감추어진 것 또는 강렬하게 되기
[시와 정치, 나는 이렇게 본다] 감추어진 것 또는 강렬하게 되기
  • 이성혁 문학평론가
  • 승인 2010.06.21 16: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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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정치성’이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묻기 시작한 현재의 한국문단은, 많은 논자들이 그 물음에 대해 다양한 대답을 내놓으면서 근래 보기 드문 활기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사유를 잉태하고 있는 그 물음이 문학의 자율성 및 특수성에 대한 물음으로 회귀하는 조짐이 보이기도 한다.

이 논쟁을 촉발시킨 진은영 시인이 어디에선가 이야기했듯이 정치가 시를 파괴한다는 식의 생각은 성급한 면이 있다. 물론 시가 정치 도구화됐던 역사적 사례가 있기 때문에 그러한 생각이 근거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한편으로 정치는 시를 성장시킨 糧食이기도 했다. 이는 근대시의 역사를 보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위대한 시인은 정치를 무시하지 않았고, 오히려 정치적 상상력을 더 확장시키는 이들이었다. 어떠한 정치적 당파에 시를 구속시키지 않는다면, 보편적 해방의 과정에의 참여는 시를 더욱 강렬하게 만들 수 있다. 사실 어떠한 시도, 고도로 정제된 순수시조차도, 삶과 무관할 수 없다. 시는 적어도 언어로 쓰인다는 면에서 그러하다. 말은 일상적인 삶을 구성하는데, 그 삶에는 정치적인 것이 관통하고 있다. 시인은 언제나 이 감추어진 정치적인 것과 마주한다. 시인은 그것을 인식할 수도 있고 무시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정치적인 것이 스며든 말을 재료로 詩作한 결과는 언제나 정치적인 의미를 가지게 된다.
 시는 텍스트에 포박돼 있지 않다. 말을 재료로 삼은 시는 우리의 일상 언어를 특이화하고, 그 특이화된 말은 세계를 변형하는 데로 나아간다. 시와 세계 사이에는 장벽이 없다. 시는 세계가 될 수 있으며 세계는 시적으로 변모할 수 있다. 이것이 시의 잠재력이다. 네그리는 포에지란 “생산(그리고 생산에의 명령, 즉 착취)에 의해 부과된 제 조건에 대한, 살아 있는 노동의 초과를 표현”(토니 네그리, 『예술과 멀티튜드』 (일역판, 2007, 14면)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이에 따르면 시적인 것이란 착취의 제조건을 넘어서는 노동에 의해 창출된다. 그 노동은 바로 정치적인 활동이라 할 것이다.

진은영의 제안은, 시가 정치적인 것과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지 말고 역으로 더 적극적으로 그것을 전유하자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의 전유 방식이 바로 정치적 열정의 공간에로의 참여일 것이다. 그 참여는 시민의 자격으로서 행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시의 잠재력을 현실화하고자 하는 시인의 자격으로서 행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 그것은 그 무엇도 아닌 시 자신을 위한 참여, 시를 더 강렬하게 만들기 위한 참여인 것이다.

이성혁 문학평론가

필자는 한국외대에서 박사학위를 했다. 2003년 <대한매일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됐다. 저서로는 『불꽃과 트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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