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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수상 - 중(中)과 소통의 생명성
최우수상 - 중(中)과 소통의 생명성
  • 교수신문
  • 승인 2002.05.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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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본질로서 ‘존재의 헐거움’ 읽어내는 지적 고투
박재현 / 서울대 강사·철학

생명, 그것은 결코 목격되지 않는다. 그것은 살아있는 것들 속에 있으면서 또한 그것들 밖에 있다. 생명은 봄[看]의 대상이 아니라 살핌[察]의 대상이다. 보는 것이야 매 일반이겠지만 察과 看은 엄연히 다르다. 통찰의 대상은 실재하는 유형의 것들이 아니라, 실재의 뒤란에 감춰진 그것들의 존재원리이거나 그것과 다른 사실들과의 이면적 관계성 같은 무형의 것들이다.

찰은 단순히 간의 의미를 넘어 반성적 인식을 통해 어떤 원리를 안다는 뜻까지 내포하고 있다. 통찰은 사물을 보고 아는 것이 아니라, 그 이면의 어떤 원리와 관계성을 꿰뚫어 살피거나 아는 것이다. 따라서 통찰하는 눈길에서 유형의 것들은 소외를 겪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것들의 소외를 일정 정도 감당할 수 없는 자는 결코 통찰할 수 없게끔 되어 있다.

통찰의 대상은 유형의 것들이 아니라 원리 혹은 원형이라 불리는 무형의 것들이다. 원리와 원형은 유형의 것들이 억겁동안 퇴적된 다음에야 비로소 흘러나오는 침전물이다. 이 억겁의 세월은, 유형의 것들이 존속된 시간이고 인간이 그것들과 부대낀 시간인 동시에 그것들의 이면을 훔쳐보려고 애쓴 시간이기도 하다.

우리는 태어나[生] 늙고[老] 병들어[病] 죽는[死] 사실들을 결코 봐 넘길 수 없는 까닭에, 생겨나[生] 잠시 머물다가[住] 흩어지고[異] 마침내 사라진다[滅]는 원리를 체득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생을 간과하고, 늙음을 간과하고, 병듦을 간과하고, 급기야 죽음조차 간과하지 않으면, 그것들을 하나로 꿰는 생주이멸의 원리는 결코 통찰되지 않는다.

생명은 통찰의 대상이다. 그래서 그것은 유형의 것들에 대한 전면적인 간과를 요구한다. 나의 살아 있음 역시 생명의 한 단면임에는 분명하지만, 생명 그 자체는 나 일인 속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나를 벗어나는 동시에 나를 포함한다. 변화하는 나는 생명일반 속의 나인 동시에, 생명일반을 내 속으로 애써 우겨 넣으려고 하는 나이다. 이 둘은 모순되지만 동시적이다. 하지만 생명일반은 일인에 국한된 나, 혹은 나만의 생명성을 간과한 이후에, 생명이라는 살아 있는 것들 일반에 대한 원리를 목도함으로써 발견되는 나이다.

결국 생명 그 자체를 알기 위해서는 나에게 국한된 생명성을 간과하는 것, 즉 나만의 생명성을 헐겁게 하는 것이다. 자꾸만 안으로 안으로만 조여드는 시각을 헐겁게 하지 않는 한, 생명 그 자체는 온전히 나타나지 않는다. 때문에 생명의 자리를 확인하기 위한 유일무이한 조건은 바로 ‘나의 헐거움’이 된다.

불교에서는 궁극적인 깨달음의 상태를 나르바나, 즉 적멸이라고 한다. 이는 나라는 개체 속에 한정된 나를 불태워 버린다는 의미이다. 중생에게 있는 ‘나’라는 의식은 견고하다. 그것은 六識을 관장하고 대상을 주재하여 그것들을 나 속으로 억지로 우겨 넣는다. 적멸은 이 같은 의식의 작동을 잠시 멈추도록 요구하여 나의 견고함을 헐겁게 한다. 적멸은 ‘나’라는 의식의 숨고르기인 것이다.

‘나’라는 의식의 적멸을 통해 나는 헐거워진다. 그리고 내 안의 빈터가 확보된다. 이 빈터를 통해 나는 타자와 더불어 하는 속에서 나의 존재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의 육신과 의식을 유지하면서 그것들을 숨 고르는 작업은, 그래서 일정 정도는 나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나의 죽음을 통해 내 속에 있었던 나 아닌 무엇이 깨어난다. 나의 죽음은 실상 이 무엇을 깨어나게 하기 위한 전초전에 불과했다는 점에서, 다분히 상징적이다.

헐거움은 당위인 동시에 사실이다. 그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또한 당위일 수 있는 것이다. ‘나’라는 의식이 조여들기 시작하기 전의 나는, 변화하고 竝生하는 나였다. 나는 원래부터 존재론적 헐거움 속에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를 알기 위해 인식의 헐거움이 요청된다. 존재의 헐거움은 나의 정체성이 고정불변의 어떤 것이 아니라, 변화 속에 있다는 뜻이다. 인식의 헐거움 역시 마찬가지다. 나의 헐거움과 타자들의 헐거움으로 인해 나와 타자들은 마침내 소통할 수 있다. 소통, 이것이 바로 생명의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대 사건이다.

소통이란 섞임이고 어울림이다. 생명이란 본래부터 이렇게 섞이고 어울리는 가운데서만 그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당위적인 요청이기에 앞서 존재론적인 사실이다. 나의 헐거움은 곧 타자들의 헐거움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모두 헐거운 존재들이었다. 헐거움은 살아 있는 것들의 공통성이며 보편성이다.

갑과 을 사이에 병이라는 공통성이 없다면 둘 사이의 소통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갑과 을은 병이라는 공통성을 가지고 있고, 병은 갑과 을에 보편적이다. 한편, 병은 갑과 을이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인 동시에, 갑을 갑 되게 하고 을을 을 되게 하는 필수적 조건이다. 병은 갑의 갑됨, 을의 을됨에 있어 배제될 수 없는 항목인 것이다. 그리고 또 병은 갑 속에 있으면서도 갑만의 것은 아닌 것, 즉 을에도 속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병은 갑의 자기 긍정인 동시에 자기 부정이다. 병은 내 안에 있는 타자이고 타자 안에 있는 나이며, 우리 안에 있는 우리이다.

丙은 절묘하다. 그것은 갑을 갑되게 하는 동시에 갑 아니게 하는 요소이다. 그렇다면 병은 무엇인가. 대답은 空 혹은 虛이다. 갑과 을의 공통성, 갑과 을에 보편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이다. 접점을 찾아 내처 달리던 갑과 을은 아무런 접점도 없는 바로 그 지점에서 접한다. 그래서 그들의 접합은 경이롭다. 갑과 을의 접점은 애초부터 갑과 을 속에 있었으면서 갑과 을에는 없었다. 갑과 을의 접점은 그들 자체 내의 헐거움에 다름 아니다.

공과 허는 갑과 을 속에서 그것들 각각의 정체성에 구멍을 낸다. 여기서 공통성 혹은 보편성은 공 혹은 허와 상봉한다. 갑과 을의 공통성, 갑과 을에 보편적인 것은 바로 갑과 을의 헐거움인 것이다. 공은 갑과 을, 각각의 견지에서는 헐거움이면서, 둘을 동시에 놓고 보면 공통성이다. 갑 속에는 을이 있었고 을 속에는 갑이 있었다. 그러나 갑 속에는 을의 흔적이 없고, 을 속에는 갑의 흔적이 없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그 공통성이 곧 空性이기 때문이다.

단독자로서의 존재의 헐거움은 안타까움이 아니라 타자와의 소통 가능성이고 생명의 본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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