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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려상 - 危機와 危己
장려상 - 危機와 危己
  • 교수신문
  • 승인 2002.05.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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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세기 통해 인류의 희망 점쳐
강판권/ 계명대 강사·역사학

나는 박사학위를 받은 후 먹는 문제와 학문을 동시에 할 수 없는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지금까지 배운 바로 위기 극복 방법을 찾기로 했다. 내가 선비는 아닐지라도 선비의 길을, 내가 학자는 아닐지라도 학자의 길을 가려면, 편안하기만을 바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위기는 위급한 때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위급한 기회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위기는 한편으로 危險한 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機會이다. 선비의 길과 학문의 길로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사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나는 내가 살고, 내가 속한 인문학이 살고, 인문학이 속한 학문이 살고, 그리고 학문이 속한 인류가 사는 방법을 찾았다. 이 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다 나무를 선택했다. 나는 공자가 한 것처럼 나무로 모든 것을 꿰는 방법을 찾기 위해 나무에 매달렸다. 나무를 공부하면서 나무를 세었다. 내가 나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센 것은 나무를 생명을 가진 존재로 보려 했기 때문이다. 나무에 관심을 가지면서 나무도 인간처럼 생명을 가진 존재이기에 한 그루 한 그루 자체가 고귀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나는 내 주위에서 자라는 나무를 세었다. 가장 가까운 곳에 살고 있는 나무를 센다는 것은 내 주위에 있는 존재에 관심을 갖는 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이런 방식을 ‘논어’에 나오는 ‘近思’에서 빌렸다. 나는 나무를 세면서 나무의 이치를 깨달았다. 때론 성리학식으로, 때론 양명학식으로 나무를 세고 깨달았다. 성리학자와 양명학자들의 공부방법을 몸소 실천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무도 공부의 대상임을 실천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무에 미치다보니 모든 것을 나무로 해석하기 시작했다. 나보다 먼저 깨달은 사람들은 나무를 어떻게 이해했는지가 궁금해서 경전을 뒤지니 의외로 공자와 노자도 자신의 사상을 나무로 해석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가공하지 않는 나무의 모습에서 인과 도의 이미지를 찾았을 것이다. 나무를 자세히 보니 도가 보였다. 나는 나무에서 사상을 보는 데 그치지 않고 역사를 보려했다.

나는 나무를 공부하면서 인류의 역사가 나무와 불가분의 관계임을 알았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대부분의 역사학자는 역사를 연구하면서 나무를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나는 인문학의 위기를 나무를 언급하지 않는 인문학자의 위기로 보았다. 역사 속에 나무를 끌어들이는 것 자체가 낯선 광경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무에 관심 갖는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외도하는 사람으로 보곤 했다. 그렇다. 나는 바람피우는 역사학자이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죽은 역사가 살기 위해서는 기존의 역사장르를 허물어야 한다. 나는 나무로 나무 없는, 건축 없는, 미술 없는, 문학 없는, 철학 없는, 음악 없는, 디자인 없는 역사를 허물고 싶었다. 두터운 경계로 버티어왔던 학문의 시대를 허물고 싶었다.

나무로 역사를 보니 그 속에 모든 장르가 있었다. 나무로 문학을 보니 퇴계의 시가 보였다. 나무로 미술을 보니 고흐가 보였다. 나무로 건축을 보니 사찰과 서원이 보였다. 나무로 사상을 보니 불교의 一切同根, 공과 색과 無自性이 보였다. 나무로 세상을 보니 미래가 보였다. 나는 인간이 지금과 같은 존재이기 이전에 숲에서 살았다는 설에 기대면서, 인류가 가야할 방향을 고민하는 것이 인문학의 역할임을 생각하면서, 인류의 미래를 생각했다. 인문학의 본질을 고민했다. 인문학이 살기 위해서는 인류가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에 치열하게 고민하고 나름의 답을 제시해야만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인문학에 종사하는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거칠지만 나무를 통해 인류의 미래를 고민했다.

내가 인류의 미래를 나무에서 찾은 것은 나무가 인간과 같은, 아니 인간보다 위대한 존재라는, 인간도 만물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성찰이다. 지식인의 존재이유는 성찰에 있다. 자신에 대한 성찰, 학문에 대한 성찰, 생명에 대한 성찰 없이 지식인은 설자리가 없다. 나는 나무 한 그루에 나의 희망을, 인문학의 희망을, 학문의 희망을, 인류의 희망을 꿈꾸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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