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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런히 심어 놓은 ‘어린 잣나무’, 누구의 소행일꼬
가지런히 심어 놓은 ‘어린 잣나무’, 누구의 소행일꼬
  • 권오길 강원대 명예교수·생물학
  • 승인 2010.05.24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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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길의 생물읽기 세상읽기<22> 청설모 이야기

권오길 강원대 명예교수·생물학
“겨울이 되어야 솔이 푸른 줄 안다”는 말은 난세에 훌륭한 사람이 나타난다는 뜻이리라. 저녁놀이 온 마을을 물들일 때 아궁이 앞에 쭈그리고 앉아 바싹 마른 솔방울/솔가리(우리 시골에선 ‘갈비’라 부름) 불쏘시개로 밑불을 살려낸 다음 삭정이(마른솔가지)와 소나무장작으로 소죽을 끓였다. 타고 남은 토막 숯과 보드라운 재를 화로에 소담스럽게 퍼 담아 꼭꼭 눌러 할머니 품 앞에 놓아 드렸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언 반세기가 훌쩍 넘었으니 참 세월이 무상하다.

보통 소나무나 잣나무 같은 침엽수림에 사는 청서(靑鼠, Korean squirrel)는 쥐목 다람쥐 과의 포유류로 세계적으로 40여 亞種이 있다하며 우리나라에 사는 것은 학명이 Sciurus vulgaris coreae로 ‘청설모’라고도 한다. 몸빛깔이 일본산의 것(S. v. orientalis)과 중국 것(S. v. manchuricus)의 중간색을 띠고 그것들에 비해 몸집과 두개골이 작은 편이라 한다. 미국 것들은 큰 강아지만 하던데!? 다시 말하지만 이들은, 여러 아종의 호랑이가 그렇듯, 모두가 동일한 種이라 서로 교잡을 한다. 정녕 우리 어릴 적엔 못 보던 놈들인데 언제, 어디서, 어떻게 우리나라에 굴러들어왔는지 모른다. 

녀석들은 잣나무 씨, 밤과 땅콩, 나무껍질이나 그것을 벗겨서 나오는 수액, 버섯이나 버찌를 먹으며 야생조류의 알 뿐만 아니라 어미 새도 잡아먹는 잡식성이다. 겨울 채비로 가을에 먹고 남는 견과를 아늑한 땅 속에 묻어두거나 고목에 저절로 생긴 나무구멍이나 바위틈에 넣어뒀다가 한겨울에 끄집어내 먹는다. 그러나 공간기억력이 아주 부족해 아무데나 뒤져 먹는 것보다 좀 나은 수준이라, 애석하게도 샅샅이 다 찾아먹지 못한다. 거참, 필자(남자들이)가 냉장고에 든 음식을 제대로 못 챙겨 먹는 것과 다르지 않구나!?

 

그런데 산길을 가다가 양지바른 숲속에 띄엄띄엄 짙푸른 어린 잣나무가 올망졸망 일부러 심은 듯 일정한 거리를 두고 가지런히 서있는 것을 본적이 있을 것이다. 녀석들이 마저 찾아먹지 못한 것들이 싹을 틔운 것이다. 청설모가 애써 길섶 여기저기에 잣나무를 심어준 꼴이다. 이거야말로 멋진 ‘주고받기’로 세상에 절대로 공짜가 없음을 알려준다.

청설모는 나무구새나 딱따구리가 판 구멍들을 집으로 쓰기도 하지만 보통은 나뭇가지 사이에 보금자리를 짓는다. 나무꼬챙이로 얽어서 지름 25~30cm 정도의 접시모양의 둥지를 지으니 그 밑바닥에는 이끼, 마른 잎사귀, 나무 껍데기들을 깐다. 2~3월, 6~7월에 걸쳐 두 번 교미를 하니, 그 때면 집쥐들이 그렇듯 여러 마리의 수컷들이 한 마리의 암컷을 놓고 한 시간 넘게 쫓아다니다가 그 중 힘 센 놈이 암놈과 교미하며, 암컷은 여러 수컷들과 짝짓기를 한다. 임신기간은 38~39일로 일반적으로 2~3마리를 낳으며 목숨앗이(천적)는 들고양이, 부엉이, 담비, 들개들이다.

암수 몸피가 같고 배는 늘 흰색이며 한해 두 번 털갈이를 하니 8~10월에는 회백색에 가까운 옅고 짧은 여름털에서 회갈색의 진하고 긴 겨울털로 바꾸고, 4~5월엔 그 반대다. 북극에 사는 토끼무리들이 겨울에는 흰털을 여름에는 검은 털로 바꾸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귀에는 뾰족하고 긴 큰 털 뭉치인 귀깃(ear-tufts)이 있고, 아주 긴 꼬리로는 나뭇가지를 팔짝거리며 건너 뛸 때 몸의 균형과 방향조절을 하며, 뒷다리는 길어서 뛰기에 편리하고, 발톱 끝이 예리하게 구부러져있어서 나무타기를 잘 한다. 녀석들 주변에 까치나 고양이가 나타나는 날에는 찍찍, 캑캑 콧소리(경고음)를 내지른다. 옛날엔 털을 쓰기위해 사냥했다는데 요새는 개체수가 엄청시리 늘어나 잣을 다 먹어치우기에 총에 맞아 죽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너무 오래 살거나 흔하면 자못 괄시당하는 것이 어디 청설모뿐이겠는가.

같은 科에 드는 다람쥐도 생김새나 생태가 비슷하지만, 청설모는 훨씬 등치가 크고 주로 잣이나 밤을 따 먹는 반면에 다람쥐는 조막만한 것이 땅바닥에 살면서 도토리를 먹는다. 좀 찜찜하지만 두 種間에 먹이가 크게 겹치지 않는데다 사는 무대도 약간 틀리기에 둘은 共棲가 가능하다. 그러나 영역다툼(텃세)에 있어서는 힘 약한 다람쥐가 등치 큰 청설모에게 못 당한다. 어쨌거나 모든 생물이 속절없이 먹을거리와 삶터를 놓고 사뭇 죽기이면 살기로 다툰다. 사람도 이 틀에서 털끝만큼도 벗어나지 않으매….

권오길 강원대 명예교수·생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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