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6 12:50 (금)
[깊이읽기] 『심성내용의 신체성』(정대현 지음, 아카넷 刊)의 철학적 주장 검토
[깊이읽기] 『심성내용의 신체성』(정대현 지음, 아카넷 刊)의 철학적 주장 검토
  • 임일환 한국외대
  • 승인 2002.04.22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02-04-22 14:11:59

임일환 / 한국외국어대·철학

정대현 교수의 ‘심성내용의 신체성’은 力作 혹은 勞作이란 수식어가 지극히 적절한 책이다. 책의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 정 교수는 지난 십수년간 이 책의 주제인 ‘심성내용’에 대해 20여회 이상의 세미나 그리고 다양한 연구성과를 통해 집요하게 탐구해 오던 철학적 탐구결과를 한 권의 책에 담았을 뿐만 아니라, 이 책의 내용은 논리학, 언어철학, 심리철학 등 현대철학적 성과를 아우르는 깊이와 포괄성을 담고 있기도 하다. 더구나 정 교수의 책이 기존의 여타 서양철학에 대한 연구와 구별되는 차별성이 있다면, 그것은 이 책이 단순히 기존의 서양철학의 연구성과를 비판적으로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 문제에 대한 이 땅의 다양한 철학자들의 기존의 성과에 대한 세심한 연구와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라 할 수 있다. 즉 이 책은 서양의 데카르트, 데이빗슨, 퍼트남을 다루고 있을 뿐 아니라, 소월의 시와 동양의 음양론의 존재론적 뉘앙스까지를 추적하고 있는 책이다. 물론 나는 5백쪽에 이르는 방대한 연구성과를 이 좁은 지면에 다 소개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발견한 이 책의 유일한 불만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나는 이 책의 핵심 주제가 무엇이고 정 교수가 왜 이 문제에 그토록 정열을 쏟았는가 하는 문제를 간단히 소개하는 것으로 짤막한 서평에 대신하고자 한다.

마음의 현상은 신체성을 갖는다

이 책의 주제의 ‘심성내용’이란 우리 자신의 생각과 느낌, 사고 등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일컫는 말이다. 즉 그것은 우리가 간단히 ‘정신현상’ 일반이라고 부르는 현상 일체를 일컫는 말이다. ‘지금 나는 신문을 읽고 있고’, ‘정모 교수의 책에 대한 서평을 읽고 있으며’ 등과 같이 지금 우리의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현재 우리의 ‘심성내용’이다. 물론 ‘심성내용’이란 단순히 생각이나 사고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흑백글자를 보는 우리의 지각적 경험의 내용, 잉크냄새를 맡는 후각적 감각, 이 모든 것이 정 교수에 따르면 우리의 심성의 내용이다. 물론 우리가 이런 심성내용을 갖는다는 것은 물론 어떤 맥락에서는 신기한 현상이지만 (예컨대 왜 돌멩이나 나무는 이런 내용을 갖지 못하는가) 적어도 사고하는 생명체라는 인간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 현상 자체는 놀라운 일도 아니고 실은 매우 진부한 일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왜 정 교수는 이 일견 진부한 현상을 언어철학, 논리학, 심리철학처럼 현대철학의 가장 난해한 도구들을 동원하여 해명하려고 애쓰는가. 나아가 왜 또 그 현상이 ‘신체성’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가.
우리가 ‘우리의 마음의 내용’이 일상적이고 진부하다고 말하는 것은 철학적으로 일정한 관점을 전제로 했을 때 성립하는 말이다. 내가 지금 내 마음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아는 데는 실로 아무런 어려움이 없으며, 일견 지극히 당연히 ‘자명한’ 일인 듯이 보인다. 따라서 우리는 쉽게, 나에게 참인 것이 나 아닌 다른 모든 사람에게 참일 것이라는 자연스런 추론 끝에 ‘우리가 우리 심성내용을 파악하는 것은 자명한 일’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런데 과연 이 추론이 그럴 듯한가.
내가 내 마음을 파악하는 것과 내가 나 아닌 다른 사람의 마음을 파악하는 데는 실은 아주 중요한 차이가 있어 보인다. 옛 말에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은 내가 나의 마음을 아는 것과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는 것을 지적하는 속담이다. 나는 적어도 내 마음을 거울처럼 들여다 볼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거울이란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마음의 내용, 즉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엇을 바라는지 어떻게 아는가. 물론 우리는 다른 사람이 어떤 상황에서 어떤 말을 하고 행동을 하는가를 해석하고 이 해석에 기초해서만 그의 심성내용을 ‘추측’한다. 시사적인 비유를 들자면, 어떤 사람의 ‘사상을 검증하기’ 위해 우리는 그 사람의 행적과 그 사람의 말의 의미를 해석하여 유추적인 추론을 하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추론이 항시 불확실하고 지난한 게임이라는 것을 옛 속담의 저자는 웅변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왜 ‘우리의’ 심성내용의 파악에 언어의 의미 해석이라는 언어철학 문제가 개입할 수밖에 없는지, 또 현대에 언어현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밝혀진 논리학적 도구가 정 교수의 논의에 등장할 수밖에 없는지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말과 몸짓의 의미를 해석함으로 그의 심리세계를 이해한다.

내 마음을 비추는 거울은 없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내가 내 마음을 아는 것과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는 것에는 중요한 인식론적 차이가 있다는 가정에서 성립하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정 교수에 따르면 바로 이런 가정은 서양 근대철학, 즉 데카르트식 모더니즘 철학의 가장 중요한 가정 중의 하나이다. 정 교수는 “마음에 관한 한, 모더니즘은 ‘내 마음 나만 안다’라는 명제로 규정될 수 있고 포스트모더니즘은 ‘내 마음 나도 몰라’라는 문장으로 대표될 수 있다는 것을 제안”한다. 다시 말해 정 교수가 말하는 심성내용의 ‘신체성’이란 표현의 한 가지 중요한 함축은 내 마음은 나 자신만이 직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근대철학적 가정을 비판하고, 이 책의 결론 19장의 타이틀처럼, ‘내 마음, (다른) 사람들은 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정 교수 책의 핵심적인 논제 중의 하나는 우리가 우리의 마음의 내용에 관해 갖고 있는 상식적이고 일반적인 근본적인 가정에 대한 뒤집기를 시도하는 것이다. 즉 내가 내 마음을 투명하게 들여다 볼 수 있는 거울 같은 것은 없다는 주장이고, 따라서 지극히 역설적으로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내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다는 주장인 셈이다. “내 마음 나는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은 내 마음을 안다.”

디지털 ‘동물농장’을 연상시키는 철학

“내 마음 나도 몰라”, “사람들은 내 마음을 안다”라는 표현은 실상 우리말의 맥락상 지극히 일상적인 표현이다. 하지만 이 두 일상적 표현을 연결시킨 정 교수의 철학적 주장은 실은 매우 놀라운 주장이다. 내 생각으로 이 주장이 얼마나 혁신적인 주장인가를 심정적으로 이해하자면 다음과 같은 상상의 세계를 고려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모든 인간의 이마에 누구나 볼 수 있는 액정표시판 같은 것이 달려있어서, 그 사람의 머리 속에 어떤 생각이 스칠 때마다 그 생각과 느낌과 욕구의 내용이 문자 그대로 TV 화면의 자막처럼 나타난다고 가정해보자. 예를 들어 철수가 배가 고픈 생각이 들면 철수 이마의 액정표시판에 “나는 지금 배가 고프다”라는 자막이 실시간으로 비춰진다. 자, 가정상 모든 사람이 날 때부터 이런 액정표시판을 달고 나온다면, 그런 ‘인간’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가 바로 정 교수가 말하는 다른 사람들은 내 마음을 알지만, 나는 내 마음을 알 수 없는 (왜냐하면 내 두 눈으로 내 이마의 액정을 볼 수는 없으니까) 그런 언어공동체일 것이다. 만일 그런 사회가 가능하다면, 분명 그 사회는 우리가 사는 이 현실사회와는 전혀 상이한 사회일 것이다. 일상적인 ‘거짓말’이나 ‘음해’가 불가능한 사회, 정치적 사상 ‘검증’ 자체가 불필요한 사회, 나아가 ‘프라이버시’라는 인권 개념 자체가 발달할 수 없는 사회일 것이다. ‘표면적으로’ 이 앞 문장을 읽어 보라. 얼마나 이상적인 사회로 보이는가. 거짓말도 사기도 통할 수 없는, 정치적 사찰과 검증 자체가 불필요한 사회. 하지만 나 개인은 그런 ‘공동체’ 사회를 상상하는 데 등골에 으스스한 소름이 끼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싶다. 물론 이것은 나의 철학적 편견일 뿐이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을 상기시키는 위와 같은 상상(디지털 농장?)이 궁극적으로 정 교수의 심성내용에 관한 철학적 함축에 대한 과장이고 오해일 수도 있다. 하지만 20세기 이후 현대철학에서 이른바 데카르트적 근대적 유산을 청산하는 과정에서 제기된 여러 가지 인간 정신현상에 대한 포스트모던적 사고, 그리고 또 흔히 이른바 ‘심성내용에 관한 외부주의(externalism)’라고 불리는 현대철학의 유행하는 입장들의 적어도 일부들은 암묵적으로 그와 같은 함축을 시사하고 호소하고 있다는 것도 부인하기 힘들어 보인다.
여하튼 내가 내 마음을 직접적으로 이해하는 방식과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는 방식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가 아니면 없는가 하는 ‘철학적’ 문제는 어찌 보면 현학적인 철학자들의 지극히 이론적이고 비생산적인 ‘철학적인 고민’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방금 보았듯, 우리 자신의 정신세계와 우리가 모여 사는 공동체의 본성을 이해할 수 있는 궁극적인 열쇠는 이처럼 현학적인 ‘철학적인 고민’을 해결하는 데에서 주어질 수도 있다. 따라서 나는 인간의 정신현상과 그것을 통해 이루어진 인간 공동체에 대한 철학적 이해를 도모하는 모든 전문가들과 비전문가 독자들에게 정 교수의 노작과의 대화를 진지하게 권하고 싶다.

『심성내용의 신체성』의 내용은

거짓말도 사기도 통할 수 없는, 정치적 사찰과 검증 자체가 불필요한 사회. 하지만 나 개인은 그런 ‘공동체’ 사회를 상상하는 데 등골에 으스스한 소름이 끼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싶다. 물론 이것은 나의 철학적 편견일 뿐이다. 『심성내용의 신체성』의 내용은 책의 부제 ‘언어 신체성으로 마음도 보인다’에서 잘 드러난다. 정대현 이화여대 교수(철학)는 “로봇도 생각을 하나요?”라고 묻는 유치원생의 질문에 대답하기 곤란함을 예로 들며, 마음의 문제가 명쾌하게 해명될 수 없음을 토로한다. 정 교수는 모더니즘의 논지가 ‘내 마음 나만 안다’ 또는 ‘ 내 마음 내가 모를 수 없다’로, 포스트모더니즘은 ‘내 마음 나도 몰라’로 요약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정 교수는 두 경우 모두에 비판적 시선을 견지하며 두 가지 가설을 내세운다. “대상 내용이 대상 본질을 결정한다.” 그리고 “언어의미와 심성내용은 분리될 수 없다.”
마음 문제에 대한 지금까지의 논의들을 검토하는 등 복잡한 논의 끝에 내리는 정 교수의 결론은 이렇다. “언어는 신체적이고 마음은 공동체적으로 구성된 내용의 개인적 체험의 장이라는 것을 주장하고자 했다. 개인은 공동체 안에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나의 심성내용이 공동체적으로 구성된다면 그 심성내용이 체험되는 것은 나의 몸이지만 그 내용의 구성이나 구조 그리고 그 내용을 식별하는 방식은 공동체적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내 마음을 내가 모를 수 있고 공동체의 다른 사람들이 내 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내 마음을 모를 수 있다고 한다. 이를테면 내가 친구를 질투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있는 것처럼. 그러나 그 심성내용은 내 몸에서 나타나 있고,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가 이를 규정할 수 있다고 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