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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분홍 꽃바람이 전하는 사연...삶은 어떻게 빛나는가
연분홍 꽃바람이 전하는 사연...삶은 어떻게 빛나는가
  • 홍지석 객원기자·미술평론가
  • 승인 2010.03.22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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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을 알리는 전시

박노수, 「仙簫韻 B」, 한지에 채색, 180×150cm, 1955.

추운 겨울을 보낸 사람들은 따뜻한 봄을 그리워하기 마련이다. 그 가운데서도 미술인들은 특별히 봄을 그리워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미술작품은 대부분 발품을 팔아야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추운 겨울에는 당연히 전시장이나 전시공간을 찾는 사람 수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 반면 꽃피는 따뜻한 봄에는 전시를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마련이다.  봄에 좋은 전시가 많이 열리는 것은 당연지사. 이는 올 봄에도 마찬가지다. 지금 역사적 의의를 갖는 작고 작가와 원로작가의 전시, 참신한 중견과 신진작가들의 전시, 굵직한 미술관 기획전시가 진행 중이거나 예정돼 있다. 그 가운데 몇몇 주요 전시들을 일별해 보기로 하자.

    우선 3월 9일에서 3월 28일까지 서울 사간동 갤러리 현대에서 열리는 ‘한국 비디오아트의 선구자 박현기 10주기 기념 회고전’을 보자. 박현기는 1970년대 말부터 대구를 기반으로 TV와 비디오를 매체로 삼아 왕성한 실험을 전개한 작가다. 그는 이 새로운 매체들을 돌, 나무, 물과 같은 자연적 소재와 결합하여 현대 사회에서 정신적 가치가 숨 쉴 틈을 모색했다. 예컨대 돌 위에 TV 모니터를 얹은 그의 대표작 ‘무제’(1978)에서 TV 모니터 상 가상의 돌은 현실 돌탑의 일부를 구성한다. 가상과 실재가 상호작용하는 이 작품에서 우리는 장자의 蝴蝶之夢을 떠올릴 수도 있고 영화 「아바타」에서처럼 가상현실의 문제를 천착해 볼 수도 있다. 이 전시를 볼 때는 몸을 많이 움직여야 한다. 주저앉아 전시장 바닥에 투사된 우물-만다라를 바라보기도 하고, 눈을 감고 움직이면서 다른 감각 기관들로 쏟아지는 폭포를 느껴보아야 한다. 근래의 이른바 뉴미디어 아트는 이렇듯 온몸을 사용한 작품 감상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때로는 앉아서, 때로는 눈을 감고 느끼다
    서울 원서동 공간사옥 지하 공간화랑에서 열리고 있는 김기철 개인전 ‘華樣 Wayang’(3월 17일~4월 30일)도 그런 전시다. 김기철은 소리조각으로 잘 알려진 작가다. 이번 전시에서는 공간 사옥 지하의 붉은 벽돌로 마감된 벽면과 바닥의 패턴 등에서 그가 발견한 건축적인 화려함을 모티프로 삼고 있다. ‘화양’은 모든 방향으로 소리를 분출해 전체 공간의 분위기를 환기시켜 주는 하나의 유닛과, 관객의 존재를 감지해 소리를 내는 세 개의 유닛으로 구성돼 있다. 나지막한 소리의 배경만이 존재하는 빈 전시장에 누군가 진입하면 다른 빗소리들이 결합돼 작품이 완성된다. 네 개의 오브제에서 발산하는 소리는 종묘에 고적하게 내리는 빗소리를 녹음해 가공한 것으로, 삶의 빛나는 단면을 보여주기 위해 작가가 선택한 소리다.

양혜규, 「건축적인 신중(愼重)함을 애도하며」,  혼합매체, 185×100cm, 2008, 2009년 경기도 미술관 수집 작품
    올 봄, 주목을 요하는 또 다른 전시는 덕수궁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藍丁 박노수(1927~ ) 회고전(3월 17일~4월 18일)이다. 선명하고 투명한 색채, 선과 여백의 미를 통해 한국화의 독자적인 경지를 개척한 남정은 말, 노루, 소년, 선비, 달, 나무, 산, 강 같은 소재들에 의탁해 심상을 형상화한 관념 화풍으로 유명한 작가다. 시적 감수성이 두드러진 작품들은 해방 후 현대화를 모색했던 한국화 실험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전시 부제는 '봄을 기다리는 소년'이다. '소년'은 작가의 주요 소재인데 절개 있는 선비처럼, 고고한 이상을 가진 존재로 작가의 감정이입의 대상이다. 전시를 기획한 박수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에 따르면 '봄'은 희망에 대한 기대를 의미할 뿐 아니라 작품의 맑고 순결한 정신세계를 상징한다.

    한국화의 담담하고 소박한 가치를 선호하는 관객이라면 김진관 개인전 ‘씨앗이 전하는 소박한 행복’(장은선 갤러리 3월 17일~3월 27일)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김진관은 일상의 소소한 소재들을 간결한 형식으로 표현하는 작가다. 그의 그림에는 콩이나 팥, 호두, 들풀, 벼, 잠자리 같은 작고 사소한 생명이 화면의 어느 한편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장식적 화려함을 배제한 채 담담하게 생명의 씨앗을 표현하는 그의 화면은 작지만 큰 울림으로 생명의 가치를 노래한다.

    한편 경기도 미술관에서는 지금 신소장품전 ‘오! 명화’(4월 18일까지)를 진행중이다. 전시는 경기도미술관이 지난해에 수집한 서세옥, 조성묵, 홍명섭, 이상남, 정보원, 정연두, 양혜규, 배영환 등 현대미술작가 총 55명의 1970년대부터 2009년까지의 작품 58점을 선보인다. 수집과 전시는 다음의 네 가지 범주에 따랐다. 1) 1950년대에서 1990년 이전의 역사적 수작, 2) 1990년 이후 현역 작가의 대표 작품, 3) 경기도미술관의 기획전 출품작 중 미술관의 정체성과 운영 방향에 부합하는 작품, 그리고 4) 경기도 미술관 야외 조각공원 조성을 위한 대중 친화적 공공 미술작품. 미술관이 소장한 작품을 내세운 소장품전은 그 미술관의 현재와 미래를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전시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우리 미술의 현 단계, 더 나아가 우리 문화계의 전반적 동향을 가늠하고 더 나은 미래를 모색하고자 하는 문화인이라면 지역미술관의 신소장품전은 꼭 챙겨볼 전시다.

 

박현기, 「무제」, 모니터·돌·가변 설치, 1978.
베트남 현대미술에서 우리 모습을
    같은 문맥에서 부산시립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호우에이 콜렉션 특선전 : 베트남 현대미술’(1부: 3.6~4.25 / 2부: 5.1~7.11)에도 관심을 가져볼 만하다. 일본인 콜렉터 이토 부부가 부산시립미술관에 기탁 및 기증한 호우에이(豊英) 콜렉션 가운데 베트남 미술 작품 100점을 택해 베트남 근현대 미술을 소개하는 전시다. 이 전시의 출품작 100점은 1부와 2부로 나뉘어 선보인다. 1부에서는 베트남 현대미술 작가 25인의 작품을 한두 점씩 소개하고, 2부에서는 그 가운데 10인의 작가의 작품을 집중 조명할 예정이다. 출품작 100점 가운데 기증 작품은 34점 가량이다. 이 전시는 기탁, 기증 작품으로 진행되는 미술관 본격 기획전이라는 점에서 미술관의 작품 수집과 수집된 작품 활용의 독특한 모델이라 할만하다. 또한 이 전시는 친숙하지 않은 베트남 현대미술을 가깝게 접할 기회를 제공해준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베트남 현대작가들이 자국의 역사적 상처를 어떻게 마주 대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일은 우리 자신의 모습을 성찰할 계기를 제공할 것이다. 

홍지석 객원기자·미술평론가 kunst75@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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