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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모크라시’의 번역어 선택과 오리엔탈리즘의 그늘
‘데모크라시’의 번역어 선택과 오리엔탈리즘의 그늘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0.03.22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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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서양어 번역 사례’ 발표한 배병삼 영산대 교수(정치사상)

지난 13일 토요일 오후 2시. 고려대 문과대 서관 215호 작은 강의실에서 흥미로운 학술발표회가 열렸다. 거창한 제목을 내건 것도 아니고 그냥 조촐한 ‘월례발표회’ 자리였다. 한국번역비평학회(회장 황현산 고려대·불문학과)와 고려대 번역과레토릭연구소(소장 전성기 고려대·불문학과)가 함께 마련한 정례 발표회다. ‘흥미롭다’라고 단서를 단 까닭은 이날 발표된 배병삼 영산대 교수(정치학·사진)의 「동아시아의 서양어 번역 사례: ‘데모크라시’의 경우」가 시사적이기 때문이다.

배 교수의 글은 문제제기 측면에서 매우 분명한 논점을 유지하고 있다. 그는 에둘러가지 않고 곧장 문제점을 겨냥하고, 활을 당긴다. 지난 해 10월 타계한 『슬픈 열대』의 저자 레비 스트로스를 호명하면서, 그가 걸어온 지적 여정의 100년 시공간을 한국의 상황에 겹쳐 놓는다. “문화 다양성의 통찰을 제시했던 레비 스트로스가 살다 간 백년은 우리에겐 도리어 서양을 본받기에 급급한 세월이었고, 그렇기에 그가 들려준 ‘슬픈 열대’의 엘레지는 이 땅에서는 현재 진행형이다.” 배 교수는 이 현재 진행형은 ‘이 땅의 처지’만은 아니라고 한다. “서양 베끼기! ‘슬픈 동아시아’는 번역의 시대를 통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구어의 번역과 ‘슬픈 동아시아’의 메타포
‘슬픈 동아시아’는 일종의 메타포다. 그것은 자력으로 근대의 길을 돌파할 힘을 형성하지 못한 자들이 겪어야 하는 비극의 모습이기도 하다. 배 교수는 이 ‘슬픈 동아시아’가 어떻게 서양언어를 자신의 일상어로 빌려오게 되는지를 주목한다. 그가 보기에 ‘사이언스’와 ‘데모크라시’가 극명한 사례였다.

배 교수에 의하면, 데모크라시의 번역은 동아시아 삼국(중국, 일본, 조선)이 함께 참여한 국제적 차원에서 전개됐다. 데모크라시를 처음 번역한 것은 아편 전쟁으로 충격에 빠진 중국 지식인들이었다. 이들은 이 낯선 말을 번역하지 못해서 발음을 한자로 표기하는 데 그쳤다. ‘德謨克拉西’(demokelaxi)가 그것이었다. 이것이 다시 ‘民主’로 번역되기에 이르는데, 애초 ‘민주’는 전통적으로 사용해 오던 말로, ‘인민의 주인’을 뜻했다. 君主와 같은 의미였던 것이다. 배 교수는 이러한 번역어 선택, 즉 ‘인민의 주인’을 ‘인민이 주인’으로 바꿔치기하는 과정에서 이 낯선 개념 데모크라시의 토착화가 ‘혼동’을 낳았던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1890년대에 이르러 중국에서는 ‘인민이 주인’이라는 뜻의 ‘민주’가 대중화된다. 

한중일의 ‘민주’와 ‘민본’의 시차감
그렇다면 일본에서는 ‘데모크라시’ 번역이 어떻게 전개됐을까. 배 교수는, 요시노 사쿠조오(吉野作造)가 1914년에서 1916년에 걸쳐 <中央公論>에 발표한 논문들에서 민본주의를 데모크라시의 번역어로 확정했다고 설명한다. 흥미로운 것은 요시노 사쿠조오가 데모크라시를 두 개의 譯語, 하나는 ‘국가의 주권이 인민에게 있는 체제’(민주주의), 다른 하나는 ‘주권은 군주에게 있지만 인민의 권익을 위해 노력하는 체제’(민본주의)로 구분했다는 점이다. 요시노의 번역어 선택을 두고 배 교수는 “민주주의라는 말을 알면서도 민본주의라는 번역어를 선택한 것은 천황제를 의식하고 그 체제 내에서 데모크라시를 운용하려고 했던 데 있다”고 설명한다. 중국과 일본의 데모크라시 번역어 선택은 결국 각각의 ‘내면적 욕망’의 반영으로 볼 수 있다. 배 교수는 “군주제를 철폐하려는 욕망이 중국 지식인들로 하여금 데모크라시를 민주주의로 번역하게 만든 정치적 동기였다면, 천황제를 유지하려는 욕망이 일본 지식인들로 하여금 민본주의로 번역하게 만든 것”이라고 추론한다. 

중국, 일본에 이어 조선에서 ‘데모크라시’라는 용어가 등장한 것은, 배 교수에 의하면 1920년 종합잡지 <開闢> 창간호에서였다. 천도교인 박래홍이 현파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글 「데모크라시 略義」라는 논문이 일종의 기원이다. 박래홍의 논문 속에 드러난 ‘데모크라시’는 중국과 일본의 데모크라시 번역으로부터 모종의 영향과 세례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민본과 민주라는 두 가지 뜻을 함께 사용한 점, 그러면서도 좀 더 세밀하게 ‘민주주의’를 규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수성을 보이기도 한다. ‘인민에 의해 행하는 정치’(민주주의), ‘정치의 목적이 인민을 근본으로 삼는 것이다. 곧 인민의 행복을 증진하는 것이 민본주의의 주안점’(민본주의)이라는 설명에서 일본의 요시노 사쿠조오의 영향을 짐작할 수 있다.

배 교수는 박래홍의 논문에서 두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읽어냈다. 하나는 박래홍이 민본주의를 링컨이 게티스버그 연설내용과 연관 짓는 부분이며, 다른 하나는 민본주의가 동양에서 오랜 전통을 가진 것임을 천명하는 부분이다. 박래홍은  「書經」의 ‘民唯邦本, 本固邦寧’ 즉 ‘인민만이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튼튼해야 나라가 안녕하다’는 구절을 ‘민본’의 어원으로 지목하고, 孟子를 전통 민본주의 사상가의 대표적 인물로 꼽았다.

그 자신 맹자와 공자 공부에 전념하고 있는 학자인 배 교수는 이쯤에서 민본=맹자라는 도식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는 “민본주의는 민주주의 아류로서 혹은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도정의 미성숙한 상태를 지칭하는 말에 머문다. 다양한 수식어를 낳으면서 번창하는 민주주의와 달리 민본주의는 해묵은 맹자사상의 그늘에 머물면서 불임의 개념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과연 맹자는 자기 사상을 민본주의라고 칭하는 데 대해 만족할까?”라고 질문을 던진다. 그런데 왜 ‘민본’이 민주와 함께 가지를 이뤘던 것일까. 배 교수는 “그 근본원인은 개념이 될 수 없는 말을 억지로 개념화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민본은 애초부터 일본인들이 천황제라는 반-민주적 체제를 보전하면서 데모크라시를 번역하려는 모순된 욕망을 담은 허위개념”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패배한 민본주의’는 어디로 갔나
그렇다면, ‘데모크라시’의 번역 과정에 주목한 배 교수의 결론은 무엇일까. 배 교수는 ‘민본’과 ‘위민’ 모두 데모크라시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지적 편의주의 산물’이며, 그것이 맹자와 만난 것도 ‘우연한 조우’에 불과하다고 본다. 그는 데모크라시가 민주주의로 정착하는 과정에서 패배한 민본주의의 향방에 더욱 촉각을 세운다. 이 ‘패배한 민본주의’라는 용어가 맹자사상과 등가화 되면서 문제가 불거진다는 시각이다. 이것은 그의 말대로 어쩌면 ‘한국의 학문연구 풍토의 전반과 관련된 문제’일 수도 있다. “서구의 개념을 무반성적으로 수입해서 유통하기만 하는 한국 사회과학 연구의 ‘불임성’은 기본 개념들의 식민지적 특성, 혹은 오리엔탈리즘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점이야말로 오늘날 동아시아의 진짜 ‘슬픔’이다. 그리고 이제는 벗어나야할 슬픔이다.” 그가 이날 발표의 맨 끝자리에서 맹자의 텍스트 읽기를 더 정치하고 꼼꼼하게 할 것을 주문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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